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71)
  • 최소한의 예의조차 생략해 버린 말에, 필립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졌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칼릭스에게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베네비토의 기사들이 진을 치듯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대공의 말 한마디에 수십 개의 칼날이 동시에 몸에 박히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아주 쉬웠다.

    마침내 필립이 조용해지자 칼릭스가 아셀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집요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자신이 대답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셀라, 그대가 원하는 바를 말해. 어떻게 하고 싶지?”

    “…….”

    아셀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인 사람.’

    증거라곤 오직 하나. 죽어가던 어머니가 손에 쥐여 주었던 기묘한 문양이 양각된 단추뿐.

    그러나 그는, 분명 어머니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대의 동생을 데려가길 원하나?”

    “…….”

    당시 불과 열다섯 살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삼 년 뒤, 정정하던 선대 베네비토 대공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대공위에 오른 칼릭스 베네비토는 무수한 전공을 세우며 승전의 주역이 되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메리엘을 데려가선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아셀라가 마침내 입술을 뗐다.

    “전하, 배려는 감사하지만…….”

    “아셀라.”

    칼릭스가 곧바로 아셀라의 말을 가로막았다.

    마치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대의 동생을 데려가는 게 좋을 거야.”

    “…….”

    “그동안 오래 떨어져 지냈지 않았나.”

    “…….”

    “원한다면 그대의 바로 옆방을 내주지. 언제든 서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말이야.”

    아셀라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반드시 메리엘을 데려가야 한다는 듯이.

    어째서?

    의심이 커지고 불안이 증폭되었다.

    정수리를 타고 올라오는 싸한 감각에, 아셀라가 급히 고개를 저으려 할 때였다.

    “메리엘 샤르투스는 그대와 함께 있는 편이 나아.”

    무서우리만치 가라앉은 목소리엔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마저 서려 있었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그렇다고 그 위험한 곳에 메리엘을 데려갈 수도 없다.

    아셀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메리엘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동생에게 날개를 달아주려 했으나 되려 숨통을 조인 꼴이었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는 자괴감에, 주체할 수 없는 괴로움이 일었다.

    왈칵 눈물이 솟아올라 급히 눈을 감을 때였다.

    “아셀라.”

    달큼한 향이 코로 훅 밀려드는 것과 동시에, 입술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깨물지 말고.”

    어느새 칼릭스가 아셀라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거의 맞닿은 몸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상처 난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동생의 안전이 걱정되는 건가?”

    흠칫 몸을 떤 아셀라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칼릭스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키 탓에 정수리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 없어.”

    제 입으로 말하면서도, 칼릭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어찌 되든 내버려 두면 그만인 것을, 뭐하러 답지 않은 고생을 자초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약속하지. 메리엘 샤르투스는 안전할 거라고.”

    왜 이런 약속 따위를 하는 건지도.

    그러나 다행히 그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은빛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힌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거리다가 마침내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말간 눈을 마주하자마자, 칼릭스는 어째서인지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이름을 걸고, 가문을 걸고, 그대에게 약조할 테니.”

    변명 같은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건 그래서였다.

    “…….”

    아셀라는 오늘 거의 처음으로, 칼릭스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그를 믿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여기에 있다고 해도 메리엘이 안전하지는 못해.’

    벼락처럼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차라리 깨달음에 가까웠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일단 죽이고자 결정했다면, 어디에 있든 별 의미가 없었다.

    메리엘이 샤르투스 저택에서만 머무른다 한들, 그의 접근을 차단하는 건 불가능했다.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낼 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입학시험까지는 몇 달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다면.

    결심을 내린 아셀라가 칼릭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켜주세요.”

    스스로도 믿지 않는 약속을 감히 입에 담으며.

    “그러지.”

    담백한 대답과 함께 칼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 남았군.”

    칼릭스의 서늘한 눈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던 안토니는, 칼릭스의 시선을 받자마자 저도 모르게 펄쩍 뛰었다.

    “사죄해야지.”

    “예?”

