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1)
  • ‘결혼은 무슨.’

    레베카는 돈줄일 뿐이었다.

    그의 야망에 날개를 달기 위해, 안토니를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이용한 여자.

    로렌스 가문은 돈은 물론이고 인맥을 만들기에도 꽤 유용했다. 필립은 레베카를 이용해 자신과 안토니의 입지를 다지고 귀족 사교계에 제 편을 만들어갔다.

    더불어 고급스러운 취미를 즐기기 위한 각종 부대비용, 하다못해 사치품을 구입하는 돈까지 전부 레베카에게서 뜯어냈다. 필요하다고 살짝 흘리기만 해도 척척 구해와 바치니 그야말로 화수분이 따로 없었다.

    눈치 없고 제멋대로지만 적당히 비위만 맞춰주면 그만이니 이보다 편한 여자가 또 있을까.

    ‘하지만 이젠 더는 그럴 필요가 없지.’

    안토니가 샤르투스 후작이 되는 순간, 이 기나긴 연극도 마무리될 것이다.

    레베카는 이제 필립의 품에 얼굴을 묻고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반면 필립의 표정은 소름 끼칠 정도로 냉랭했다. 그러나 그는 레베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연인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레베카.”

    레베카 로렌스의 이용 가치는 곧 끝난다. 단물 빠진 껌을 씹어봐야 턱만 아플 뿐.

    그때가 되면, 레베카 로렌스는 가장 비참하게 버려질 것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럴 수 있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필립이 입술을 비틀며 차게 웃었다.

    * * *

    청혼서가 도착한 날로부터 결혼식까지는 고작 한 달.

    귀족가의 혼사가 약혼 기간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이렇게 단기간에 진행되는 법은 없었다. 파격적이다 못해 상대방의 입장에선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기간이었다.

    약혼 기간이 짧으면 그만큼 결혼식 준비가 미흡해질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그러나 필립과 안토니는 이 결혼식에 사활을 걸었고, 베네비토 가문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아셀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결혼 준비는 착착 진행되어갔다.

    정갈하게 완성된 청첩장이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빈들에게 빠짐없이 당도했고, 마담 에프로듀의 아름다운 드레스가 완성되었으며, 샤르투스 저택에는 식에 사용될 비품이며 물건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앞으로 일주일.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아셀라는 불안해졌다.

    심장이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가, 쿵 하고 가라앉았다가, 멍하니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방 안을 몇 번이고 맴돌며 배회하다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앉아 있다가.

    그러다 늦은 밤이 되면 쓰러지듯 잠들곤 했다.

    아셀라는 지난 밤도 내내 뒤척이다 밤이 깊어지고 나서야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나 채 몇 시간도 자지 못하고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창문을 타고 비쳐들고 있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방 안이 희뿌옇게 보였다.

    어차피 침대에 있어도 더는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아셀라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창가로 걸어갔다.

    차츰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 하늘과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감도는 고요한 저택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곧 죽게 되겠지…….’

    남편이 될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 그가 그녀를 직접 선택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12화

    아셀라는 과연 자신이 얼마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어쩌면 곧바로 죽이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길면 일이 년, 짧으면 몇 달 정도는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 죽게 될까.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게 죽이려면 독을 이용할 가능성이 컸다.

    적어도 너무 고통스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죽고 나면 메리엘은…….’

    그 어린아이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자신의 이용 가치가 사라지고 나면, 필립과 안토니의 다음 타겟은 메리엘이 될 게 분명했다.

    자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동생마저 같은 길을 걷게 할 수는 없었다.

    ‘가서 전하의 비위를 잘 맞춰. 지금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아셀라는 필립의 말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비굴을 종용하는 잔인한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아셀라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더 버텨야만 해.’

    살아남는 기간만큼, 버티는 시간만큼, 메리엘을 지켜줄 수 있었다. 아셀라는 어떻게 해야 자신이 대공에게서 오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온 말발굽 소리에 이어지던 생각이 멈추었다.

    마차 하나가 저택의 대문을 지나 정원을 가로지르는 넓은 중앙길을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이 이른 시간에 누굴까.

    아셀라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외출했던 필립과 안토니가 돌아오는가 했으나, 표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가문의 마차는 아니었다.

