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그녀를 배려했다면, 이런 식으로 물건을 주문하듯 사들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메리엘, 그는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어. 아마…… 언니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하나뿐인 동생만이라도 지켜내는 것. 아셀라가 이 결혼에서 바라는 건 그뿐이었다. 그녀가 서글피 웃으며 답했다.
“……고마워.”
아직도 베일을 쓰고 있어 다행이었다. 눈치 빠른 동생은 아마도 그녀의 표정을 전부 읽어낼 테니까.
“언니.”
메리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가슴팍에 폭 안겼다.
“난 세상에서 언니가 제일 좋아.”
아이의 높은 체온이 아셀라에게 전해졌다.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에 그녀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고 말았다.
“사랑해, 언니.”
왠지 콧마루가 시큰하고 목이 메어, 아셀라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래.”
몇 분 뒤에야 겨우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그러나 메리엘에겐 충분한 대답이었다. 아이가 헤헤 웃으며 그녀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하암…….”
그러더니 얼마 후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긴 하품을 했다.
꽤 늦은 시각이었다. 정원 곳곳에 켜진 등에서 뿜어내는 빛 덕분에 주변은 비교적 환했지만, 평소라면 메리엘이 잠들었을 시각이었다.
‘피곤한 모양이네.’
꼭 결혼하는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그 가족들 역시 할 일이 많았다. 메리엘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부터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아셀라에게 내색하진 않았어도 피곤했을 터였다.
“졸린 모양이구나, 메리엘.”
“아니야! 나 안 졸려!”
“눈을 보니까 잠이 잔뜩 왔는걸?”
메리엘이 아니라는 듯 도리질했다. 아셀라가 동생의 자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어서 자야 내일 일찍 일어나지.”
“그치만 언니랑 더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야.”
메리엘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연신 하품하며 졸린 눈을 비벼댔다.
아셀라가 한쪽에 마련된 선반에서 커다란 담요를 꺼내 메리엘에게 덮어주며 가슴께를 토닥였다.
“앞으로 언니랑 매일매일 이야기할 수 있어.”
“정말?”
“그럼. 밥도 같이 먹고, 산책도 하고, 잠도 같이 자고…….”
“그건 안 되는데!”
졸린 눈을 끔벅이던 메리엘이 별안간 눈을 커다랗게 뜨며 외쳤다.
“나랑 자는 건 안 돼! 언니는 대공 전하랑 자야 하잖아!”
순식간에 아셀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누, 누가 그런 소릴 했어?”
“에트망 자작 부인께서! 남자랑 여자가 결혼하면 한 침대에서 자는 거래. 같이 손을 꼭 잡고 자면 아기가 생긴댔어. 엄마랑 아빠도 매일매일 그러셨을 거라던 걸? 그래서 언니랑 내가 태어난 거라고…….”
“그, 그만. 메리엘.”
아셀라가 급히 메리엘의 말을 막아섰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베일로 감출 수 있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달아오른 얼굴에선 거의 김이 날 지경이었다.
“아, 알았으니까…… 이제 어서 자. 응?”
“우웅…….”
메리엘도 더는 밀려오는 수마를 참지 못했다. 느릿느릿하게 눈꺼풀이 아래위로 올라가더니 눈이 완전히 감겼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새근새근한 숨소리가 마차 안에 잔잔히 퍼졌다.
아셀라가 잠든 동생의 이마를 살며시 쓸다가, 잠시 뒤 몸을 일으켜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널찍한 창문으로 바깥이 다 비쳐 보였다.
‘밖에선 안이 보이지 않았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창에 가림막의 역할을 하는 커튼이 없었다.
‘창에도 마정석이 사용된 걸 거야.’
도대체 이 마차 하나에 몇 개의 마정석이 사용된 것인지, 대략 어림잡아도 가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차라리 생각을 포기한 그녀가 시선을 밖으로 돌렸다.
칼릭스 베네비토, 남자의 뒷모습이 비쳤다.
언제 갈아입은 것인지 그의 옷은 아까의 흰 예복 대신 온통 검은색의 정복이었다.
흰색의 예복이 남자의 검은 머리칼과 대비되어 화사한 느낌을 자아냈다면, 또 검은 정복은 그의 분위기를 그대로 흡수하며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다.
