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71)
  •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상황이 드러나는 것을.

    칼릭스가 아셀라를 향해 걸었다. 아셀라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지만, 큰 보폭의 그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칼릭스의 단단한 팔이 아셀라의 허리를 감았다.

    놀란 아셀라가 무심결에 그의 가슴팍을 힘껏 밀었지만, 칼릭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의미한 반항이 멈추었다.

    아셀라는 칼릭스를 쳐다보지도, 그렇다고 더 밀어내지도 못했다. 바닥으로 떨어뜨린 시선만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칼릭스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아셀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게 기대. 얼굴이 가려지게.”

    ‘아.’

    그제야 칼릭스의 의도를 깨달은 아셀라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그녀는 몰려오는 사람들을 등지고 서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그에게 기댄다면, 사람들이 퉁퉁 부어버린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을 터.

    “라이젠.”

    대공의 충직한 측근은 주인의 부름만으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라이젠의 손짓에 따라 베네비토의 기사들이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이들을 막아섰다.

    “베일을 가져와.”

    짧은 명령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릭스에게 섬세하게 짜인 베일이 건네졌다.

    가장자리에 화려한 수가 놓인 베일은 충분히 넓어서, 정수리를 기준으로 얼굴과 뒷머리를 덮고도 어깨선까지 내려왔다.

    손수 아셀라의 머리 위로 베일을 씌운 칼릭스가 확인차 물었다.

    “불편한가?”

    “아니요…… 괜찮아요.”

    답답한 베일이 이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망가진 얼굴을 내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녀를 안도케 했다.

    베일이 제대로 고정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칼릭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새 정신을 차린 안토니가 필립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필립이 안절부절못하며 의사를 불러오라 외쳤다. 그러나 하인은 흉흉한 기색으로 주변을 뱅 둘러싼 베네비토 가문의 기사들 탓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있었다.

    “뭘 하는 것이냐! 어서 의사를 불러오래도!”

    “그건 안 될 일이지.”

    칼릭스가 필립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오만한 웃음에, 필립은 눈바람이 몰아치는 벌판에 발가벗겨져 내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감각에 몸이 움찔거렸다.

    “작위도 없는 일개 영식 따위가 내 비를 모욕했는데.”

    칼릭스의 붉은 눈이 섬뜩할 정도로 기이한 빛을 발했다.

    “게다가 마땅히 주인을 지켜야 할 것들은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었고.”

    자리에 있던 사용인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대공이 모욕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그게 실상 어떤 짓이었는지 아는 탓이었다.

    기절해 쓰러진 세실을 제외하고, 그들 중 누구도 안토니를 말리거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대공이 안토니에게 보인 서슬 퍼런 분노와 대공비에게 한 행동으로 그들은 여실히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난 내 걸 건드리는 것들을 봐주지 않아.”

    주군의 목소리에 라이젠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유능한 대공의 신하였으나, 으레 아랫사람이 그렇듯 불필요한 일을 하는 걸 싫어했다. 그런데 주제를 모르는 쓸데없는 인간들 때문에 구태여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주군의 결혼식에서.

    라이젠의 머릿속으로 시신의 처리를 어떻게 할지, 이 사태를 지켜보는 이들의 입을 어떻게 막을지 등의 계산이 빠르게 오갔다.

    그의 주군은 소유욕이 강한 자였다.

    아셀라 샤르투스, 이제 아셀라 베네비토가 된 그녀에게 칼릭스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가 그의 비이며, 대공을 제외하면 베네비토의 성을 가진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주인을 무는 개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겠지.”

    칼릭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네비토의 기사들이 칼을 빼 들었다.

    스릉거리는 묵직한 금속성의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울리자, 사용인들이 너도나도 숨을 들이켜며 짧은 비명을 냈다.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 무릎을 꿇었고, 몇몇 이는 아예 흐느끼며 애원했다.

    “사,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부디 자비를……!”

    조금 전까지 아셀라의 꼴을 비웃던 자들은 사라지고,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만이 남았다. 비열하고도 졸렬한 변화였다.

