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1)

“그럼 문제 될 건 없겠어.”

칼릭스와 대신관의 대화를 들으며, 아셀라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눈을 감은 탓인지 나머지 감각이 더 예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의외였던 건, 그의 손이 생각보다 따뜻하다는 사실이었다.

아까 제 손을 감싸 쥐던 때도, 지금 뺨을 통해 전해지는 온도도.

칼릭스가 눈감은 여자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눈꺼풀 속에 감춰진 맑은 호수의 물빛 같은 눈동자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으면 말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후회하지 말고.”

또다시 작게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그의 손에 감싸인 말랑한 볼이 손바닥에 닿아 이지러졌다.

내켜 하지 않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또 기어이 아니라는 뜻을 전한다. 재차 물어도 눈을 감고 입은 꾹 다문 채 연신 고개만 도리질했다.

그녀는 그의 생각보다 고집스러운 면모가 있었다.

칼릭스는 차라리 빨리 끝내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가 상체를 숙이자, 아셀라에게 칼릭스의 짙은 체향이 훅 끼쳤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만큼 달큼한 향이었다.

이대로라면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아, 아셀라가 자꾸만 몽롱해지는 의식을 애써 붙잡았다.

잠시 후, 그녀의 이마에 뜨거운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6화

사람들의 의아해하는 반응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싶었으나 그것도 잠시, 곧 식장은 엄청난 박수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눈을 뜬 아셀라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하객 쪽으로 몸을 돌린 뒤였다.

그들에게 가면용 미소를 날리며,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부끄러워하는 신부를 위한 배려, 그 정도로 생각하겠지.”

“…….”

“기왕이면 이 연기에 동참해 줬으면 하는데. 본인 자신을 위해서라도.”

아셀라가 순간 멍해졌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말처럼, 이는 연기였다.

팔려갔되 팔려가지 않았으며, 애정 한 줌 없되 사랑이 넘치며, 절망했으되 희망이 가득한 것처럼.

어차피 사람들이 바라는 건 진실이 아니니까.

그들이 진정 보기를 원하는 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는 행복한 신부의 모습일 터.

비록 그것이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면 그녀가 해야 할 일도 정해져 있었다.

아셀라가 조심스레 칼릭스의 팔에 손을 올렸다. 의외의 행동에 그의 눈썹 한쪽이 슬쩍 치켜 뜨였다.

“기왕이면 이 연기에 동참해 주세요, 전하.”

“…….”

“저를 위해서요.”

아셀라가 하객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답했다. 그러자 칼릭스가 재미있다는 듯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그러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으며 등 뒤에서 감싸듯 단숨에 끌어안았다.

“……!”

엉겁결에 칼릭스의 품에 파묻힌 아셀라의 몸이 파드득거렸다. 등에 맞닿은 사내의 탄탄한 상반신이 한 겹의 얇은 드레스를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아찔한 감각에 아셀라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다리에 저절로 힘이 풀렸다.

“조심해야지.”

칼릭스가 단단한 팔로 아셀라의 몸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어깨에 턱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아셀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타인과 빈틈없이 몸이 맞붙는 감각은 그녀에게 너무도 생경한 것이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에 아셀라가 어찌할 바 모르고 쩔쩔매자, 칼릭스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제대로 각오한 듯하여 도와주려 했더니.”

칼릭스의 목소리에 짓궂음이 섞였다. 그러나 정신이 하나도 없던 아셀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모양이야.”

“아, 아니에요.”

아셀라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다잡고는 답했다.

“조금, 당황했을 뿐이에요.”

아셀라가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자 놀란 가슴이 조금씩 진정이 되었다. 칼릭스 역시 그녀의 변화를 알아채고는 슬그머니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준비됐나?”

“네.”

칼릭스가 아셀라의 허리를 감았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선 뒤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감싸듯 그러쥐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접촉이 다시 이어지자, 아셀라가 잠시 주춤거렸다. 커다란 손에서 전해지는 사내의 체온이 생각 외로 높았다.

“아셀라.”

