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71)

‘호오…….’

그때, 저만치서 접시를 옮기던 하녀가 그의 눈에 띄었다.

‘못 보던 하녀인데…….’

안토니의 음흉한 시선이 하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속속들이 훑어내렸다.

도주하는 대공비 18화

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바삐 일하느라 열이 오른 뺨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숨이 차는 모양인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상체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안토니가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지저분한 욕망이 그의 머릿속에 차오르며 동시에 몸이 달아올랐다. 술기운 탓인지 더 몸이 후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일개 하녀 따위가 내 명령을 거부할 순 없지.’

그는 곧 후작이 될 귀족이었고, 눈앞의 여잔 기껏해야 평민 신분이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해고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끝이었다.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비열한 웃음이 비틀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차곡차곡 쌓인 접시를 힘겹게 들고 가던 하녀가 잠시 멈추어 섰다. 허리를 굽혀 접시를 내려놓고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앞치마로 두드렸다.

그 순간, 안토니가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누구……! 도, 도련님……!”

하녀, 세실이 눈을 홉떴다.

안토니의 얼굴과 그의 몸에서 나는 지독한 술 내음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녀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도움의 손길을 찾아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안토니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일하느라 힘들지?”

안토니가 빙글 웃으며 붙잡은 손목을 주물럭거렸다. 노골적인 희롱이었다. 밀려드는 수치심에 세실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종종, 귀족가에서 일하는 하녀들에게 이런 사건이 벌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개는 일자리를 잃을까 봐, 혹은 귀족인 주인의 분노를 살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했었다. 그게 제 일이 될 줄은 몰랐다.

“괘, 괜찮습니다.”

세실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애처로운 시선을 마주하자 안토니의 흥분이 더 치솟았다.

“내가 널 좀 편하게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 아니에요.”

“사양하지 말고.”

“말씀은 감사하지만 정말로 괜찮…… 악!”

손목을 비틀어 짜듯 가해진 강한 힘에 세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손목을 빼내려 했으나 안토니의 손아귀 힘이 세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안 괜찮아. 자, 잔말 말고 따라와. 금방 끝내줄 테니까.”

세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새파래진 얼굴로 몸부림쳤으나 안토니가 가볍게 제압했다.

“아, 안 돼요!”

“이게 감히!”

살끼리 부딪치는 큰 파열음과 함께 세실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눈앞이 번쩍할 정도의 강도였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게 부어올랐다.

“건방진 년이 좀 예쁘다 해줬더니 기어오르네? 어딜 주인의 몸에 손을 대? 죽고 싶어?”

세실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일어서. 지금부터라도 얌전히 굴면 조금 전의 일은 용서해 줄 테니까.”

안토니에게 꼼짝없이 붙들린 세실의 몸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일어서란 말 안 들려?”

절박한 상황. 그때, 세실의 귀에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급히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서 걸어오는 인영들이 눈에 띄었다.

“도, 도, 도와주세요!”

세실은 자신을 붙든 이가 누군지도 까맣게 잊고 소리쳤다. 그녀는 이제 이성을 찾기 힘들 만큼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여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뭐? 누가 여길…….”

술에 취해 사람이 오는 줄도 몰랐던 안토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그의 눈이 세실의 시선을 따라 걸어오는 이들을 향했다.

세실의 비명 섞인 외침에 일행 중 맨 앞에 서 있던 이가 잠시 멈칫하며 멈추어 섰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습이 드러난 순간.

세실의 입에선 절망 어린 신음성이 흘러나왔고, 안토니의 표정은 의기양양해졌다.

“뭐 해? 어서 달려가 도와달라 외치질 않고.”

안토니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들어 올리며 세실을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그녀가 벌벌 떨다가 붙들린 손목에 다른 쪽 손을 가져다 대며 싹싹 빌기 시작했다.

“도, 도련님…….”

“너같이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어찌 되는지 알아?”

“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세실이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격하게 내저었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이제 네가 뭘 해야 할지는 잘 알겠지?”

