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71)
  • “날 똑바로 봐.”

    “…….”

    “눈 뜨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어, 아셀라가 두려움으로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

    베네비토 가문의 상징인 흑발은 흡사 어둠을 베어내어 실로 짜낸 듯했다. 붉은 눈은 마치 핏물이 고인 것처럼 선명한 색채였다. 번뜩이는 눈동자엔 광기가 숨어 있는 듯하여 아셀라의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잘 어울리는군.”

    잠시 멈칫했던 아셀라는, 곧 칼릭스가 티아라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수차례의 연습으로 학습된 말을 입에 담았다.

    “보내주신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순간, 칼릭스는 여자의 목소리가 꽤 청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단단히 붙잡은 아셀라의 턱을 엄지로 느릿느릿하게 쓸었다. 이유 모를 접촉에 완전히 얼어붙은 아셀라는 가만히 서서 그 손길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네, 전하.”

    고분고분한 대답이 작은 입술 새로 흘러나오자, 칼릭스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얼마나 알고 있지?”

    “위대한 제국, 하르메니아의 하나뿐인 대공이십니다.”

    “그리고?”

    “대 베네비토 가문의 수장이시고…….”

    “계속해.”

    아셀라의 말끝이 흐려졌으나, 칼릭스는 집요하리만치 답을 요구했다.

    “…….”

    제국의 유일무이한 대공. 베네비토 가문의 젊고 부유한 가주. 거기에 더해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명실상부 제국 최고의 신랑감.

    칼릭스 베네비토를 수식하는 언어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별칭은 따로 있었다.

    하르메니아의 전쟁 영웅, 피의 대공, 전장의 학살자.

    사 년 전, 패색이 짙었던 전쟁에 어느 날 그가 등장했다.

    사내는 대공위를 이은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열여덟의 젊은 남자였다.

    수차례의 패배로 제국 남서부의 땅을 꼼짝없이 내줄 상황이었던 전쟁은, 칼릭스 베네비토의 등장으로 급반전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살아 있던 것은 모조리 죽어 나갔다. 날카로운 예기를 두른 칼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병사 수십의 몸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적군의 피로 흠뻑 젖어 전장을 휩쓰는 모습에 아군조차 두려움을 느꼈을 정도였다.

    병사들을 더 공포에 떨게 했던 건, 가차 없이 사람을 베어내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무감한 얼굴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4화

    당시 귀족들 사이엔, 베네비토 대공가에 대한 은밀한 화제가 있었다.

    건강하던 선대 베네비토 대공이 아들이 성년이 되자마자 대공위를 물려준 것, 그리고 갑자기 돌연사한 사건은 특히 그러했다.

    대부분은 가십거리 수준의 추측성 대화였지만, 개중엔 사건의 핵심에 다가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승전보와 함께 소문들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승자를 위한 찬미의 노래와 성대한 축하의 향연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하지?”

    아셀라가 더는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칼릭스가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널 선택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럴 리가.”

    칼릭스가 붉은 입술을 휘었다. 끌어 올려진 입술과는 달리 전혀 웃지 않는 눈은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아셀라가 마른침을 삼켰다.

    “넌 나를 알아. 아주 잘 알고 있지.”

    “놔…… 주세요…….”

    “그렇지 않나?”

    아셀라는 온몸을 엄습하는 두려움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가 언젠가는 자신을 죽일 거란 선득한 사실이 머리를 짓눌렀다.

    칼릭스의 말대로, 그녀는 그를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야말로 완벽한 귀족이었다. 그가 가진 부와 명예, 우월한 혈통적 배경, 홀리지 않을 수 없을 아름다운 외모와 탁월한 능력에 사람들은 쉽게 눈이 멀었다.

    그가 남긴 전쟁의 업적에 열광하면서도, 그 속에 감춰진 잔혹함은 잊는 모순.

    기실 칼릭스 베네비토는 자신의 본모습을 감출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란 꽤 할 만해.”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셀라가 힘겹게 손길을 뿌리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되려 그녀의 얼굴을 더 강하게 붙들었다.

    “특히 전리품이 가치 있다면 더욱.”

