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침실 사이의 벽에 두꺼운 방음벽을 세우는 것.
대공과 대공비의 침실 근처로는 방을 비워두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칼릭스가 아셀라의 옆방을 메리엘의 방으로 만들어 주겠다 약속한 이상 도리가 없었다.
메리엘 샤르투스는 어른들의 밤을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어렸다.
“완벽히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당연하지만, 그의 주군에게 그런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보고하지는 않았다.
라이젠 카단은 유능한 보좌관이었다.
고요하던 공간에 높은 알람 소리가 퍼진 건 그때였다.
회중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라이젠이 시계 옆에 툭 튀어나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일정한 간격으로 날카롭게 울리던 소음이 멈추었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전하.”
라이젠이 품에서 사각 은제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뚜껑 중앙을 누르자, 표면이 살짝 아래로 밀리며 은침이 튀어나와 손가락에 작은 상처를 냈다. 특수한 마법으로 봉인된 케이스는 정해진 사람이 아니면 열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핏방울 하나가 스며들자마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스가 열리고, 정체 모를 검은 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이젠이 능숙한 솜씨로 찻잔을 데워 뜨거운 물을 따랐다.
케이스 안에 함께 들어 있던 티스푼으로 가루를 계량하여 물에 넣자, 순식간에 가루가 녹으며 걸쭉해졌다.
검은색의 액체는 ‘차’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약’ 같은 느낌을 주었다.
칼릭스는 그 모양새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차가 완성되자마자 단숨에 들이켰다.
“…….”
무미 무취의 차. 아마 평생을 마시게 될 차였다. 죽을 때까지 익숙해지지 않겠지만.
칼릭스는 이 차를 마실 때마다 한없이 불쾌해지곤 했다. 그의 혈족에게 대물림되는 저주스러운 힘을 되새기는 증거인 것만 같아 생각할수록 피가 식었다.
“라이젠.”
빈 찻잔을 받침 위에 내려놓은 그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제 보좌관을 불렀다.
“예, 전하.”
“메리엘 샤르투스의 탈적(脫籍)을 준비해.”
뜻밖의 명령에 라이젠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여간해서는 주인의 명에 이유를 따지지 않았으나, 이번만큼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는 탓이었다.
‘전하께서는 대체 왜…….’
그의 주인이 결혼 상대로 지금의 대공비를 택한 데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이미 완벽하게 준비가 끝나 있었다.
적당한 시기에, 실행에만 옮기면 될 정도로.
라이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그렇게 되면 메리엘 샤르투스의 신분이 격하됩니다.”
가문에서 탈적이 이루어지면 성씨가 사라진다. 귀족에서 평민으로 신분이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칼릭스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친 아비가 클라우드 록트린이었지.”
아델의 첫 번째 남편이었던 클라우드는 록트린 자작가의 유일한 직계였다. 그러나 아델 샤르투스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와 결혼해 클라우드 샤르투스가 되었다.
록트린의 제1계승권자가 스스로 가문을 포기하면서, 어쩔 수 없이 대는 방계로 이어졌다.
문제는 록트린 가문의 유전병이었다.
불특정하게 병이 발현되었는데, 그 탓에 록트린가에서는 단명하는 이가 많았다. 클라우드 역시 이 때문에 요절했다.
클라우드가 아델과 결혼했던 십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록트린 가문에서는 가주가 무려 네 번이나 바뀌었다.
그마저도 지난해 록트린 영지 전역에 전염병이 돌면서, 가문을 이을 자격을 가진 혈족이 모조리 사망하고 말았다.
“하나, 록트린 자작가는…….”
“아직 가문 말소가 되지 않았다.”
만에 하나 혈족이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가문의 이름은 일 년간 유지하게 되어 있었다. 영지와 작위도 그 뒤에 국고로 환수되었다.
“그리고 메리엘 샤르투스는 록트린의 혈족이기도 하지.”
“록트린 가문을 승계토록 하실 겁니까? 하지만 메리엘 샤르투스는 너무 어립니다.”
제국법상 남녀 모두 성년에 이르는 열여덟 살이 되어야만 가문 승계가 가능했다. 만일 적법한 계승권자가 미성년일 경우에는 후견인이 필요했다.
“마땅한 후견인이 없지 않습니까?”