    칼릭스가 두 손 모아 비는 이들을 감흥 없이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받은 안토니의 몸이 뻣뻣해졌다. 아까의 가차 없던 폭력을 떠올리자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술기운은 완전히 날아간 지 오래였다.

    혓바닥이 굳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안토니를 대신해, 필립이 얼른 핑계를 주워섬겼다.

    “전하! 제 아들은 단지……!”

    “술에 취해서, 그리 변명할 셈인가?”

    “그, 그건…….”

    자신이 하려던 말을 가로채인 필립이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그의 귓가에 귀족들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기사들로 둘러싸인 복도의 양 끝에는 몰려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무슨 일이죠?”

    “샤르투스 영식이 비전하를 모욕했다는데요.”

    “모욕이라니, 대체 어떤……?”

    “그건 모르겠어요. 대공 전하께서 진노하신 것 같은데…….”

    필립이 주먹을 꽉 쥐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렇게나 처신을 조심하라 했건만, 기어이 술을 퍼마시더니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도저히 그의 선에서 덮을 수 없는 사고를.

    “그대 양아들의 이름이.”

    낮다 못해 땅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대공의 음성에 필립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아들을 책망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았지만, 칼릭스의 말이 더 빨랐다.

    “안토니, 라 했던가.”

    눈치 빠른 이들은 칼릭스가 안토니의 성을 빼놓고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일부러 의도한 일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전하…….”

    필립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늘 기민하게 돌아가던 그의 머릿속이 지금은 기능을 멈추어버린 것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잖나. 그대 양아들이 내 비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칼릭스의 붉은 입술이 고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위험한 미소가 걸렸다.

    반면, 선연한 색채로 번뜩이는 적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대비가 무서울 정도로 오싹하여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필립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릴 뻔했다.

    “제가, 제가 제대로 훈육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그만.”

    필립의 말을 차갑게 잘라낸 칼릭스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베일을 쓴 여자는 이 사단 속에서도 고요히 서 있었다.

    ‘어떻게 할까.’

    피식, 대공의 작은 웃음소리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동요했다.

    심지어는 라이젠과 베네비토 가문의 기사들마저 흠칫했을 정도였다.

    대공이 이처럼 웃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마저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셀라.”

    자신을 부를 줄은 몰랐기에, 칼릭스의 품 안에서 아셀라가 멈칫했다. 그러나 잠시 후, 차분한 음성이 베일 속에서 흘러나왔다.

    “네, 전하.”

    “그대의 오라비니, 그대에게 처벌의 권한을 주지.”

    베일 속에 얼굴이 감춰져 있는데도, 칼릭스는 그녀의 말갛던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자그마한 손이 몇 번 치맛자락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

    한편 아셀라는 칼릭스의 의도를 가늠하려다가, 무의미한 시도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자신이 그의 저의를 짐작한다 한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게 그녀에게 가해지는 시험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셀라는 칼릭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가 자신에게 안토니의 처분을 맡겼다고, 단순히 생각하기로.

    ‘정도가 중요해.’

    너무 과한 처벌을 내려서는 안 됐다.

    어쨌거나 안토니는 곧 작위를 승계할 귀족이었고, 무엇보다 필립 부자의 손에는 메리엘이 있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고 메리엘에게 해코지를 하려 든다면 그녀가 막을 방도가 없었다.

    반대로 너무 보잘것없는 처벌도 안 되었다.

    대공비를 모욕한 죄는 대공을 모욕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여지가 충분했다.

    그 증거로 대공의 기사들이 죄다 칼을 빼 들고 언제라도 관련자들을 베어낼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짧은 시간 그녀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중 어느 것도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다.

    고심하던 아셀라는 결국 정공법을 택했다.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요?”

    대공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순간, 칼릭스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그의 적안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칼릭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의 침착한 눈을 응시했다. 분명 베일을 쓰고 있는데도 그 촘촘한 천 사이로 엿보이는 푸른 색채는 선명하기만 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니, 생각보다 당돌한 구석이 있었다.