    칼릭스가 허리를 숙여 아셀라의 귓가에 바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쉬는 숨이 예민한 부분에 닿자, 그녀의 목덜미에 소름이 오도도 돋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딛고 있던 땅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의 처지를 똑똑히 상기시켜 준 것이다.

    자신은 칼릭스 베네비토에게서 끝내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의 가문에서 평생을 지금처럼 살다, 대공비로 죽게 되겠지. 무덤의 비석에조차도 베네비토의 이름이 남게 되리라.

    샤르투스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앞으로 평생 가질 네 이름이다.”

    그가 선언했다.

    * * *

    “아가씨, 이제 나갈 시간이에요.”

    아셀라가 하녀의 말을 뒤로 넘기며 말없이 몸을 일으켰다.

    마담 에프로듀가 공들여 제작한 드레스가 물결치듯 흘러내렸다. 은사와 레이스가 아낌없이 쓰인 순백의 드레스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도 아름다운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투명한 보석들이 줄줄이 달린 상반신에서는 눈이 부실 듯한 반짝임이 이어졌다.

    뒤쪽으로 길게 끌리는 드레스 자락 끝을 하녀 둘이 고쳐 잡자, 아셀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 흐르듯 매끄러운 움직임이었다.

    참담할 정도로 날씨가 화창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고운 잔디가 깔린 후작가의 저택 앞 넓은 정원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마어마한 인파를 마주하자,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셀라가 자꾸만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안내를 따라 떠밀리듯 선 곳은 흰 천이 길게 깔린 잔디밭의 한가운데였다.

    그곳에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가 있었다.

    그 역시 온통 흰색인 예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부터 종아리 부근까지 내려오는 긴 망토를 고정한 브로치만이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아셀라는 부케를 한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곤 두 다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다행히 어긋남 없는 각도였다.

    “왔군.”

    칼릭스가 고개를 까닥이며 짧게 답하고는 아셀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호수 같은 파란 눈이 끔벅거리자, 칼릭스가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잡아야지.”

    “아…….”

    아셀라가 천천히 제 손을 들어 올렸다.

    칼릭스는 긴장으로 떨리는 가냘픈 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제 손바닥에 여자의 손가락 끝이 막 닿으려던 찰나.

    희고 섬약한 손을 낚아채듯 쥐었다.

    “……!”

    소스라치게 놀란 아셀라는 하마터면 그의 손을 쳐낼 뻔했다.

    계속된 학대와 폭력의 트라우마로, 그녀는 누군가의 손이 몸에 닿는 것에 익숙지 않았다. 끔찍했던 고통의 순간이 떠오르면서 온몸에 식은땀이 나곤 했다.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내리누르며 아셀라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처 진정하기도 전에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악단이 연주하는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졌다.

    아셀라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백색 실크가 깔린 길을 따라 걸었다.

    발이 꼬이면서 휘청거릴 때마다 칼릭스가 맞잡은 손에 힘을 가하며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중간에 한번은 기어코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으나, 그가 곧바로 그녀의 허리를 붙든 덕분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아셀라가 더듬거리며 황급히 사죄의 말을 입에 담았다.

    “죄, 죄송…….”

    “긴장 풀어. 누가 잡아먹기라도 하나?”

    아셀라에게는 너무도 길었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두 사람이 신관 앞에 자리했다.

    그들의 결혼을 축복하러 온 이는 제국에 셋뿐인 대신관 중 하나였다. 신관의 옷자락에 수 놓인 신전을 상징하는 문양이 선명하리만치 잘 보였다.

    “오늘 이 자리에 헤르니야 신의 은총과 축복이…….”

    대신관의 말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질질 끌었다간 목이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칼릭스의 협박이 있었던 탓이었다.

    짧은 축복의 말 뒤에 서약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맹세한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아셀라에게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제때 답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셀라 샤르투스 영애?”

    아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대신관의 표정에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대신관이 자신을 불렀던 호칭을 되새김질했다.

    아셀라 샤르투스.

    그녀는 샤르투스였다. 아직까지는.