    평소답지 않게 호기심이 일어, 아셀라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누군가가 내리자마자, 그녀가 그대로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 * *

    아직 이른 아침, 사용인들이 이제 막 깨어나 일을 시작하는 시각.

    그들은 준비하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셀라가 복도를 가로질러 달음박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웬일이지?’

    아셀라는 하루 대부분을 방 안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저택 안을 돌아다닐 때도 거의 발걸음 소리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줄도 모르다가, 문득 발견하곤 깜짝 놀란 경험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양손으로 치맛자락까지 붙들어 잡고는 뛰어나가는 모습을 본 것이다. 놀라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한편, 아셀라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덕분에 숨이 차서 헐떡이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때쯤엔 저택의 현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이가 거기에 서 있었다.

    “메리엘!”

    “언니!”

    은색 솜사탕 같은 머릿결을 나부끼며 메리엘이 아셀라의 품에 안겼다.

    아셀라가 못 본 새 훌쩍 커버린 동생을 꼭 끌어안았다. 자신과 똑 닮은 은빛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딱 삼 년 만이었다.

    “……잘 지냈어?”

    애써 울음기를 감춘 목소리가 어렵게 흘러나왔다.

    “응, 언니는?”

    “언니도.”

    아셀라가 동생의 손을 깍지껴 잡았다. 어서 방에 가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메리엘이 잡힌 손을 살짝 끌어당기며 근심스레 물었다.

    “언니, 아버지는?”

    “괜찮아. 지금은 안 계셔.”

    아셀라가 걱정하는 메리엘을 안심시키고는 함께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운이 좋았다.

    만일 필립과 안토니가 저택에 있었다면, 메리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힘들었을 테니까.

    사업차 문제로 이틀 전부터 저택을 비웠던 두 사람은 꽤 문제가 중대했던 모양인지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내일 오전쯤 도착할 예정이었던 메리엘은 더 일찍 도착했다.

    시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많이 컸구나, 메리엘.”

    메리엘이 수도의 후작저를 떠난 지 삼 년.

    그동안 단 한 번도 만나질 못했다. 필립이 메리엘의 요양을 핑계로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일곱 살이던 메리엘은 이제 곧 열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아셀라가 동생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뺨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매만지듯 조심스레 쓸었다. 그러자 메리엘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무구한 푸른색 눈동자가 귀엽게 휘는 모습에 아셀라의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데도 늘 함께였던 것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동생의 마지막 편지를 떠올린 아셀라가 메리엘에게 말을 건넸다.

    “메리엘, 공부하는 건 어때? 열심히 하고 있어?”

    “응! 정말 정말 재미있어.”

    메리엘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는 두 손을 입에 가까이 붙이며 동그랗게 만들었다. 아셀라가 고개를 기울이자, 메리엘이 그녀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속삭였다.

    “에트망 부인께서 하시는 말씀이, 지금까지 가르친 아이 중에 내가 제일 똑똑하댔어!”

    메리엘이 보내진 후작가 소유의 별장은 경관 좋은 휴양 도시, 엘븐에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과 일 년 내내 온화하고 좋은 기후로 알려진 덕에 제국 각지에서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덕분에 엘븐은 그리 크진 않아도 각종 관광 소득으로 꽤 부유한 도시였다.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그만큼 소문도 빨랐다.

    요양을 이유로 내려온 후작가의 영애에게 사람들은 적잖은 관심을 가졌고, 필립은 그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대로 그 지역에서 이름난 교육자로 알려진 에트망 자작 부인이 메리엘의 교육을 맡게 된 건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픈 양딸을 별장에 처박아두고 방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던 필립의 고육지책이었다.

    “잘하면 아카데미에도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어!”

    “아카데미에?”

    아카데미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몰리는 기관이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인재를 뽑는 곳이기에 귀족이라고 해서 모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능력이 있다면 평민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 메리엘이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나 보구나.”

    아셀라가 기쁜 낯으로 메리엘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어린아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하게 은근슬쩍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특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능성이 있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빠르면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였다.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은 이 나이를 즈음하여 입학시험을 치렀다.

    “메리엘, 아카데미 들어가고 싶니?”

    메리엘이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아셀라가 부드럽게 채근하자 그제야 아이의 입에서 솔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실은 아버지께 편지로 말씀을 드렸는데…….”

    뒷말을 듣기도 전에 아셀라는 이어질 이야기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답장이 안 왔어.”