    역시 마냥 순종적이지만은 않다는 건가.

    그렇다면 기꺼이.

    “무엇이든.”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조금 더 단단히 붙들었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작은 진동에 그의 눈이 저절로 휘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하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귓가에 입을 바짝 붙이자 긴장한 몸이 움찔거렸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반응에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21화

    그들의 대화를 듣기 위해 숨소리마저 죽인 사람들 덕에,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살얼음 같은 고요함이 장내에 감돌았다.

    칼릭스의 냉혹한 시선이 그 자리에 선 이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대가 원한다면.”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그가 나긋한 음성으로 아셀라에게 속삭였다.

    “죽여도 좋아.”

    일순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칼릭스의 말에 담긴 섬뜩한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자는 여기에 없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그래도 오누이 사이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귀족들이 경악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정확한 사유를 알지 못하니 답답했으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끝에 다다라서는 그들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향했다.

    제 신부를 내려다보는 대공과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대공비에게로.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베일 속의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곧 나오게 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숨 막히던 정적이 누군가의 외침으로 파사삭 깨졌다.

    “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필립이었다.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벌게진 얼굴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칼릭스는 태연한 얼굴로 짧게 일갈했다.

    “전혀.”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십니까?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겨우?”

    칼릭스의 얼굴에 비소가 스쳤다.

    “후작 권한 대행씩이나 되는 자가 이렇게나 상황 파악을 못 할 줄이야.”

    분명 웃고 있는데, 전혀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살을 에는 겨울 칼바람 같은 목소리에 필립의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처분한다면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라이젠이 기다렸다는 듯, 두 손으로 검을 받쳐 들어 칼릭스에게 내밀었다. 손잡이를 잡은 그가 검을 가볍게 빙그르르 돌리곤 일직선으로 세웠다. 날 선 은빛 검신이 예리하게 빛났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을 가를 것 같은 첨예한 검날을 마주하자, 필립은 자신에게 선택지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

    “그러니 제발, 제발 검을 거두어주십시오!”

    필립이 몸을 거의 반으로 접을 듯이 허리를 숙이며 사정하기 시작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죽음의 공포 앞에 자존심은 곧바로 내던져졌다.

    수치심이라든가 모멸감 따위는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칼릭스가 잠시간 그 꼴을 바라보다 아셀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결정했나?”

    칼릭스의 물음을 들으며, 아셀라가 베일 속에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아무리 필립과 안토니라 한들, 여기서 결정된 사안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오늘 벌어진 일의 증인이었다.

    “네.”

    아셀라의 작은 고갯짓에 긴 베일이 나풀거렸다.

    칼릭스가 허리를 감았던 팔을 풀고는 그녀의 등 뒤에 섰다. 자연스레 아셀라가 필립과 마주 보게 되었다.

    “…….”

    지금껏 방법이 없어 발만 굴렀다. 안타까워하며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이용한다면.

    지금 필요한 건 하나뿐인 동생을 위한 용기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아셀라가 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잊지 마. 그대가 어떤 처벌을 원하든 들어준다고 했던 것.”

    아셀라의 망설임을 눈치챈 듯, 칼릭스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아셀라가 용기를 내어, 그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바람을 꺼냈다.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내주세요.”

    실력 미달을 이유로 입학시험에서 한 명의 학생도 뽑지 않은 적이 있었을 만큼, 제국 제일의 교육 기관으로 손꼽히는 곳.

    그만큼 수준 높은 교육이 이루어졌고, 제국 최고의 교수진 아래 쟁쟁한 인재들을 배출해 냈다.

    ‘만일 입학할 수만 있다면.’

    영특한 아이였다.

    일단 아카데미에 가면 재능을 드러낼 것이고, 뛰어난 기량으로 금세 두각을 보일 것이다.

    ‘나처럼 팔려가지 않아도 돼.’

    메리엘은 그곳에서 날개를 달 것이다. 그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러면 오라버니의 목숨을 살려드릴게요. 다른 이들도요.”