안토니의 눈동자가 더러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영광인 줄 알아. 주인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할 기회를 얻는 게 흔한 일인 줄 알아?”

안토니가 세실의 몸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뜯어보다 잡은 손목을 끌어당기자, 그녀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포자기한 세실의 얼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참으려고 해도 자꾸만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와, 다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주인의 심기를 이보다 어지럽혔다간 더 심한 꼴을 당하게 될지도 몰랐다.

안토니가 히죽 웃으며 그 꼴을 지켜보다가, 그들을 향해 걸어오던 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셀라, 여긴 무슨 일이냐?”

아셀라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그들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녀의 뒤에는 하녀들을 비롯해 저택의 사용인 몇몇이 줄줄이 따르고 있었다.

그동안 사용인들이 아셀라에게 해왔던 짓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안토니가 입가에 비웃음을 걸며 입을 열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

아셀라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얼굴로 안토니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안토니 옆의 세실에게로 옮겨갔다.

‘인사나 하고 지나가면 될 일이지 뭐 이리 미적대는 거야?’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안토니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이제 막 결혼식을 치른 신부가 손님들을 놔두고 뭘 하는 거냐?”

“옷을 갈아입고 온 거예요.”

그제야 아셀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안토니가 위아래로 빠르게 훑자, 과연 아까의 치렁치렁한 웨딩드레스 대신 간단한 외출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일이 끝났으면 가 봐. 쓸데없이 알짱대지 말고.”

그러나 아셀라는 한 곳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대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안토니가 붙잡은 세실의 손목이었다.

어찌나 꽉 쥐고 있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은 손이 핏기없이 하�R다.

얼른 아셀라를 보내버리고 저만의 유희를 즐기려 했던 안토니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어서 가라니까!”

그가 크게 소리치자 함께 있던 사용인들이 움찔 떨었다.

안토니의 성정은 저택 내 사용인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걸핏하면 하인들에게 손찌검해댔고, 하녀들을 희롱하거나 추파를 던지는 행위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필립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큼은 예의를 차리려고 하는 것과 달리, 안토니는 그마저도 귀찮아했다.

원체 안하무인인 데다가 막무가내식이니 여간해서는 그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 상황도 안토니가 그동안 저질러왔고, 앞으로도 저지를 수많은 사고 중의 하나였다.

안됐지만 저 하녀는 안토니에게 유린당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필립에게 무시무시한 협박을 받고 빈손으로 쫓겨날 것이다.

‘도와주세요.’

씩씩거리는 안토니의 뒤에서 세실이 간절한 얼굴로 작은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용인들은 그 애처로운 시선을 냉정하게 외면했다.

사정이 딱하나 어차피 남이다. 그들 역시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가라는 말 안 들려?”

안토니의 노기 어린 고성에 겉으로나마 태연한 사람은 아셀라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노려보며 분노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샤르투스의 후계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오라비, 안토니 샤르투스.

필립은 그를 두고 샤르투스의 먼 핏줄이라 했지만, 아셀라는 믿지 않았다.

‘저렇게 필립을 빼다 박았는데.’

필립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샤르투스는 방계의 사생아까지도 철저하게 관리했던 가문이다. 원체 후손이 귀한 탓이었다.

‘아셀라. 현재 샤르투스의 피를 이은 사람은 나와 너, 그리고 메리엘뿐이란다.’

마지막 방계의 핏줄이 거의 백여 년 전에 끊겼다. 아델이 살아 있을 적 직접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러니 안토니의 출생 배경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필립의 사생아이리라.

“당장 꺼져!”

“…….”

무엇이 그리도 화가 나는 걸까.

그는 샤르투스의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데.

죽을 때까지도 샤르투스의 이름으로, 죽고 나서도 샤르투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터인데.

“그 손 놓아주세요.”

“뭐?”

안토니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아셀라는 자신을 애원하듯 바라보는 세실에게서 시선을 떼며 확인시키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 손 놓아달라 말씀드렸어요.”

“네까짓 게 참견할 일이 아니야.”

“죄 없는 이를 괴롭히고 계시잖아요.”