남자는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한심해.’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남자의 겉모습이나 품평하고 있다니.
아주 찰나에 스친 감상이었지만, 아셀라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때, 필립이 쭈뼛거리며 대공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는 대공과 라이젠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말을 걸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거지?’
필립이 판에서 찍어낸 듯한 웃는 낯을 하고 있었다. 뱀처럼 제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수능란한 그다웠다.
처음에는 비굴한 느낌이 들던 필립의 웃음은, 잠시 후 기쁨이 역력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필립이 자신이 원했던 것을 얻었을 때 짓는 버릇 같은 얼굴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필립이 기뻐하는 일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아셀라 가슴 한쪽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목 뒤로 삼키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때, 칼릭스 베네비토가 몸을 돌렸다.
“……!”
그 순간, 아셀라는 마치 꼬챙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몸을 떨며 몸을 뒤로 물렸다.
강렬한 붉은 눈동자가 그녀가 있는 마차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정석이 사용된 창문 탓에,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속속들이 살피는 듯한 시선에 아셀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던 차에 라이젠이 대공의 등 뒤에서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더니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곧바로 병사가 커다란 근육질의 흑마를 이끌고 나왔다.
‘마차에 타진 않으려는 걸까?’
다른 마차가 보이지 않기도 했고, 또 워낙 공간이 넓어 대공과 함께 마차를 이용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의 것이 분명할 흑마를 보니 아닌 모양이었다.
아셀라로서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남자가 지체 없이 말 위에 올라타 고삐를 부여잡았다. 몇몇 기사가 그를 따라 말에 올랐다.
‘이제 곧 출발하겠구나.’
그러나 대공은 마차와 정반대 방향으로 말머리를 틀었다. 아셀라의 눈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함께 출발하는 게 아니었나?’
그녀가 채 해답을 찾기도 전에, 말들이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죽 뻗은 길을 따라 그들의 모습이 금세 작아졌다.
잠시 뒤, 점처럼 작아진 그들이 마침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셀라는 칼릭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어쩐지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27화
마차 안의 아셀라가 잠든 메리엘을 내려다보던 그 시각.
칼릭스는 라이젠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셀라의 몸을 부축했을 때 느껴지던 가느다란 뼈마디를 생각하며 칼릭스가 덧붙였다.
“부족함이 없도록 잘 살펴. 마차로 일주일을 달려야 하니 쉽지 않을 거다.”
“예, 전하.”
줄곧 저택 안에서만 지내던 여자에게는 만만치 않을 여정이었다. 일주일을 바깥에서 머무르는 데다 어린 동생까지 돌봐야 하니 말 못 할 어려움이 적지 않을 터.
그러나 그녀는 그 어려움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칼릭스가 서약의 입맞춤을 앞두었을 때의 아셀라를 떠올렸다. 싫으면 관두라는 데도 고집스레 고개를 젓던 모습이 생생했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겼겠지.’
설사 원치 않는 일이더라도.
하기야 이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아셀라가 그와의 결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첫 만남 때부터 알 수 있었다.
‘…….’
그녀의 파란 유리구슬 같은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그건 단순히 처음 마주한 남편에 대한 막연한 거리감이나 긴장감 따위론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게나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결혼 서약을 한 이유는 아마도.
‘메리엘 샤르투스.’
하나뿐인 동생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부했을 시 필립이 아이에게 가할 보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칼릭스가 금세 알 수 있었을 정도로, 그녀는 동생에게 몹시 애틋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대공 전하.”
언제부터였는지 필립이 슬금슬금 그들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생각을 방해받은 칼릭스가 대번에 미간을 찡그렸다.
‘이자가 여기서 무얼 하나.’
손바닥을 겹쳐 비비는 필립의 눈빛이 탐욕으로 가득했다. 그가 칼릭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뗐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성가시다는 얼굴로 칼릭스가 턱짓했다. 말해보라는 의미였다. 필립이 기다렸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그, 주시기로 했던 금괴 말입니다. 말씀하셨던 양에서 절반만 왔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여…….”