후견인이 되려면 최소 혈연관계이거나 법적 가족관계여야 했다. 재산 탈취나 다른 꿍꿍이를 품고 후견인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만들어진 법이었다.
“있잖나. 그것도 가장 완벽한 인물이.”
잠시 생각하던 라이젠이 눈을 크게 떴다.
“혹, 비전하를…… 말씀하십니까?”
라이젠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후견인이 되면 사실상 가주로서의 권한을 가졌다. 지금의 필립 샤르투스가 그런 경우였다.
아셀라가 메리엘의 후견인이 되면 그녀는 록트린 가문의 가주를 겸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역대 베네비토의 어떤 대공비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일이었다.
“아델에게서 후계 교육을 받았던 여자다. 처음이야 익숙지 않겠지만 차차 나아지겠지.”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주인의 의중을 감히 짐작기도 힘들었다.
“황제가 승계를 윤허하겠습니까. 게다가 계획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고작 열 살도 안 된 아이를 빼내는 것뿐이다.”
“황제가 샤르투스의 다음 이능자를 예의 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 결혼을 치를 떨며 싫어했다는 이야기는 잘 들었지. 축하사절을 보냈다기에 페르난데가 약이라도 먹은 줄 알았어.”
칼릭스가 황제의 이름을 거침없이 입에 올리며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황제파 귀족들을 이용해 신전에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넣는다는 정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황권과 대척점에 있는 신전은 현 황제의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헤르니야 여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가문, 샤르투스는 신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지금은 필립의 손에 가문이 넘어가면서 교류가 완전히 끊어진 상황이었지만.
“비전하께서야 지금껏 능력을 각성하지 못하셨으니 괜찮겠으나, 메리엘 샤르투스는 이미 표적입니다.”
베네비토의 정보원들은 메리엘에게 황제의 끄나풀들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이미 한 달 전에 눈치채고 보고했었다.
칼릭스의 적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봐야 황제의 개일 뿐이다. 공국에 들어가기 전에 남김없이 처리해.”
“예, 전하.”
허리 숙여 공손히 답한 라이젠이 확인차 물었다.
“흔적을 남길까요?”
황제가 알 수 있도록 일부러 보이겠느냐는 의미였다. 칼릭스가 입술 한쪽을 비틀어 올렸다.
“확실하게.”
지금쯤이면 메리엘 샤르투스가 함께 떠난다는 사실이 페르난데의 귀에 들어가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굳이 피하거나 감출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본보기를 보이는 편이 더 나았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그의 보호 아래 있음을.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내주세요.’
순간 떠오르는 목소리.
칼릭스의 시선이 느리게 정원을 향했다.
어느새 대지에 땅거미가 내리깔리며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한참 전에 제 동생에게 갔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준비를 마쳤을 시각이었다.
‘……약속…… 지켜주세요.’
고요한 호수 같은 눈에는 절박함마저 서려 있었다.
저를 믿지 못하면서도 붙잡을 수밖에 없었을 여자의 파란 눈은 쉴 새 없이 일렁였었다.
칼릭스가 몸을 돌려 문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이젠이 황급히 주인을 불렀다.
“전하, 어딜 가시는지요?”
문고리를 잡아 돌리던 칼릭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의 입매가 묘하게 풀어지며 순간이지만 부드러운 인상을 만들어냈다.
“내 비를 데리러.”
도주하는 대공비 25화
라이젠은 놀라다 못해 경악했다. 황급히 제 눈을 비빈 그가 다시 주인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은 평소와 똑같이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준비해. 비가 나오는 대로 공국으로 출발하겠다.”
“명 받듭니다.”
문이 닫혔다. 라이젠이 조금 멍해진 얼굴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잘못 본 거겠지.’
자신이 잠깐 착각한 게 분명했다. 그동안 쏟아지는 일로 무리한 탓에 헛것이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실 리가 있나.’
칼릭스를 몇 년간 곁에서 보좌했던 라이젠이었기에 확신하는 몇 가지가 있었다.
그의 주군은 기본적으로 감정의 온도가 낮은 사람이었다.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홀로 만년 빙하 한가운데 서 있는 존재 같았다.
냉정하고 잔혹해서 아름다운 사내. 그 무자비하고 치밀한 성품마저 그에겐 더없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만일 내가 제대로 본 거였다면…….’