    그러나 이 서약의 자리에서 입을 열어 맹세의 말을 입에 담음과 동시에, 그녀에게서 영광스러운 가문의 이름은 사라질 터.

    그리고 영영 되돌릴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아셀라 베네비토.’

    ‘앞으로 평생 가질 네 이름이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선고했던 것처럼.

    아셀라의 침묵이 길어졌다.

    처음에 귀빈들은 새 신부가 떨린 나머지 제대로 답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중에는 자신들의 결혼식 추억을 떠올리며 작은 속삭임을 주고받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셀라에게서 계속 답이 없자, 나중에는 귀빈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그들은 저마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자 목을 빼기도 했고, 체면 불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다 일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사위가 적막해졌다.

    귀족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며 주변 사람들과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셀라 샤르투스 영애, 신성한 결혼의 서약을.”

    아셀라가 관절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남편이 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핏빛 눈은 그녀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고 그린 듯한 미소로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 터인데도.

    어떤 상황이든 개의치 않는 듯한 극히 무심한 저 태도는,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어서.

    아셀라가 지그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을 선택의 말을 내뱉었다.

    “……맹세합니다.”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어지고, 여기저기서 안도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건 두 사람 앞에 서 있던 대신관도 마찬가지였다.

    가문에서 추진한 정략혼의 경우, 드물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며 서약을 거부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던 차였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는 문제없이 식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전하, 결혼반지를.”

    대신관이 두 손으로 반지를 포개듯 감싸 축복을 마치고는, 다시 칼릭스에게 반지를 건넸다.

    칼릭스가 사뭇 부드럽게 아셀라의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그녀의 가느다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졌다.

    맞춘 것처럼 손가락에 딱 들어맞는 반지에 아셀라는 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손가락 둘레까지 알았을까.

    아셀라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남자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숨기고 싶어 하는 치부조차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머릿속이 아연해졌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목을 조이는 족쇄처럼 느껴졌다.

    “이로써 신의 축복 아래 두 사람의 성혼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의 끝맺는 말과 함께 아셀라와 칼릭스의 머리 위로 색색의 장미 꽃잎이 흩날렸다.

    하객들은 모두 기립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로 새로운 부부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곳저곳에서 환호와 탄성, 휘파람 소리가 터졌다.

    예법을 따지자면 조금 어긋난 행동이었으나, 결혼식 같은 즐거운 행사에서는 너그러이 용인되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었다.

    그들은 곧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한편, 결혼 서약을 마친 아셀라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래로 그녀의 정신을 끌어내렸다. 이제는 다 끝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귓가에 흘러들어 오는 함성을 들으며, 흰 드레스에 닿았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장미 꽃잎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싱싱한 꽃잎이 마치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셀라 베네비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셀라가 흠칫 몸을 떨었다.

    지독하리만치 낮은 음성.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드레스 자락에 고정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

    칼릭스는 짧게 몸을 떠는 것 외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여자를 잠시 지켜보았다.

    그녀는 티가 날 정도로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순간, 왠지 모를 짜증이 치밀었다.

    턱을 받치듯 붙잡고 힘을 주었다. 그제야 들어 올려진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향했다. 말간 물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칼릭스의 적안이 얼마간 아셀라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어떻게 할까.”

    “…….”

    “다들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무엇을?

    그제야 아셀라의 눈이 주변을 휘돌았다.

    빠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는 하객들,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장미 꽃잎, 귀가 멎을 듯한 함성, 그리고 흐뭇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대신관의 얼굴까지.

    “두 분께서는 맹세의 입맞춤을 나누십시오.”

    대신관의 말과 함께 아셀라의 몸이 굳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5화

    칼릭스는 그녀를 관찰했다.

    새하얀 드레스를 으스러지도록 꽉 쥐고 있는 두 손에 핏줄이 파르라니 돋아 있었다.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도 보였다.

    아셀라 샤르투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가 그에게 보이는 감정은 명확했다.

    두려움, 공포.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겁을 집어먹은 꼴이라니.

    물론 그 점 때문에 여러모로 편리한 구석도 많을 터. 나쁠 것은 없었다.