칼릭스가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렸다.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에 라이젠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절반은 수도의 대공저에서 조달했으나, 나머지는 공국에서 오고 있어 늦어졌습니다. 며칠 내로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제야 필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칼릭스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필립에게 던지듯 내뱉었다.
“두 배를 주지.”
“예?”
앞뒤가 생략된 말에 필립이 눈을 크게 떴다.
“대신 메리엘 샤르투스를 넘겨.”
“그, 그게 무슨 말씀…….”
“친권과 양육권, 전부 포기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순간 필립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공이 왜 이런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오는 것인지,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설마 아셀라 때문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역시 메리엘의 각성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러는 건가?’
아직 메리엘의 열 살 생일이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변에선 메리엘의 이능 각성 여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메리엘은 꽤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만일 이능이 없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몇 년 더 데리고 있다가 성년이 될 때 적당한 가문에 대충 팔아치우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메리엘의 결혼에서 이 정도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
이번에 받은 막대한 결혼 선물만 하더라도 아셀라의 상대가 칼릭스 베네비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네 배.”
필립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받기로 한 금괴의 네 배라니.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액수였다.
동시에 필립은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어쩌면, 조금 더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얄팍한 계산을 했다.
“전하, 알고 계시겠지만 메리엘은 소중한 제 딸입니다. 어찌 딸을 돈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억만금을 주어도 아까운 것을요.”
“그래서?”
칼릭스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지루한 대화를 더 이어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흘러내린 머리칼을 건성으로 쓸어넘기며 냉랭한 얼굴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빙하처럼 싸늘한 시선에 필립이 몸을 흠칫 떨더니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언니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메리엘도 좋아할 겁니다. 그래서…….”
눈치를 슬슬 살피던 필립이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첫째 딸이 결혼해 떠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적적한데 둘째마저 보내려니 아비로서 영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말이지요. 그래서 말인데 그 마음을 조금 더 고려해 주십사 하는…….”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라이젠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결국, 돈을 더 달라는 소리였다.
물건을 흥정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행태에 구역질이 밀려들었다. 귀족이라고는 하나 기품도, 고상함도,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혐오스러운 인간 같으니.’
필립을 바라보는 라이젠의 얼굴에 깊은 멸시가 떠올랐다.
보아하니 잘라야 할 건 팔이 아니라, 교활하고 비열한 생각으로 가득 찬 저 머리통인 것 같았다.
‘정말이지 선대 샤르투스 후작이 너무도 운이 없었군.’
아델이 필립과 재혼한 데엔 불가피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라이젠은 아델이 무슨 수를 써서든 결혼을 거부했어야만 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피할 방법이 없었겠지만.’
그 와중에도 필립의 말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릭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만.”
칼릭스가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필립의 말을 잘랐다.
“라이젠.”
주인의 부름에 라이젠이 준비해 두었던 서류를 필립에게 건넸다.
‘탈적 동의서’라는 제목으로 시작된 서류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그가 포기할 권리들이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립을 놀라게 한 것은, 서류 하단에 쓰인 동의의 대가였다.
“열 배를 주지.”
필립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는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제대로 다물지도 못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동자 위로 대공의 서늘한 얼굴이 비쳤다.
칼릭스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서명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에 필립의 몸이 떨렸다. 그가 바들거리는 손으로 펜을 집어 들었다.
펜촉이 동의서에 닿자마자 칼릭스가 몸을 돌렸다.
그의 적안에 아셀라가 탄 마차가 비쳤다. 마정석이 사용된 창문이었으나 그는 어렵지 않게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칼릭스와 아셀라의 눈이 맞부딪혔다.
그는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잘게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금방이라도 저를 잡아먹을 괴물을 보는 듯한 반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척이나.
“전하.”
서명이 끝난 서류를 갈무리한 라이젠이 그의 뒤로 다가왔다.
“서류는 내일 중으로 처리될 수 있도록…….”
“황궁에 다녀오겠다. 먼저 출발하라.”
라이젠이 순간 멈칫했다.
“전하께서 직접 가실 겁니까?”
탈적은 가문에서 신고만 하면 되지만, 귀족가의 입적 절차는 몹시 까다로웠다. 황제의 공식적인 승인이 필요했다.