아셀라가 차분한 낯으로 답했다.

그러자 안토니가 대번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쥐고 있던 하녀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놓았다.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세실이 공포에 질려 구석 벽으로 몸을 말았다.

안토니가 우습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이가 없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흉흉한 기색이 비쳤다. 안토니가 위협적으로 한 발짝을 내디디자 사용인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아셀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안토니에게서 훅 끼치는 불쾌한 알코올 향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그 태도에 안토니의 심사가 뒤틀렸다.

늘 혼자서만 고아한 척, 고고한 척, 품위 있는 척.

고귀하고 잘난 아셀라 샤르투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보잘것없음이 죄다 까발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수년간 학대하며 괴롭혔음에도 그녀를 온전히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무릎을 꿇릴 때조차 정작 그녀가 높은 곳에서 자신을 오만하게 굽어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안토니는 기분이 더러워졌다. 오물 천지인 진창을 구르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셀라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제 열등감만큼은 없애지 못했다.

“그동안 잠잠하더니 이게 또 분수를 모르는 짓을 하네?”

“…….”

“왜, 이제 네년이 대공비라도 된 것 같아?”

열이 뻗친 뇌에서 조금도 거르지 않은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욕설도 익숙했던 아셀라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저는 대공비가 맞아요.”

“뭐?”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추진하신 혼사로 인해서요.”

안토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감히 이게 어디서 대거리를 해?’

불쾌감이 강해지던 그때, 안토니의 눈에 주변의 사용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필립의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안토니가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걸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9화

“네가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안토니는 아직도 제 주제를 모르는 의붓동생에게 본인의 처지를 확실히 일러주기로 했다.

그녀가 가장 치욕스러워할 방법으로.

“너, 팔려간 거야.”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셀라의 귓가에 떨어졌다.

“대공비? 웃기시네.”

“…….”

“칼릭스 베네비토가 네게 눈길 한 번 줄 것 같아?”

아니. 아셀라는 그런 착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허황된 꿈에 젖어 헛된 기대를 품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한때 품었던 희망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였다.

간절히 바란다고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녀는 아직도 샤르투스였을 테니까.

“평생 뒷방에 처박혀 있다가 죽을 계집이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

“결혼했답시고 저가 잘났다 착각하며 나대는 꼴이라니.”

아셀라가 대답 없이 희미하게 웃었다.

‘사실이니까.’

모욕적인 말이었지만 이보다 더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

눈처럼 흰 얼굴 위로 체념 어린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그러나 아셀라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들어 올렸을 때, 그녀의 얼굴은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입술에 아교를 발라놓은 것처럼 침묵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제가 대공비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래서?”

당장에라도 아셀라가 사과하며 고개를 조아리리라 여겼던 안토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라버니께선 제게 무례를 저지르셨어요.”

“그게 뭐 어쨌다고.”

후계를 위한 도구로 팔려가는 주제에.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안토니의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뒤쪽의 사용인들에게서 쿡쿡거리는, 작지만 분명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뿐, 그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후작가의 천덕꾸러기로 멸시받던 아셀라였다.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동조하여 함께 즐기기도 했었고.

성년에 이른 아셀라가 과연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 점치는 건, 그들의 저급한 대화 주제 중 하나였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돈 많고 늙은 귀족의 재취 자리나 아닐까 했더니.’

그런데 상대는 무려 제국의 대공이었다.

황가의 피를 이은, 황위 계승권까지 가진 귀족 중의 귀족.

황가의 직계조차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칼릭스 베네비토는 원한다면 황위조차 쥘 수 있는 사내였다.

그런 대공이 직접 청혼서를 넣었고, 결혼식에서 다정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사용인들 모두 이성적으론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았으나, 저마다 내심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속내들이 있었다.

“이제 알아들었으면 꺼져.”

“…….”

“내 말 안 들려?”

“…….”

“신경 끄고 연회장으로 돌아가라고.”

모욕과 조롱에도 붙박인 것처럼 가만히 서 있던 아셀라가 마침내 발걸음을 뗐다. 뜻대로 되었다고 지레짐작한 안토니가 빙글 웃음 지었다.