칼릭스의 부름에 아셀라가 숨을 삼켰다.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셀라가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 올려 칼릭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다들 기다리잖나.”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의 하객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맑은 물결 위로 햇빛이 비치듯,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렇게 아셀라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의 얼굴로, 아름답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 * *

결혼식이 끝나고 성대한 파티가 이어졌다.

제국의 유력 가문들끼리의 결합인 만큼,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수도의 고위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황제의 축하 사절도 와 있었다.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음에도, 어떻게든 대공 부부에게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고자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만 마주하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대공 대신, 그들은 대부분 유한 인상의 자그마한 대공비에게 접근하기를 택했다.

베네비토 가문의 안주인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겸사겸사 그 덕분에 대공과 말 한마디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테고.

그들의 그런 판단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아셀라의 머리 위에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며 반짝이는 티아라가 지대한 작용을 했음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세상에, 저 반짝임 좀 보세요.”

“‘여신의 영광’을 결혼식장에서부터 보게 될 줄이야.”

“전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다니까요.”

“저게 약혼 선물이었다는 말, 들으셨어요?”

“아까요. 얼마나 놀랐던지.”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나 봐요.”

아셀라 샤르투스. 아니, 이젠 아셀라 베네비토가 된 새 대공비의 소문은 결혼 전부터 암암리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귀족이란 무릇 겉으로는 고결하고 깨끗한 척을 하지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십을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족속이었다.

많은 사교모임의 화젯거리는 누군가의 험담으로 시작해서 비난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하르메니아 제국 귀족 사회에서 가장 탐내는 사내, 칼릭스 베네비토의 옆자리를 차지하게 된 아셀라는 당연히 시시때때로 그네들의 도마 위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소문 중 대다수는 그다지 좋지 않은 내용이었다.

“지참금도 준비를 안 했다는 소문이 들려서 오해했었지 뭐예요.”

“하긴, 베네비토 가문에 지참금 같은 게 필요하겠어요?”

필립이 지참금 지급을 거부한 이야기는 저택 내 사용인의 입을 통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아셀라가 예상했듯, 그 사실은 소문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물론, 결혼식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를 정말로…….”

“아까 이마에 키스하시는 거 보셨죠?”

“그 뒤엔 또 어떻고요. 모두가 지켜보는데도 대놓고…… 그렇게 다정하신 모습은 처음 봤어요.”

그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한눈에 반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요.”

“저도 기사 난 걸 봤어요. 설마 했는데.”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따금 귀족 간에도 정략혼이 아닌 경우가 있기는 했다.

애정이라든가 호감 등을 기반으로 맺어진 관계.

물론 그런 경우는 두고두고 회자 될 정도로 무척이나 드문 케이스였다.

하지만 아셀라와 칼릭스의 키스 장면을 목도한 사람들은, 어쩌면 이 결합이 그런 종류의 결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 손속에도 자비가 없고, 잔인하며 냉혹하다 알려진 대공이었다.

‘그런 칼릭스 베네비토가 예외로 두는 존재.’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이 새 대공비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 * *

아셀라는 쏟아지는 축하 인사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상 그녀가 했던 일이라곤 주변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걸 듣다가 고개를 몇 번 끄덕여주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이를 몇 차례 반복하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을 불안 탓에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다. 이른 새벽부터는 결혼식을 위해 여러 사람의 손길에 이끌려 드레스를 입고 치장을 했다.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잠시의 쉴 틈도 없이 혹사당한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아셀라.”

그런 그녀를 구제한 건,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아셀라가 순간 멈칫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여전히 낯설었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고는 입술을 떼어 대답했다.

“네, 전하.”

칼릭스가 아셀라의 주변에 모여 있던 이들을 물리쳤다. 정확히는 그가 다가오자마자 지레 제 발 저린 귀족들이 냉큼 자리를 피한 것에 가까웠지만.

“드레스가 불편하진 않나?”

아셀라가 잠깐 대답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에프로듀가 제작한 그녀의 드레스는 가장 광택이 좋고 가벼운 원단으로 제작되었다.

부피나 길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무게감이 적었고 신축성이 있어 움직임도 수월한 편이었다. 노출이 적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가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상적인 옷처럼 편하지는 않았다.