라이젠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주인의 무언가가 아주 조금,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아셀라가 있다는 방문 앞에 칼릭스가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하인이 문을 막 노크하려던 순간, 그를 제지했다.
“되었다.”
“예?”
하인이 영문을 몰라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칼릭스가 짤막하게 덧붙였다.
“나오거든 밖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몸을 돌려 걸어왔던 복도를 도로 빠져나가는 그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쓸데없는 짓을…….’
결혼한 사이라고는 하나, 만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은 여자였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것조차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주고받은 말 몇 마디를 대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분명히, 칼릭스는 이 결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대공비의 자리를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는 없었던 차에, 마침 조건에 부합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현재의 이용 가치와 앞으로의 가능성을 따져 그녀를 선택했고, 이를 위해 적당한 값을 치렀다.
그뿐이었다.
당연히 아내라는 이름을 달 여자에게 그 어떤 관심도, 티끌만 한 호감도 없었다.
배려, 신뢰, 존중, 애정.
부부 사이에 필요하다는 그 어떤 것도 칼릭스에겐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필요로 이루어진 행위에 그런 얄팍하고 의미 없는 감정 따위가 끼어들 틈이 있을 리가.
그런데 왜.
뜬금없이 여자를 만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인지.
불현듯 그녀를 데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 * *
필립은 최악의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거의 완벽했던 결혼식을, 안토니가 순간의 실수로 망쳐버렸다. 일을 수습하고 마무리하느라 진이 다 빠지고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만신창이가 되어 침대에 누운 안토니를 보고 있자니, 차마 무어라 꾸짖을 수도 없었다.
얼마나 얻어맞은 것인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멍으로 뒤덮인 얼굴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오랜 치료 끝에, 마침내 신관이 몸을 일으켰다. 필립이 다급히 그를 붙잡으며 물었다.
“다 된 겁니까?
“예.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당분간 거동은 조심해야 하니, 그 점만 유의해 주십시오.”
신관의 말에 필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집사가 헐레벌떡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각하!”
“무슨 일이냐?”
“대공 전하께서 오늘 공국으로 출발하신다고 합니다.”
“무어라? 그게 사실이냐?”
필립이 몇몇 사용인을 대동하여 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새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거라면……!’
혹 아셀라와 대공 사이에 문제라도 생겼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의 일로 전전긍긍하던 차에, 결혼이 엎어지기라도 할까 봐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멀리서 칼릭스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필립이 급히 발걸음을 옮기며 얼굴에 거짓 미소를 덧씌웠다.
다행히 대공의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비슷해 보였으나,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바짝 긴장한 마음을 억누르며, 필립이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 떠나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필립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극도로 불안해졌다.
“굳이 서두르실 필요가 있습니까? 해가 저물었으니 오늘 밤은 여기서 묵으시고…….”
“신방이 아주 형편없더군.”
칼릭스가 단칼에 말을 잘랐다.
단호한 태도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명백하게 품고 있었다. 필립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안토니의 일도 있으니 어쨌거나 비위를 맞춰야 했다.
“혹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신 거라면, 말씀만 해주시면…….”
“나를 기만할 셈이 아니라면 그만하지 그러나, 필립 샤르투스.”
뼈가 담긴 칼릭스의 말에, 필립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대공이 눈치를 챘어!’
결혼식 첫날 밤, 새 부부가 머무르는 방은 둘 중 하나였다.
신부의 방, 혹은 첫날 밤을 위해 준비된 별도의 방.
그러나 오늘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레베카의 방을 아셀라의 방인 양 둔갑시켜 내놓은 사실을 칼릭스가 문제 삼으면 일이 커졌다. 심하면 대공을 기만한 행위로 간주 되어 크게 처벌받을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필립의 입이 밀랍으로 봉한 것처럼 꾹 다물렸다.
“…….”
앵앵거리며 생각을 방해하던 날벌레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칼릭스가 세워둔 마차에 지그시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역겨웠다.
들어선 방은 딱 보기에도 여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미리 수집한 정보가 없었다 해도 방의 진짜 주인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을 정도로.
차라리 작고 초라한 방일지언정, 정말로 여자가 쓰던 방이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왜 기분 나쁜지도 알지 못하면서, 칼릭스는 치솟는 불쾌한 감정에 짜증이 났다.