    칼릭스가 가면 같은 미소 뒤에 비소를 감추며 입을 열었다.

    “짧게 끝내도록 하지.”

    그가 그녀의 턱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몸을 기울였다. 그런데 상상도 못 한 말이 귀에 꽂혀 들어왔다.

    “……싫어요.”

    “뭐?”

    들려온 말을 믿을 수 없어 칼릭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떨고 있는 가냘픈 몸이 그의 붉은 눈에 비쳤다. 자그마한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하기 싫어요.”

    “……하!”

    마치 그가 자신을 희롱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기가 차는 와중에도 여자의 확인 사살이 이어졌다.

    “전하께서도…… 싫으시잖아요.”

    언제부터 저를 알았다고 넘겨짚기까지 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 칼릭스가 기울였던 몸을 뒤로 물렸다. 극도로 불쾌해졌다.

    제 앞에 선 여자가 자신의 주제를 자각이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그가 수집한 정보를 종합하여 고려했을 때, 그녀의 반응은 그만큼이나 예상 밖이었다.

    심사가 뒤틀렸다.

    “이렇게나 마음이 잘 맞을 줄은 몰랐는데.”

    싸늘한 말이 떨어지자 그들 주변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내의 흉흉한 기세에 아셀라가 화살 맞은 새처럼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아까부터 불안하다 싶더니 기어코 사달이 나고야 만 것이다. 완전히 굳어버린 칼릭스 베네비토의 얼굴에 오금이 달달 저릴 지경이었다.

    대신관이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지 눈알을 굴리며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아셀라의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자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해요.”

    칼릭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앞뒤 안 가리고 말할 땐 언제고.

    그를 적대시하는 자들은 모래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을 테지만, 감히 그의 면전에 대고 싫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 황제도 그러지는 못할 터.

    “제가 실언을 했어요.”

    아셀라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순종적인 모습에, 칼릭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대체 무슨 심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칼릭스가 그녀 말의 진의를 가늠하는 동안, 아셀라는 자신의 말실수를 후회했다.

    ‘……실수했어.’

    칼릭스 베네비토는 제 목숨줄을 쥔 사내였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아남으려면 그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거였다.

    ‘가만히 있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키스라니.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 그래서 자신을 사들인 남자와의 입맞춤.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어 충분히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말았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편, 칼릭스는 조금 전 들은 말을 곱씹었다.

    일반적인 귀족가의 미혼 젊은이들에 비하면 아셀라 샤르투스는 사교계 활동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지금껏 그 흔한 연애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귀족가의 영식과 만남을 갖기는커녕 교류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간 보고받은 자료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했다.

    ‘처음이라서인가.’

    칼릭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아셀라를 훑었다.

    들어 올려진 고개를 돌리질 못하니 시선을 옆으로 피하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창백하리만치 흰 얼굴엔 조금 전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사실, 아셀라 샤르투스의 보고 문건은 다른 인사들의 자료에 비하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분량이 적었다.

    하다못해 능력을 각성했다면 뭐라도 있었겠지만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교류하는 이가 있다면 거기서도 뭔가가 나올 텐데, 그녀에겐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대부분을 후작저에서 보내는 게 일상인 데다 그마저도 방에만 머무르니 주시할 만한 사건이나 정보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샤르투스에 심어놓은 정보원에게서 보고되는 내용이라고는 양아버지인 필립에게서 학대를 받는다는 것, 그녀에게 주기적인 폭언과 폭력이 가해진다는 것 정도였다.

    그 외엔 특별할 게 전혀 없었다.

    정통 후계자이면서도 샤르투스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인에게 가문을 통째로 빼앗긴 여자였다. 그저 심약하고 소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대체…….’

    마음대로 휘두르고 요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가 짐작했던 것처럼 그다지 멍청해 보이지도, 생각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일견 유약해 보이나 의외의 강단도 있었다.

    ‘라이젠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겠군.’

    칼릭스의 입매가 팽팽해졌다.

    인형처럼 가져다 놓으려 했던 여자가 저는 인형이 아니다, 발버둥 치는 꼴이 재미있지 않을 리가.