칼릭스는 아까보다도 더 창백해진 것 같은 아셀라의 얼굴을 보며 제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잠시 쉬는 게 어때. 드레스도 갈아입고.”

“그래도 되나요?”

“대공비가 쉬겠다는데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는 여기에 없어.”

말을 마친 칼릭스가 라이젠에게 눈짓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녀 몇몇이 그들에게 와 고개를 숙였다.

“모셔라.”

아셀라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곳은 레베카의 방이었다. 그녀가 칼릭스와 함께 첫날밤을 보낼 공간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하루를 묵고 내일 아침 일찍 공국으로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일반적으로 귀족가의 결혼식 피로연이 며칠씩 이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짧은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아셀라는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대공비 전하, 드레스를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부르는 호칭이 바뀌자, 아셀라는 정말 자신이 결혼했음을 실감했다.

가문을 떠나고 누군가의 부인이 되었으며 성씨가 바뀌었다.

“잠시만 뒤를 돌아주시겠습니까?”

하녀들의 말투가 전보다 훨씬 공손해져 있었다. 손길 역시 조심스러웠다. 확연한 변화가 느껴질 만큼의 차이였다.

그들 역시 두 눈으로 결혼식을 똑똑히 보았고, 참석한 귀빈들이 주고받는 대화도 들었다.

덕분에 몸을 사리고 낮추는 것이 그들의 안위에 도움이 되리라는 신속하고도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었다.

아셀라는 그 모습에 조금, 비참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기에 무덤덤해지고 체념에도 익숙해졌지만, 아주 가끔은 그녀 마음속 어딘가가 아프게 쿡 찔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러했다.

대공이 보인 잠깐의 모습만으로도 사람들의 태도가 급변했다. 불과 결혼식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던 저택의 사용인들이 얼굴색을 완전히 바꾸며 몸을 사렸다.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연기하라던 그의 말은 옳았다.

그래서 아셀라는 비참했다.

그 이유가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어떤 드레스로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아셀라가 하녀들이 들고 선 피로연용 드레스들을 천천히 훑었다. 웨딩드레스와 마찬가지로 마담 에프로듀가 제작한 옷이었다. 모두 한결같이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것으로.”

“좋은 선택이십니다, 비전하.”

사실 아셀라는 어느 옷을 입든 상관없었다. 줄지어 있는 드레스는 죄다 백색이었고, 어차피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거기서 거기로 보일 테니까.

결혼식 날 두 주인공은 백색 옷을 입는다.

식을 치를 때도, 이후에 이어지는 피로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흰 종이 위에 어떤 것이든 그려나갈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의 미래를 그려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아셀라는 그 미래에 어떠한 일말의 기대도 품지 않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7화

5. 내 걸 건드리는 것들은

필립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각하, 축하드립니다!”

“베네비토 가문과 사돈을 맺으시다니요.”

“이제 승승장구하실 일만 남았군요!”

어느새 그의 주변에 몰려온 귀족들이 여기저기서 축하의 말을 건네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곧 영식이 후작으로 불릴 날도 머지않았군요.”

“아직 부족한 게 많은 녀석인지라, 고민이 큽니다.”

“겸손하기도 하셔라.”

필립이 예의상 속내를 감추며 답했지만, 화색이 만연한 얼굴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아주 성공적인 결혼식이었다.

‘그년이 시간을 끌 때 조금 애를 먹기는 했다만.’

아셀라가 혼인 서약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필립은 하마터면 달려가 머리채를 휘어잡고 대답하라고 소리를 지를뻔했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겉으로는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혹여나 결혼이 엎어질까 봐 불안함에 속마음이 들끓었었다.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한번 따끔하게 교육해야겠어.’

메리엘을 들먹이며 겁을 준 뒤, 적당히 구슬리면 될 일이었다. 그 유약한 계집은 제 동생이 걱정되어서라도 찍소리도 하지 못할 테니까.

‘대공비가 되었다고 건방 떨지 못하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놓아야겠지.’