    그러니 이는, 힘없는 언니가 하나뿐인 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귀족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역대 황제들의 기본 소양이 아카데미 졸업일 만큼, 아카데미의 위상은 하르메니아 제국 내에서 실로 대단했다.

    귀족들은 누구나 아카데미에 자제를 보내길 꿈꿨고, 입학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었다. 졸업생은 어딜 가든 대우받았고, 아카데미에서의 인연으로 황제를 가까이서 보필하게 된 이도 많았다.

    자질이 있다면 시도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대공비의 말에서, 마치 필립이 둘째 딸의 아카데미 입학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귀족들이 아셀라와 필립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상황을 주시했다.

    필립은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기를 써야 했다.

    ‘저 망할 계집이 기어이!’

    화가 치밀어올라 미칠 지경이지만 보는 눈이 너무도 많았다.

    필립이 귀족들을 힐끗거리며 분위기를 살폈다.

    그들의 얼굴에 저마다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당연히 장려되어야 할 일을 왜 대공비가 굳이 요구까지 해야 하는지 의아해하는 것이었다.

    필립의 비상한 머리가 방도를 찾기 위해 부산히 돌아갔으나 마땅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메리엘이 차라리 깜냥이 되지 않는 멍청한 아이였다면 일은 쉬웠다.

    그러나 가능성이 있는데도 일부러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그는 큰딸의 가주 계승권을 박탈한 것도 모자라 자질 있는 작은 딸의 교육조차 막았다는 오명을 쓰고 말 것이다.

    아셀라는 그나마 어미의 죽음과 관련 있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으나, 메리엘의 경우는 사안이 달랐다.

    ‘젠장…….’

    필립이 바르르 떨리는 입가를 힘주어 누르며 애써 얼굴에 미소를 덧씌웠다.

    아셀라의 요구는 극히 상식적이었다.

    제 오라비의 목숨을 구하면서도 터무니없는 사과 요구로 자존심을 짓밟지는 않는다. 대공의 면을 살리면서도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그 와중에 안토니를 죽이겠다는 칼릭스 베네비토의 협박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필립의 시선이 유난히도 살풍경한 대공의 검에 닿았다. 지난 영토 전쟁에서 저 검이 베어냈을 것들을 상상하자 솜털까지 쭈뼛 솟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겠나?”

    대공의 다그침이 이어지자, 결국 그는 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셀라,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어차피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편이 나았다.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그야 메리엘이 시험에 통과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뭔갈 잘못 이해한 모양인데.”

    칼릭스가 단칼에 필립의 말허리를 잘랐다. 교묘한 말장난에 넘어가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메리엘 샤르투스가 시험에 떨어질 일은 없을 거야.”

    “예?”

    필립이 멍청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그대 아들의 목도 함께 떨어질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소스라치게 놀란 나머지, 필립이 말까지 더듬으며 외쳤다.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서 있던 안토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칼릭스는 이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내 비의 조건은 메리엘 샤르투스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거야. 겨우 시험 보는 기회 따위를 주는 게 아니라.”

    그제야 귀족들의 얼굴에 납득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카데미에 보내기 위해선 막대한 투자가 필요했다.

    남들과는 비교되지 않는 천재성을 타고난 이들도 간간이 있으나,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이게 마련이었다.

    결국, 본인의 노력과 배움이 아카데미 입학을 결정했다.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특출함을 증명해야 하니,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양질의 교육을 받았는지가 입학시험의 성패를 좌우했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최고의 선생을 붙여야 할 거야.”

    필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을 파르르 떨며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탐욕스러운 얼굴에는 충격만이 가득했다.

    일말의 표정 관리도 하지 못하는 필립을 지켜보며, 칼릭스가 차갑게 비소했다.

    ‘웃기는군.’

    필립이 샤르투스의 직계인 두 딸에게서 앗아간 것에 비하면 이는 새 발의 피였다. 제 것도 아닌 것을 꾸역꾸역 틀어쥐고 내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꼴이 가소로웠다.