‘어서 이 하녀를 데려가서…….’

추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가라앉았던 기분이 다시 흡족해졌다. 안토니가 땀에 젖은 셔츠 단추를 더 풀어 내리며 뒤를 돌았다.

“뭐 하는 짓이지?”

안토니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를 지나쳐 간 아셀라가 허리를 굽혀 하녀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이 결혼식에 불행한 이는 나 하나면 족하니.’

아셀라는 안토니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나동그라진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니?”

“세, 세실이에요…….”

“이 저택엔 언제 들어왔니?”

“하, 한 달 되었어요.”

아셀라의 손길에 주춤대며 일어난 세실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닦으렴.”

“아가씨…….”

세실이 황송한 듯 두 손으로 아셀라의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어서 가보렴. 할 일이 많겠구나.”

“하지만…….”

세실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들의 곁에서 안토니가 살기를 뿜어내고 있던 탓이었다.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의 뒤로 몸을 사리는 저택의 사용인들이 보였다.

“괜찮아.”

그러나 마음마저 다독이는 듯한 따뜻한 목소리가 이어지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세실이 부산히 접시를 챙겨 들고 돌아설 때였다.

“흐윽……!”

둔탁한 소음, 억눌린 비명.

아셀라의 몸이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아가씨!”

뒤를 돌아본 세실이 소스라치게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들고 있던 접시가 와장창 깨지며 복도에 커다란 소음을 만들었다.

잠시 후, 복도는 그야말로 작은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졌다.

“결혼식이라 봐주려고 했는데.”

바닥에 엎드리듯 쓰러진 아셀라에게로 안토니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셀라의 정신이 아연해졌다.

안토니의 말대로 오늘은 그녀의 결혼식이었다. 술에 취해 이성이 흐려진 데다 하려던 일을 방해받았으니 화가 나리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성질을 죽이고 자중하리라 여겼다.

필립조차 오늘은 조심스러운 언행을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안토니는 아셀라의 생각보다 훨씬 대책 없는 인간이었고, 그따위 이유로 제 성질을 죽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목줄 잡힌 개처럼 얌전히 굴던 아셀라가 감히 그의 일을 가로막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자존심을 굽히며 사정하는 것뿐이던 게.”

“…….”

“어디서 구원자 행세를 하고 있어?”

안토니가 아셀라의 멱살을 붙잡고 그대로 위로 끌어 올렸다.

아셀라가 목이 졸리는 듯한 압박감에 안토니의 주먹 쥔 손을 부여잡았다. 그러나 술에 취한 이의 거센 악력을 당해낼 순 없었다.

목줄에 당겨지는 개처럼 그녀의 몸이 강제로 일으켜졌다.

“아, 안 돼요! 제발 그만두세요, 도련님!”

“이건 또 뭐야!”

세실이 안토니의 바짓가랑이를 붙들며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되려 거친 발길질에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쓰러진 세실의 몸을 몇 차례나 더 발로 짓이긴 뒤에야 멈추었다.

“거기 너! 가서 신관을 불러와.”

“예? 아, 예예!”

안토니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던 하인이 뒤늦게 이해하고는 황급히 달려나갔다.

“건방지게.”

옆머리를 땋아 곱게 반 묶음 했던 머리채가 우악스럽게 붙잡혔다. 아셀라가 몸을 바둥거리며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했으나 의미 없는 반항이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빈방이 어디야.”

“저기 복도 끝을 돌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안토니가 제 손목을 한 바퀴 돌려 아셀라의 긴 머리를 휘어 감았다.

“가서 새 드레스와 채찍 챙겨와. 지나가는 사람 없는지 감시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것에게는 교육이 필요하니까.

“이, 이거 놓아…….”

아셀라에게서 신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얼마나 세게 부딪혔는지 몸의 통증이 상당했다. 안토니의 온몸에서 풍기는 독한 술 냄새 탓에,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현격한 힘의 차이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셀라의 몸이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발을 바닥에 붙이며 어떻게든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지금.”