혹여나 대공이 아셀라를 만족스러워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러나 다행히 반반한 얼굴이 제 몫을 한 모양이었다. 대공의 반응이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는 훨씬 좋았다.

‘그렇다고 그 계집에게 진짜로 마음이 간 건 아닐 테고.’

칼릭스 베네비토는 모든 걸 손에 쥔 남자였다. 원한다면 별처럼 많은 여자를 품에 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사내가 잠깐 본 아내에게 첫눈에 반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우스갯소리조차 되지 못했다.

‘적당히 쓸 만하다 여긴 거겠지.’

한 톨의 애정도 없으나 나름대로 이용 가치는 있는. 대공에게 아셀라는 딱 그 정도일 것이다.

필립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메리엘을 볼모로 앞으로도 아셀라를 아낌없이 써먹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대공에겐 입도 벙긋 못 할 테니.’

칼릭스 베네비토가 처음부터 원한 건 얌전한 인형이었다. 필립이 이 결혼을 추진한 당사자였기에 그 점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대공은 허울뿐인 대공비 따위를 조금이라도 신경 쓸 사내가 아니었다. 뭣 모르는 귀족들이야 결혼식 모습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필립에게는 이보다 더 상황이 완벽할 순 없었다.

“대공 전하께서 비전하를 꽤 아끼시는 듯하던데…….”

“약혼 예물로 ‘여신의 영광’을 주셨다면서요?”

“보석 광산과 금괴 이야기도 들리던데, 사실입니까?”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필립의 기분을 한껏 고양시켰다.

그렇게 여러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

“비전하께선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으러 가신 모양이군요.”

“대공 전하께서도 보이질 않으시네요.”

디테일이 복잡한 예복은 활동하기 불편했다. 보통은 이 시간 즈음해서 더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곤 하니 이상할 건 없었다.

필립은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원 한쪽에서 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레베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데 샤르투스 영식께서는 어딜 가신 건가요?”

“그러게요. 아까까지 저쪽에서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봤는데.”

안토니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지?’

그렇지 않아도 사고라도 칠까 봐 조마조마하던 참인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필립이 애써 불편한 감정을 내리누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쉬러 간 모양입니다. 그동안 동생의 결혼식을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거든요.”

“하기야 본인 일도 적지 않았을 텐데 여러모로 바빴겠군요. 피곤할 만도 하지요.”

필립이 매끄럽게 꾸며낸 설명에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저는 잠시 실례.”

그 틈을 타 필립이 재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곤 자리를 피했다.

서둘러 안토니를 찾아야 했다.

필립이 다급히 근처에 있던 집사를 불렀다. 그는 피로연 준비를 하던 와중, 주인의 부름에 허둥지둥 뛰어왔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안토니는 어디 있지?”

“예? 안토니 도련님께서 안 계십니까?”

피로연이 곧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었기에 사용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주방에서는 수십 가지의 요리를 쉴 새 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음식을 나르는 일도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테이블을 놓고 식기를 세팅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야말로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사용인들이 할 일을 시시각각 조절하고 배치하는 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안토니가 어디서 뭘 하는지 살필 여력 같은 건 없었다.

‘빌어먹을! 대체 어딜 간 거야?’

필립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얌전히 곁에 붙어 있으라고 그리 일러두었는데도 아까부터 안토니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탓이었다.

특히나 결혼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인부터 들이마시는 모습을 발견했을 땐, 뒤통수를 붙들어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둬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결혼식이 끝나면 간단한 술이나 음료가 배치되니, 해선 안 될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까진 술이 담긴 잔을 장식으로나 들고 다녔다. 마신다고 해봐야 대화를 하다가 갈증이 나면 간간이 목이나 축이는 정도였다.

그 전에 각자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에게 누군가의 결혼식은 중요한 사교 모임 자리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고 대화를 나누며 인맥을 만들어가는 자리.

이런 중요한 기회를 술이나 퍼마시며 축내고자 하는 이는 없었다.

필립은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토니! 아직 한낮인데 벌써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하느냐!’

‘겨우 몇 잔 마신 걸 가지고 아버지는 뭘 그리 나무라십니까?’