귀족의 수가 늘어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귀족들은 차고 넘쳤으니까.
그러나 칼릭스에겐 이는 거의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다. 라이젠은 내일 날이 밝는 대로 황제의 승인을 득할 계획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해가 완전히 저물어 주변은 온통 어둠이 깔려 있었다. 독대는커녕, 황궁의 문도 이미 닫혔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먼저 연락을 했으면 손님맞이는 제대로 해야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넣어온 건 황제였다. 물론 그는 황제의 요청을 깔끔히 무시하고 공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메리엘 샤르투스와 관련된 결정을 번복하기 전까지는.
칼릭스가 짤막이 명했다.
“마치는 대로 합류하겠다. 체력이 우수한 자로 기사 몇 명만 붙여라.”
* * *
시종장이 기다렸다는 듯 칼릭스를 황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가 향한 곳은 거대한 장미정원이었다. 마정석 등이 곳곳을 밝혀, 늦은 밤임에도 주변이 환했다.
칼릭스를 발견한 황제, 페르난데가 얼굴에 거짓 미소를 한껏 두르며 그를 맞이했다.
“안 올 줄 알았더니.”
마침 정원 한가운데 마련된 테이블에서 한가로이 차를 즐기고 있던 차였다.
“갑자기 대공이 온다는 기별을 받고 솔직히 놀랐어.”
이 저녁에 황궁에 들이닥친 칼릭스를 흥미롭게 쳐다보며,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한잔하겠나?”
“됐습니다.”
칼릭스가 페르난데의 제안을 단칼에 쳐냈다.
‘오만방자한 놈 같으니.’
고민 한 줌 없는 거절에 페르난데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다행히 오랜 시간 황제로 살아온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언짢은 기색을 감추고 겉으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답신도 없다가 굳이 찾아온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일 테고.”
칼릭스가 대답 없이 황제의 테이블 위에 가져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매끄러운 미소를 걸고 있던 페르난데의 얼굴이,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메리엘 샤르투스의 탈적과 록트린 가문으로의 입적이라니, 가당찮은 소리였다.
“대공, 이걸 내가 승인하리라 생각하는 건가?”
그러나 칼릭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가시다는 듯 건성으로 대꾸했다.
“시간 끌지 마십시오.”
어차피 승인해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같잖은 자존심 따위는 세우지 말라는 의미. 도저히 황제를 상대로 내뱉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페르난데의 눈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장성한 자식만 여럿인 황제에게, 칼릭스의 오만함은 눈에 거슬릴 정도였다.
그러나 페르난데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건, 이 까마득히 젊은 대공에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거였다.
황제는 칼릭스의 힘이 필요했고, 동시에 그의 힘이 두려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공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페르난데가 선택한 반응은 농담인 양 빈정거리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샤르투스 영애와 따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다 들었는데. 막상 결혼식장에서 보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일순, 칼릭스의 적안이 싸늘하게 식어내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28화
“꽤 미인이긴 하나 단번에 혹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콰직, 소리와 함께 황제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 페르난데의 눈이 금 간 대리석 테이블에 닿았다. 금의 위치는 칼릭스가 두 팔로 짚은 테이블 모서리의 정확히 한가운데 지점이었다.
비스킷을 반으로 가른 것처럼 동강 난 탁자를 본 페르난데가 헛숨을 삼켰다.
‘이건 절대 인간의 힘이 아니야.’
베네비토의 혈족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광포한 힘. 이를 직접 목도한 페르난데는 눈앞의 대공이 보통의 인간이 아님을 새삼 실감했다.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온몸의 신경이 죄다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내 아내를 함부로 품평하지 마십시오. 불쾌하니.”
칼릭스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일국의 황제에게 내뱉기에는 무도하리만치 불경한 말이었다.
그러나 페르난데가 느낀 감정은 노여움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무감한 얼굴이 오히려 오금이 저릴 만큼 두려움을 자아냈다.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은 전신에 소름이 죽 끼쳤을 정도로 오싹했다. 설원의 한복판에서 맨몸으로 맹수 앞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곁에 있던 시종들은 어느새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몸이 달달 떨리는 것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두려움을 감추며 페르난데가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농담일세. 뭘 그리 정색하고 그러나.”