섬뜩하리만치 낮은 목소리가 통로에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이들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안토니조차 입을 떡 벌리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셀라를 붙들고 있던 손은 이미 놓은 뒤였다.

사내의 구두 소리가 저벅저벅 통로를 울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남자의 거대한 그림자가 안토니의 머리 위로 내려앉던 그 순간.

“으헉!”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안토니의 몸이 그대로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단단한 돌벽에 부딪힌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안토니는 제 머리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칼릭스 베네비토. 하르메니아 제국의 대공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비전하, 괜찮으십니까.”

라이젠이 아셀라를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혼자…… 서 있을 수 있어요.”

라이젠의 도움을 사양한 아셀라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라이젠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안토니에게서 얻어맞은 뺨으로 향하는 게 느껴지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비참했다.

아무리 알려져 있다 하더라도 그걸 직접 보여준다는 건 또 다른 의미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아냈다. 이 모욕과 참담함조차 그녀가 오롯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아셀라가 몸이 통째로 짓눌리는 것 같은 오욕을 견디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상황에 처한 안토니는 충격으로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조차 못 했다.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대, 대공 전하께서 여, 여긴 어떻게…….”

대공의 핏빛 눈을 마주하자마자, 안토니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아까 그의 머릿속을 잠식했던 분노는 완전히 휘발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끔찍한 공포가 메웠다.

무어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안토니가 되는대로 말을 뱉어냈다.

“오, 오해십니다! 잠시 동생과 언쟁이 있었던 것뿐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다른 곳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려던…….”

“오해라고?”

대공의 얼굴에 서린 불쾌감을 보자마자, 안토니는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설마…….’

소름 끼치는 감각이 목덜미를 물어뜯듯 파고들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분명,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전하, 제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입 다물어.”

싸늘한 명령에 안토니의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뭔가 변명을 더 해보려 했으나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바들바들 몸을 떠는 안토니를 내버려 둔 채, 칼릭스가 고개를 돌려 아셀라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 치장했을 그녀의 몰골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새하얀 드레스는 구겨지고 더러워졌다. 허리까지 물결치듯 내려오던 부드러운 은빛 머리칼은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아셀라의 얼굴에 닿았다. 창백한 뺨 한쪽이 붉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누가 보아도 분명한 구타의 흔적이었다.

아셀라 샤르투스가 여기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꾹 깨문 여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순간, 피가 차갑게 식었다.

“감히.”

잠시 후, 안토니의 입에서 비명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20화

“으윽! 사, 살려…… 아악! 허억!”

대공의 발길질이 이어질 때마다 안토니의 몸이 공처럼 튀었다. 겉으로 보기엔 마구잡이로 차는 것 같아도 가장 고통스러울 부위만을 골라 정확히 가격한 탓이었다.

퍽, 퍽, 퍽. 둔탁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복도를 울렸다.

안토니가 몸을 옹송그리며 피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틈을 보아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시도도 해보았지만 그대로 옆의 기사들에게 잡혀 다시 대공 앞에 고깃덩이처럼 내던져졌다.

끔찍한 고통에 안토니의 입가에 거품이 일었다.

어떻게든 고통을 줄여보고자 몸을 허우적댔으나 그뿐이었다.

대공의 발길질이 멈춘 건, 필립이 그를 부르며 뛰어올 때였다.

“전하!”

곤죽이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아들을 본 필립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감히 대공에게 대거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칼릭스의 붉은 눈이 느릿하게 주변을 훑었다.

조금 전까지 사람을 피떡이 되도록 팬 사람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얼굴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무슨 일이죠?”

“분명 저쪽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복도 끝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음에 칼릭스의 눈이 빠르게 아셀라를 향했다.

무감하던 눈동자에 그녀의 희게 질린 얼굴이 비쳤다.

새파란 눈은 복도 끝을 응시한 채 잘게 흔들렸고, 치마를 붙든 손은 어찌나 꽉 쥐었는지 창백한 피부 위로 새파란 핏줄이 돋아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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