    지루하기 짝이 없던 연극 무대가 순식간에 흥미로워지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직접 기획하고 연출했으며 무대 위의 배우로까지 선 지금, 칼릭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꽤 기대되었다.

    “아셀라 베네비토.”

    부름에 실린 위압감에, 아셀라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파란색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눈동자 안에 자신의 얼굴이 가득 비치는 걸 보자, 칼릭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그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굽혔다. 아까와는 달리 잠자코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여유로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래서야…….”

    칼릭스가 아셀라의 귓가에 입을 바짝 붙였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속삭이듯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말이었다.

    “초야는 어떻게 치를 생각이지?”

    턱을 부여잡은 손끝으로 여자의 가냘픈 몸이 굳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윽고 진동이 일듯 미세하게 바르르 떨리는 것도.

    깨끗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칼릭스가 해사한 얼굴로 양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웃음에 더 당황하는 게 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결혼을 애들 소꿉장난 정도로나 생각했나?”

    “아니에요. 저는…….”

    여자의 입술이 달싹이며 흘러나오는 음성이 퍽 고왔다. 주변 공기를 고요하게 울리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식전에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이런 목소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부정하는 말 한마디를 내뱉은 그녀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는 그게 아주 조금, 아쉬웠다.

    “아직도 싫다고 거부할 셈인가?”

    칼릭스는 그녀의 맑은 눈이 느리게 몇 번 깜박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파란 눈이 은빛 속눈썹 아래로 감춰졌다 다시 드러나기를 수차례, 아셀라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니요.”

    순순히 답하는 붉은 입술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칼릭스가 아셀라의 턱을 받치고 있던 손가락을 떼고는, 다시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뺨을 감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은 물론이고 귓가까지 뒤덮었다.

    의외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아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라던 냉정하고 잔혹한 사내. 아마 그의 몸속엔 차디찬 피가 흐를 거라 무심코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관객이 많으니 별수 있나.”

    “…….”

    “자신 없으면 눈을 감아도 좋아.”

    아셀라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시각이 차단되고 시야가 어둠 속에 잠기자, 차라리 마음은 편해졌다. 그를 바라보며 입맞춤을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웠다.

    칼릭스가 잠시 아셀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 가슴팍 정도밖에 오지 않는 자그마한 여자였다. 그녀의 어머니였던 아델 선대 후작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가냘픈 체구는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해 보일 지경이었다.

    칼릭스는 웨딩 로드를 함께 걸어올 때 맞잡았던 손의 촉감을 떠올렸다.

    뼈마디가 느껴지는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휘청이며 쓰러지려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았을 땐, 혹시 필립이 그녀를 굶긴 건 아니었는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거의 밖을 나가지 않아서인지 피부가 유난히 희고 투명했다. 티 한 점 없는 하얗고 갸름한 얼굴은 이제 막 성년이 된 그녀의 실제 나이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길고 촘촘하게 박힌 은빛 속눈썹은 풍성했다. 동그란 이마와 섬세한 눈썹, 곧고 오뚝한 코, 발그레한 뺨, 자연스러운 선홍빛을 띠는 작은 입술까지.

    전체적으로 단아한 인상을 주는 여자였다.

    “전하.”

    칼릭스가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는데 대신관이 그를 불렀다.

    어째서인지 방해받은 기분에 이유 모를 불쾌함이 일었다.

    “신성한 결혼식의 증인들이 두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성한 결혼은 무슨.

    칼릭스가 그녀에게서 잘 떨어지지 않는 눈을 기어이 떼어내곤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얼음장 같은 얼굴로 돌아온 그가, 대신관을 보며 물었다.

    “반드시 입맞춤일 필욘 없겠지. 그렇지 않나?”

    “아뇨, 결혼 서약이 끝나면 부부는 반드시…… 아, 아닙니다!”

    물음에 부정하던 대신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살기 어린 눈빛에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제 앞의 대공에게 아니라고 입이라도 벙긋했다간, 내일 자신의 몸이 오체분시되어 켈튼 산 이곳저곳에 널려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인 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