    “잘못을 저질렀으면 용서를 비는 건 상식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안토니 샤르투스는 놀라우리만치 눈치가 없었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칼릭스가 망설임 없이 다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집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칼릭스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안토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전하!”

    “네가 사죄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나.”

    “그, 그럼 누구에게…….”

    데굴데굴 구르던 안토니의 눈이 마침내 아셀라에게 닿았다.

    설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이 커졌다.

    “이, 이미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안토니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자 칼릭스가 웃었다. 핏빛 눈이 위험한 빛을 띠며 번뜩였다.

    “그래서, 하지 않겠다?”

    순간, 갑자기 안토니의 턱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의 털이란 털은 죄다 쭈뼛 솟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저 웃음은 명백한 경고였다.

    맹수의 아가리에 그대로 머리통이 처박혀진 듯한 공포에 안토니가 외쳤다.

    “하, 하겠습니다! 사과, 사과하겠습니다!”

    칼릭스의 키가 한 뼘은 더 컸기에 안토니는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사내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압감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어서 대충 사과를 하고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었다.

    이를 악물며 적당한 말을 고르는데,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무릎 꿇어.”

    ‘뭐라고?’

    안토니가 상황도 잊고 황망한 얼굴로 칼릭스를 쳐다보았다. 아셀라에게 무릎을 꿇으라니, 지금껏 그런 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무릎을 꿇는 건 늘 아셀라였으니까.

    “꿇으라는 말, 안 들리나?”

    수치심으로 얼굴에 확 열이 몰렸다. 그러나 피에 절은 듯한 대공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마자, 슬금슬금 피어오르려던 객기는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향해 도움을 구하듯 눈빛을 보냈지만, 필립도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없다.

    현실을 직시한 안토니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마침내, 그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기울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반대쪽 다리를 바닥에 댔다. 이윽고 나머지 한 다리도 바닥에 완전히 닿았다.

    “미안하다, 아셀라.”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어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자존심이 상해 누구라도 붙잡고 마구잡이로 패대기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겨우 그 한마디 말을 마친 안토니가 다 끝났겠거니 하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푹.

    검이 수직으로 박혔다.

    안토니의 눈이 파들거리며 아래로 향했다. 바닥을 짚은 두 손 사이에 정확히 박힌 검이 작게 진동하고 있었다.

    서늘한 은빛 검신의 표면에 충격으로 굳어진 제 얼굴이 비쳐 보였다.

    소름 돋을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내 비의 이름, 함부로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적 없어.”

    안토니가 침을 꿀꺽 삼켰다. 검으로 대리석 바닥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꿰뚫은 압도적인 힘을 눈앞에서 본 직후였다.

    진득한 공포가 목덜미를 내리눌렀다.

    분노는 두려움 앞에 빠르게 사그라들고, 생존의 본능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비 전하.”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려 확인하니, 아셀라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옆에 선 대공이 비틀린 웃음을 짓는 걸 본 순간.

    “제발! 무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안토니가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23화

    6. 미묘한 감정

    아셀라가 안토니의 사과를 받아들이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감싸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몰려와 있던 귀족들이 복도의 양 가장자리로 일제히 갈라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대공 부부와 베네비토의 기사들이 그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동안, 넓은 복도에는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이, 이만 실례…….”

    필립은 찾아온 귀빈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일찍 연회를 마무리했다. 크게 충격받은 안토니 역시 엉망진창이 된 몸을 비틀거리며 하인의 부축을 받아 사라졌다.

    실로 엉망이 된 결혼식 피로연이었다.

    한편, 결혼식에 참석한 이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비슷비슷했다.

    “아까 그 모습 다들 보셨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전하께서 저리도 무섭게 나오실 줄이야.”

    “그만큼 비전하를…….”

    “이 소식을 어서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확실한 건, 내일이면 대공이 아내를 끔찍하리만치 위한다는 사실이 제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지리라는 사실이었다.

    * * *

    원래는 레베카의 방이었던 아셀라의 가짜 침실에 들어선 대공이 조소했다.

    “이따위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란 소리인가.”