사실 그는, 그의 언짢음이 아셀라에게서 기인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불쾌감에 희생된 이들은 애꿎은 사람들이었다. 칼릭스는 베네비토의 기사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건조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공국에 도착하는 대로 기사단 전원을 집합시켜.”
기사들이 저마다 놀라 숨을 들이켰다.
주인의 성정 탓에 베네비토 가문의 기사들은 철저한 규율하에 생활했다. 감히 일을 허투루 하거나 훈련을 게을리하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대공의 점검이 이루어지는 날이면, 기사단원 중 반수는 뼈도 추리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워야 했다.
실상, 그의 괴물 같은 검술과 힘에 대적할 수 있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던 탓이었다.
소식을 전해 받은 기사들이 곧 마주하게 될 공포에 희게 질리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 * *
출발 준비를 마친 라이젠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전하, 준비가 끝났습니다.”
“대기하라.”
칼릭스가 메리엘의 방 창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방에는 아직도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언뜻언뜻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짐을 챙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내주세요.’
하나뿐인 혈육이라 그러한가.
그러나 칼릭스는 지금껏 제 피붙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제야 처음부터 없었으니 그렇다 치고서라도 부모에게도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못했다.
어미는 그를 낳은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산욕열로 사망했고, 아비는 베네비토의 핏줄이 으레 그렇듯 냉혹하고 잔인했다.
자식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선대 베네비토 대공이 임종을 맞던 때, 칼릭스는 전쟁터에 있었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지고 승기가 확실하게 잡힌 상황이었음에도, 그는 공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라이젠을 통해 장례가 잘 마무리되었다는 내용만 간단히 보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여자가 제 동생에게 보이는 감정은 조금, 생소한 것이었다.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칼릭스의 붉은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가늘어졌다.
방의 불이 꺼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동생의 손을 꼭 잡고서 걸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피던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는 제 동생을 이끌며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가능한 한 서둘러 걸어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여간한 눈썰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물이 흐르는 듯 우아한 걸음걸이였다.
아셀라가 중앙에 난 커다란 길을 가로질러 칼릭스의 앞에 섰다.
서둘러 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숨이 찼는지 말 사이사이에 짧은 간격이 있었다.
“메리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전하.”
칼릭스가 고개를 가벼이 까닥였다. 그러곤 그녀가 한쪽 손에 든, 크지 않은 여행 가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후작가의 영애가 직접 짐을 들고나오는데도, 밖에 나와 있던 사용인 중 누구 하나 먼저 다가가 그녀의 짐을 들지 않았다.
칼릭스는 새삼 여자의 가문 내 위치를 실감했다.
그의 눈짓 한 번에, 라이젠이 아셀라에게 재빨리 다가가 가방을 달라 청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라이젠에게 가방을 건넸다.
“짐은 그게 전부인가?”
“……네.”
좋게 말하면 단출했고,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초라했다.
아셀라는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곧 이어질 질문의 답을 준비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쉬이 납득하기 힘든데 다른 사람에게 이해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는 그녀에게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칼릭스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때까지도 한구석에 엉거주춤 서 있던 남자를 향했다.
시선을 받은 필립이 움찔거렸다.
‘정말이지 형편없군.’
어찌 된 게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차가운 경멸이 칼릭스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라이젠도 주인의 불쾌감을 고스란히 이해했다.
아무리 예전만 못하다지만, 샤르투스는 엄연히 제국의 고위 귀족 가문이었다. 지참금 지급을 거부한 건 그렇다 치고서라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후작가의 영애가 결혼하는데 이런 조촐한 짐이 가당키나 한가.’
저 짐가방 안이 죄다 보석으로 채워져 있다면 또 모를까, 아까 받아 들었던 가방의 무게를 생각하면 옷가지나 좀 들어 있고 말 게 뻔했다.
‘게다가 딸려오는 사용인이 하나도 없다니.’
보통 이 정도 가문의 영애라면 수발을 들 하녀가 몇 명쯤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따라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결국 대공비가 그동안 시중들 이도 없이 지내왔다는 의미밖에는 되지 않았다.
‘죽은 아내의 재산을 죄다 갈취하고도 부족했던가.’