새파랗게 어린놈의 비위를 맞추고 있으려니 자존심이 상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잔뜩 굳은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두르려니, 웃기보다는 울음에 가까운 기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페르난데가 자존심을 죽여가며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도 칼릭스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마른침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 같은 팽팽한 살기가 살갗을 날카롭게 찔러댔다.
‘이 괴물 같은…….’
몇백 년 전, 황가의 방계로 떨어져 나와 세워진 가문.
베네비토는 일반적인 귀족가와는 결을 달리하며 제국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하르메니아 제국에 뿌리를 두고, 작위와 영지를 부여받은 고위 귀족이었다.
그러나 베네비토가 소유한 막대한 영토는 영지라는 초라한 이름으로 부르기엔 너무나도 광활했다. 특히나 강력한 군사력은 제국도 대적하기가 힘들었다.
수도와 그리 멀지 않은 곳, 웬만한 왕국에 맞먹는 수준의 영지.
턱 밑에 칼날을 댄 형국과도 비슷했다.
그 강대한 힘 탓에, 공식적인 명칭이 없음에도 세간에서는 대공령을 베네비토 대공국으로 불렀다.
“그리고.”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시간이 지나가고, 마침내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선득해지는 눈빛에 페르난데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샤르투스 영애가 아니라 내 비입니다. 베네비토의 성씨를 가진.”
선연하리만치 붉은 눈이 한층 짙어지며 진득한 핏빛 색채로 빛났다. 페르난데가 황급히 대꾸했다.
“아, 그렇지. 혼인했으니 이제 대공비로군. 내 생각이 짧았네, 대공.”
그러나 황제의 대답에도 칼릭스의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대공?”
칼릭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조각상처럼 완벽한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표정했으나, 묘하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시 알려드려야 합니까?”
칼릭스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황제의 시선이 대공이 가져온 서류 위로 떨어졌다.
“어차피 하게 될 일을, 피차 귀찮게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칼릭스가 반으로 쩍 갈라진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상의 협박이었다.
‘젠장!’
페르난데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칼릭스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다못해 핑계를 들먹일 만한 명분조차 없었다. 메리엘 샤르투스는 명백히 록트린의 핏줄이었다. 나머지 혈족이 모두 사망한 지금은 제 언니와 함께 둘뿐인 계승권자였다.
페르난데가 분노를 참으려 있는 힘껏 주먹을 틀어쥐었다. 짓씹은 입술 안쪽에서 비릿한 맛이 퍼졌다. 그가 이를 갈며 시종을 불렀다.
“밀랍을 가져와.”
황제의 인장을 찍겠다는 의미. 그제야 주변을 미칠 듯이 휘감던 위험한 기류가 가라앉았다.
시종이 밀랍을 능숙하게 녹이자마자, 페르난데가 끼고 있던 반지를 그 위에 찍어눌렀다. 잠시 뒤, 인장의 선명한 문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종이 건넨 승인서를 받아 든 칼릭스가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대뜸 물었다.
“무슨 생각이지, 칼릭스 베네비토?”
칼릭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찰나의 시간, 페르난데는 대공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당연히 바보 같은 착각이었다.
“아실 필요 없습니다.”
7. 함정
칼릭스가 장미정원을 빠져나갔다.
동시에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잔디밭에 떨어지는 바늘 소리마저 들릴듯한 싸늘한 적막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곁에서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던 시종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곧, 황제의 분노에 반응한 살기 어린 마법이 정원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집채만 한 바윗돌로 몸이 짓이겨지는 듯한 감각에, 시종들이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그러나 페르난데는 그들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았다.
힘준 눈자위에 핏발이 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분노가 악문 잇새로 새어 나왔다.
‘칼릭스 베네비토!’
하르메니아의 황족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마법적 소양을 타고났으나, 그중에서도 페르난데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타고난 마력과 마법적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두 번째 황후의 셋째 황자였던 그가 다른 황자, 황녀들을 모조리 제치고 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힘으로 황좌를 거머쥔 뒤엔, 자리에 위협이 될 수 있는 혈족들을 깔끔하게 숙청했다. 방해되는 귀족 가문이 있으면 가차 없이 찍어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