    순식간에 아셀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레베카의 방은 샤르투스 후작저에서 가장 잘 가꾸어진 방이었다.

    크고, 호화롭고, 장식된 물건들도 하나같이 고급품이었다. 단출한 침대와 테이블, 작은 화장대 정도가 전부인 아셀라의 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오늘 결혼식을 위해 커튼과 카펫 등이 바뀌어 더 화려하게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러나 칼릭스 베네비토에겐 이조차도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황가도 쉬이 어쩌질 못하는 베네비토 가문이 아니던가. 그 저택의 위용이 어떨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

    아셀라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과연 오늘 밤, 남자와 하룻밤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졌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그의 불쾌감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아셀라의 맞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갈 때였다.

    “라이젠.”

    “예, 전하.”

    “오늘 바로 출발하겠다.”

    두 사람의 대화에 아셀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 출발하겠다고?’

    당황한 아셀라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칼릭스가 다가오더니 베일을 살짝 걷어 올리며 물었다.

    “싫은가?”

    아셀라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아니, 노골적이리만치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오늘이든 내일 아침에 떠나든 달라질 건 없으니, 그렇다면 최대한 그의 뜻에 맞추는 편이 나았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메리엘이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 아셀라는 그제야 오늘 내내 메리엘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결혼식은 참석했었을 텐데.’

    분명 어린 동생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언니가 언제쯤 눈을 마주쳐줄까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메리엘을 찾을 생각도 못 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정신이 없었다고는 하나, 궁색한 변명일 뿐이었다.

    삼 년 만에 만난 동생이 얼마나 서운해했을지, 너무나 안쓰럽고 미안했다.

    아셀라는 지금에야, 그나마 동생과 함께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준비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기다리지.”

    흔쾌한 대답에 아셀라의 입이 놀라움으로 살짝 벌어졌다.

    “감사…… 합니다, 전하.”

    대답을 들은 칼릭스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여자의 말엔 묘한 데가 있었다.

    “그 정도도 못 해줄 정도로 악질이진 않아.”

    그러나 그 말에 아셀라의 말간 눈이 동그래지자, 칼릭스는 기분이 더 이상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감사해요.”

    살짝 고갯짓한 아셀라가 방을 나섰다. 그녀가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칼릭스는 어째서인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 *

    아셀라가 굳게 닫힌 방문 앞에 서 깊게 심호흡했다.

    막 노크를 하려는데,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소리쳤다.

    “언니!”

    “메리엘.”

    아셀라의 얼굴에 순식간에 기쁨이 차올랐다. 메리엘이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나왔어?”

    “왠지 언니가 올 것 같았어.”

    지금껏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아셀라가 미안한 마음에 어린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동안 필립의 명령 때문에 같은 저택에 있으면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

    사용인들은 철저하게 두 사람의 동선을 달리했다. 그 탓에 아셀라가 결혼 준비로 평소보다 자주 저택을 돌아다녔음에도 마주침 한번 없었다.

    “그런데 언니, 왜 베일 썼어?”

    “……그냥.”

    베일에 가려져 있으니 퉁퉁 부은 뺨을 보지는 못할 텐데도, 메리엘의 얼굴이 돌연 심각해졌다.

    “언니…… 설마 또…….”

    “아냐, 메리엘.”

    그러나 메리엘은 눈치가 빨랐다.

    아이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물기로 일렁였지만, 얼마나 열심히 참아냈던지 끝내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어서 들어가자.”

    아셀라가 메리엘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메리엘은 그때까지도 아셀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착하기도 하지.’

    하나뿐인 동생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아팠다.

    아델이 메리엘을 가졌을 때, 아셀라와 메리엘의 아버지였던 클라우드가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메리엘이 세 살이 되었을 때는 아델마저도 습격에 목숨을 잃었다.

    적어도 부모님과의 기억할 만한 추억을 간직한 그녀와 달리, 메리엘은 그렇지 못했다.

    ‘어리광 한 번 못 부리고…….’