라이젠은 필립의 수준이 바닥이라고 평했던 걸 취소했다.
이자는 쓰레기였다. 세상에 있어봤자 똥이나 만들어 낼 역겨운 오물 같은 인간.
이쯤 되자, 라이젠은 이제 그의 주인이 아까 안토니의 팔 하나라도 잘라버리지 않았던 게 퍽 애석해질 지경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26화
라이젠의 바람과는 달리, 칼릭스는 특별히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필립과 후작가의 사용인들, 저택의 모습을 차례로 찬찬히 훑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공비를 모셔라.”
라이젠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비전하, 이쪽으로 오시지요.”
썩 좋지 않은 분위기에 긴장하고 있던 아셀라가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동생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메리엘.”
아셀라가 손을 약간 힘주어 잡자, 메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젠의 안내를 받아 몇 걸음 걷자마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양편으로 갈라지며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라색으로 칠 된 바탕에 금으로 양각된 대공가의 문장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무려 네 필의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였다. 흠집 없이 윤기가 흐르는 마차 겉면이, 사용된 목재의 견고함을 짐작게 했다.
“전 괜찮아요. 대신 메리엘을 도와주시겠어요?”
아셀라가 온화한 말투로 에스코트를 사양하자, 라이젠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물론입니다, 비전하.”
라이젠의 손을 잡은 메리엘이 계단 형태의 커다란 발 받침대를 밟고 섰다. 아이의 발걸음이 사뿐사뿐하게 계단 위를 올랐다. 이윽고 마차 안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생의 뒤를 따라 올라가던 아셀라 역시, 열린 문 사이로 내부를 보자마자 문가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세상에…….’
그동안 들은 바가 적지 않았기에 새삼 놀랄 건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오만이었다. 마차 안은 아셀라의 예상을 비웃듯 호화로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눈앞이 아찔해질 정도의 화려함이었다.
문 좌우로 놓인 긴 소파는 그녀가 몸을 뉘어 잠을 청해도 될 만큼 널찍했다. 밤에도 어둡지 않도록 마차 천장의 중앙에는 마정석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다.
벽과 문을 비롯한 내부는 진녹색 실크에 금사가 들어간 탄탄한 직조 감의 천으로 틈 하나 없이 덧대져 있어 마차의 목재 부분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바닥에는 털이 긴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널따란 털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아셀라는 구두를 신은 채 이 위를 디뎌도 괜찮을지 아주 잠깐 고민해야 했다.
그녀가 가게 될 베네비토 가문이 어떤 곳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언니, 어서 들어와. 여기 되게 푹신푹신해!”
그새 소파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메리엘이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아이가 올록볼록한 소파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연신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아셀라가 천천히 이끌리듯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그녀는 붉은 천으로 싸인 푹신한 소파 위를 손으로 천천히 쓸었다. 아기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촉감이 손바닥에 감기듯 달라붙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리엘이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우리 침대보다도 더 좋은 것 같아. 그치, 언니?”
“……응.”
“에트망 자작 부인 말씀으로는, 대공 전하가 굉장한 부자래.”
“……그렇구나.”
“그래서 그런 분과 결혼하는 언니가 운이 좋은 거라고 하셨어. 후계자가 아닌 제국의 영애들은 다들 언니를 부러워할 거래.”
뿌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생에게, 아셀라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다들 못 가서 안달 내는 자리를 쥐여줘도 불평하는 꼴이라니. 엎드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필립도 그렇게 말했었다.
대공과 결혼하는 건 큰 행운이라고. 그러니 감사히 생각하라고.
정말 그럴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은 나를, 메리엘을, 우리를…….’
아셀라의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알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립감에 어둠 속으로 정신이 침잠했다.
“그렇지만 나는 대공 전하가 훨씬 운이 좋다고 생각해.”
깊게 가라앉던 그녀를 수면 위로 건져 올린 건, 귓가에 흘러든 메리엘의 밝은 목소리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아셀라가 동생을 바라보자, 메리엘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왜냐면 언니처럼 훌륭한 사람을 아내로 맞이했으니까!”
“…….”
“난 지금까지 언니보다 다정하고 예쁘고 똑똑한 사람은 본 적이 없는걸. 전하도 마찬가지이실 거야.”
메리엘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셀라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대공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