안토니는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사실 좋아한다는 말은 굉장히 순화된 표현이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무엇보다도 안토니에게는 주사가 있었다.

그나마 중요한 연회 자리엔 필립이 함께 다니며 단속을 했기에 귀족들은 잘 알지 못했지만, 술에 취하고 나면 망나니가 따로 없었다.

사고를 쳐서 필립이 수습하고 덮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 머저리 같은 녀석이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그런데 이 중요한 날, 귀한 손님들을 다 모신 자리에서 안토니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안토니는 일단 한 번 술이 들어갔다 하면 주체를 못 했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경우가 많았고, 그 이후에는 별의별 개짓거리를 다 해댔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않는 필립이 초조함을 느끼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든 옆에 붙들고 있어야 했는데.’

말을 걸어오는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안토니가 슬쩍 사라졌다. 차라리 어디서 술에 절어 잠이라도 자고 있다면 다행이었다.

‘안토니를 찾으러 갔으니 곧 소식이 도착하겠지.’

필립이 치미는 불안을 내리누르며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을 때였다.

“가, 각하!”

그의 보좌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필립에게 급히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 * *

안토니는 오늘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셀라, 그 눈엣가시 같던 계집이 마침내 결혼했고, 이제 샤르투스 가문과 후작위가 그의 것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셀라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그를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귀족들의 태도가 달라진 건 체감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통씩 그의 앞으로 초대장이 날아들었고,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콧대 높은 귀족 가에서도 연락이 왔다.

더군다나 오늘 결혼식에서 대공이 보여준 모습은 안토니의 앞날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말을 걸어오던 귀족들의 얼굴엔 비굴함마저 서려 있었다.

‘이제 감히 아무도 날 무시하지 못하겠지!’

가만히 있어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후작이 된다면 저를 볼 때마다 얼굴을 구기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술맛 떨어지게…….’

칼릭스 베네비토가 든든히 뒤를 받쳐주는 이상, 더는 그의 앞길을 막을 자가 없었다.

그런데도 필립은 뭐가 그리 무서운지 몸을 사리곤 그에게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며 싫은 소리를 해댔다.

곳곳에 즐비한 와인 잔과 샴페인 잔 몇 개를 비운 걸 가지고도 그의 귓가를 잡아당기며 윽박질렀다.

그 상황을 떠올리자 안토니의 기분이 저조해졌다.

‘후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난데!’

안토니는 사사건건 간섭하는 필립의 태도가 짜증스러웠다.

언제까지 자신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휘두를 생각인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귀족들에게는 세상 좋은 아버지인 양 웃어가며 대꾸하는 모습이 꼴같잖았다.

그 탓에 안토니는 필립 곁에서 내내 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러다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왔다.

‘어디 아버지 안 보이는 데서 술이나 좀 하면 좋겠는데.’

그놈의 사업을 벌인다고 필립의 손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술을 입에 한 모금도 대지 못한 지가 어언 한 달이었다.

‘끔찍했지.’

안토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오늘이야말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생각이었다.

안토니는 아는 척 해오는 귀족들에게 기분 좋은 인사 한마디씩을 날려주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줄지어 늘어선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술이 먹음직스럽게 찰랑거렸다.

망설임 없이 잔을 집어 든 안토니가 연거푸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샴페인과 와인이 담겼던 잔이 하나둘 비워져 갈수록, 그의 정신이 점점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몽롱해졌다.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동시에 이성도 희미해졌다.

‘잠깐만 나갔다 오는 것 정도야 뭐.’

온갖 즐거운 환상이 이리저리 머릿속을 떠돌았다. 기분이 좋아진 안토니의 표정이 느른해졌다.

몸가짐은 흐트러진 지 오래였다.

단정히 매어져 있던 크라바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셔츠도 풀어헤치고 커프스단추를 풀어 소매마저 걷어 올렸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들이켠 술 탓에 열기가 올라와 답답해졌다.

어딘가 시원한 장소가 필요했다.

안토니는 다들 자신들의 일로 정신없는 틈을 타, 커다란 샴페인 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조용한 장소에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이들이 간간이 보이긴 했으나, 그를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토니가 들뜬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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