    부모님의 사랑도 기억하지 못할 어린 나이에 두 분을 잃었고, 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언니와도 떨어져 먼 타지로 떠나야 했다.

    그 탓에 너무 어린 나이에 철이 들어버렸다.

    아셀라가 천천히 다리를 굽혀 메리엘과 시선을 맞추고는 통통한 뺨을 감쌌다.

    그렇게 안타깝게 메리엘을 쳐다보는데, 아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오늘 언니 봤어!”

    “……그랬어?”

    “응! 나 제일 앞에 있었거든. 꼭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님 같았어!”

    “그랬구나.”

    미안함과 죄책감에 아셀라의 표정이 흐려지려던 찰나, 메리엘이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언니, 결혼 축하해.”

    순간, 아셀라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모르는 이들의 축하 인사쯤은 얼마든지 받아넘길 수 있었지만, 메리엘에게만큼은 진심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주저하는 사이, 메리엘이 문득 생각났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셀라를 올려다보았다.

    “언니는 이제 대공 전하랑 같이 사는 거지?”

    그 말에 아셀라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메리엘, 실은 할 말이 있어.”

    “그게 뭔데?”

    메리엘이 궁금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셀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도 언니랑 같이 가게 될 거야.”

    “응?”

    멍해진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셀라가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 시험도 볼 수 있게 됐고.”

    메리엘이 커다란 눈을 끔벅거렸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몇 번이고 들은 말을 되짚었다.

    잠시 후, 메리엘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거, 거짓말이지? 나 속상할까 봐 해주는 말인 거지?”

    “언니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 그건 아닌데…….”

    메리엘이 세차게 도리질하며 생각했다.

    ‘언닌 약속을 꼭 지키는데…….’

    곰곰이 대화를 곱씹던 메리엘의 눈이 크게 뜨이며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럼 정말로?”

    “정말로.”

    메리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언니!”

    꺅, 하는 즐거운 비명과 함께 메리엘이 아셀라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나 좋아?”

    “응!”

    “거기 가서 절대 말썽부리면 안 돼. 알겠지?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시험도 꼭 통과하고.”

    “그럴게!”

    헤헤, 메리엘이 아이 특유의 꾸밈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분인 것 같았는데, 정말이었네.”

    메리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쓸어주던 아셀라가 갑자기 들려온 말에 몸을 굳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대공 전하 말이야.”

    메리엘의 대답에 아셀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혹시나, 만에 하나라도.

    “전하와 이야기를 했어?”

    “응! 착하다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어.”

    순간 아셀라의 전신에 소름이 쭉 끼쳤다. 둔탁한 망치로 머리를 내려치는 것만 같은 충격이 일었다.

    도대체 언제?

    칼릭스 베네비토는 따뜻함이나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이였다. 아이라고 해서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 사람이 아니었다.

    ‘메리엘 샤르투스의 교육은 이쪽에서 맡는 편이 낫겠어.’

    ‘그대의 동생을 데려가는 게 좋을 거야.’

    ‘메리엘 샤르투스는 그대와 함께 있는 편이 나아.’

    그의 말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만일, 칼릭스 베네비토가 자신만이 아니라 메리엘까지도 노리고 있는 거라면.

    정말 그런 거라면.

    심한 현기증이 일어 아셀라가 몸을 휘청였다.

    “언니, 괜찮아?”

    메리엘이 비틀거리는 아셀라의 팔을 붙잡고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불안해하는 동생의 얼굴을 본 아셀라가 치솟는 두려움을 급히 억눌렀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 했다. 자칫 잘못했다간 일을 완전히 그르치고, 메리엘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말 테니까.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애쓰며 입을 열었다.

    “메리엘, 언니 말 잘 들어.”

    “뭔데?”

    “네 열 살 생일에 어쩌면…….”

    메리엘이 능력을 각성해 낼지도 몰랐다. 그녀가 보기에도 동생은 영특한 면모가 있었다.

    “만일 네게 특별한 능력이 생기거든……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돼.”

    “왜?”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위험하다고, 네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고, 곧이곧대로 아이에게 말할 순 없었다.