    그러나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칼릭스는 머지않은 과거, 황제와의 밀담을 떠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이자는 어리석게도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다가 비참한 끝을 맞이하게 될 터.

    칼릭스는 단지 그 시기만을 가늠하고 있었다.

    굳이 손쓰지 않아도 자멸할 미래가 훤히 보여 지금껏 내버려 두었으나, 오늘,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생각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차라리.”

    저답지 않다, 입을 열면서도 칼릭스는 생각했다.

    그는 한번 내린 결정을 좀처럼 뒤집는 경우가 없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후회하거나 과거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이미 마음먹은 일을 번복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예외가 지금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메리엘 샤르투스의 교육은 이쪽에서 맡는 편이 낫겠어.”

    “예? 그게 무슨 말씀…….”

    “아니면, 자신 있나?”

    필립이 마른침을 삼켰다.

    안토니의 목이 걸려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메리엘을 아카데미에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추산되는 교육비는 어림잡아 계산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 믿을 만한 선생을 구하는 건 더 어려웠다. 실력으로 이름난 이들은 이미 다른 가문에서 선점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선발시험까지는 이제 채 몇 달도 남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했다.

    “혹시…… 후원을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필립의 얼굴에 기대가 서렸다. 베네비토 가문의 후원이 있다면 일은 훨씬 쉬워질 터.

    “후원이라.”

    짧은 대답이 읊조리듯 나직했다.

    칼릭스가 고개를 내려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

    “아셀라.”

    냉정하기 짝이 없던 사내의 얼굴이 설핏, 부드러워졌다. 아주 예리한 사람이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혹, 그대의 동생도 함께 데려가길 원하나?”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말에, 아셀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22화

    그녀는 하마터면 안 된다고 소리칠 뻔했다. 다행히 이성을 부여잡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던 말을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나마 얼굴이 베일로 가려져 다행이었다.

    ‘메리엘……!’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이가 맞부딪히며 딱, 딱 소리를 냈다. 뼛속까지 스미는 선득한 공포에 오한이 일 듯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연신 피를 토하며 힘겹게 말을 잇던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베네비토를, 그를 조심…….’

    ‘……다고, 약속해…… 주렴…….’

    칼릭스 베네비토를, 그를 조심해.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메리엘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주렴.

    숨이 끊어져 가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당부.

    그러나 그 약속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킨 것이 없었다.

    그녀는 칼릭스 베네비토와 결혼했고, 제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며, 메리엘은 여전히 필립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것이 못내 죄스러워, 지난 한 달간은 감히 어머니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죄스럽고, 죄스러워서.

    ‘메리엘을 데려가선 안 돼.’

    언젠가, 칼릭스 베네비토는 그녀를 죽일 것이다.

    그때가 언제쯤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지금, 메리엘을 데려가면 그 아이의 안위조차도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대공은 필립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뒤죽박죽 섞인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악마의 검고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내던져진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정신 차려, 아셀라.’

    그녀는 자꾸만 희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다른 모든 걸 버리는 한이 있어도 메리엘만은 지켜야 했다.

    ‘나를 포기해서라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아셀라가 덜덜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떼었을 때였다.

    “그, 그건 안 됩니다!”

    필립이 소리쳤다.

    메리엘을 데리고 있어야만 아셀라에게서 앞으로도 단물을 빼먹을 수 있었다.

    어쨌거나 대공비가 되었으니 여러모로 도움 될 일이 없잖아 있을 터였다. 메리엘이 그의 손아귀에 있는 이상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아셀라가 메리엘의 친언니이든, 얼마나 아끼든 간에, 메리엘의 법적 보호자는 필립이었고 양육권도 그에게 있었으므로.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메리엘이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통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군.”

    칼릭스의 얼굴에 지루함과 함께 짜증이 묻어났다. 그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난 네게 물은 적이 없어, 필립.”

    “뭐, 뭐, 지금 뭐라고…….”

    “짐승이 짖는 소리는 도통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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