    “소중한 거니까. 소중한 건 비밀로 해야 하는 거 알지?”

    “언니에게도 말하면 안 돼?”

    “응.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어디에 대공의 눈과 귀가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럼 언제 말할 수 있는데?”

    “네가 널 스스로 지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말을 마친 아셀라가 파들거리는 입술을 힘겹게 내리눌렀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이런 당부뿐이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그럴게.”

    아셀라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메리엘이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지키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몇 번이나 동생의 다짐을 듣고 나서야, 아셀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해.’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다.

    만약 메리엘이 능력의 각성을 이루어낸다면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었다.

    특히나 칼릭스 베네비토가 메리엘을 주시하는 상황이라면.

    방법을 찾아야 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24화

    칼릭스를 위해 별도로 마련된 방에선 새 가구 특유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필립은 커다란 방 두 개를 터서 벽을 새로 칠하고, 가구를 비롯한 모든 집기를 새로이 들였다.

    물론, 소요된 비용은 모두 베네비토 가문에서 부담했다.

    “전하, 라이젠입니다.”

    “들어와.”

    라이젠은 뒤처리를 막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아까 몹쓸 일을 겪을 뻔했던 하녀 세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특히 중요했다.

    당분간 생계에 어려움이 없도록 충분한 돈과 함께 다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감격하여 연신 허리를 조아리는 하녀에게 라이젠은 짤막이 대꾸했다.

    대공비 전하께서 명하신 일이니 그분께 감사하라고.

    ‘알 수 없는 분이다.’

    감히 주군의 아내를 깎아내릴 생각은 아니었으나, 그녀의 행동은 솔직히 라이젠의 예상 밖이었다.

    망나니 같은 안토니 샤르투스의 막장 행각은 익히 파악된 바였다.

    그녀 역시 오랜 시간 겪어왔을 테니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모른 척 눈 감는 편이 좋으리라는 건 깊이 생각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위험에 빠진 하녀에게 직접 다가가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다.

    심지어 사방에 적밖에 없는 상황에서.

    라이젠은 한 달 전, 대공비를 처음 대면했을 때를 떠올렸다.

    ‘뜻밖이었지.’

    대공의 명으로 조사하여 확보했던 대공비의 정보. 그러나 그녀 자체에 관한 내용만은 사실상 아무런 쓸모도 없었던 기억.

    라이젠은 그녀가 그의 주인만큼이나 예측하기 힘든 인물이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다.

    “전하, 지시하신 일은 전부―”

    라이젠이 일의 진척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칼릭스가 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가 알고 싶은 건, 한 가지뿐이었다.

    “연락은 했나.”

    앞뒤를 생략한 짧은 질문이었지만, 라이젠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예. 당도할 즈음엔 완벽히 마칠 수 있도록 조처해 두었습니다.”

    지금쯤, 공국의 대공저에선 메리엘 샤르투스를 위한 방 공사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대공비의 침실 바로 옆에.

    쉬지 않고 이동한다면 공국까지는 약 일주일가량 소요되는 거리였다. 시간이 촉박한 탓에, 베네비토 가문의 가용 인력은 모두 방을 공사하고 꾸미는 데 재배치되었다.

    칼릭스가 무심한 어조로 덧붙였다.

    “아이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걸 가져다 둬. 장난감이든 뭐든. 환경이 바뀌면 불안해할 테니.”

    “그 부분도 일러두었습니다. 충분히 준비해 둘 예정입니다.”

    라이젠의 지체 없는 대답에 칼릭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그의 머릿속에 동생을 향한 걱정으로 가득하던 아셀라의 파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힘들어하면 마찬가지로 적응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귀찮아지는 건 그였다.

    칼릭스는 자신이 답지 않게 아셀라를 신경 쓰는 이유가, 단지 제가 불편할 일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으려는 것뿐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칼릭스의 곁에서, 라이젠이 조용히 콧잔등을 매만졌다.

    사실 그가 대공성 쪽에 공사를 지시하며 특히 강조했던 사항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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