    “…….”

    “다시 말해도 어차피 허락 안 해주시겠지?”

    말을 마친 메리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시무룩해진 동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셀라의 심장 한구석이 찌르르해졌다.

    “메리엘…….”

    고개 숙인 아이에게 아셀라가 손을 뻗을 때였다.

    별안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아셀라가 고개를 돌렸다. 필립이 잔뜩 성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잔뜩 겁먹은 메리엘을 다급히 감싸 안았다. 필립을 본 아이의 얼굴이 어느새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장 메리엘을 데려가.”

    필립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에 서 있던 하녀들에게 명령했다.

    “아버지, 잠시만, 잠시만 제 말 좀 들어주세요.”

    “입 다물어.”

    아셀라가 입가를 떨며 간신히 입을 열었으나 서늘한 대꾸만이 돌아왔다.

    “당장 데려가지 않고 뭘 하나!”

    “언니!”

    “메리엘!”

    하녀들 여럿이 다가와 아셀라에게서 메리엘을 떼어냈다. 아셀라가 미약한 거부의 몸짓을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아셀라 샤르투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말라고 가르쳤을 텐데.”

    필립의 경고 때문이었다.

    메리엘을 붙들고 있던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힘이 주르륵 빠지자,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메리엘을 데리고 사라졌다.

    망연한 얼굴로 동생이 나간 문을 바라보는 아셀라에게 필립의 차가운 음성이 떨어졌다.

    “메리엘이 오면 정식으로 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건만, 그새를 못 참고 이런 짓을 벌였구나.”

    “…….”

    필립이 사용인들에게 씹어뱉듯 명령했다.

    “결혼식 날까지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해. 메리엘을 만나는 것도 금지한다.”

    아셀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가냘픈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만일 한 번만 더 내 명을 거역했다간, 앞으로 다시는 메리엘을 못 보게 될 거다.”

    필립이 아셀라를 쳐다보며 비릿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의 털이 남김없이 쭈뼛 서는듯한 감각에, 아셀라가 필사적으로 꽉 주먹을 그러쥐었다.

    “채찍을 가져와.”

    아셀라를 내려다보는 필립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는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길들여왔던 아델의 딸에게 마지막으로 고삐와 입마개를 단단히 채울 생각이었다.

    * * *

    꿈속에서, 아셀라는 정원을 걷고 있었다.

    시야가 평소보다 낮아 보였다. 정원의 아름다운 나무들은 어째서인지 더 크고 우람하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나무에 손을 뻗었다가, 작고 통통한 손이 눈에 들어오자 우뚝 멈추어 섰다. 시선을 천천히 아래로 내리자 짧은 다리와 반짝이는 검은색 메리제인 구두가 보였다.

    ‘이건…….’

    아셀라가 급히 주변을 휘휘 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안 돼!’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는 직감에 아이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자그마한 발이 쉼 없이 지면을 박찼다. 소중한 이를 거듭 부르는 앳된 얼굴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내 어머니.

    “아…… 셀라…….”

    그녀가 마침내 어머니를 찾았을 때, 이미 아델은 죽어가고 있었다.

    아델의 심장께에 달려 있던 가문의 문장은 피로 흠뻑 젖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티 없는 눈밭처럼 새하얗던 정복이 붉게, 또 붉게 물들어갔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때문에 어머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셀라가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팔뚝으로 닦아내며 절박하게 어머니를 불렀다.

    피로 흥건해진 하얀 두 손이 아셀라의 작은 손을 감쌌다. 잠시 뒤 아이의 손에 차갑고 둥그런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아셀라가 울음을 삼키며 소리 없이 물었다.

    “……베네비토를, 그를 조심…….”

    아델의 입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그녀에게 속삭였다.

    “……다고, 약속해…… 주렴…….”

    어머니를 잃어가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쿨럭, 하는 얕은 기침과 함께 아델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어머니……!’

    사랑하는 이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아셀라의 정신이 다시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13화

    4. 첫 만남

    아셀라가 몸을 소스라뜨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거칠어진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내려 몸을 살폈다. 품이 넓은 네글리제 사이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한 살결이 보였다. 필립이 불렀던 신관의 치유 덕분이었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물에 젖은 듯 축축했으나, 흰 옷자락은 작은 핏자국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왜 그때의 꿈이…….’

    아셀라에게는 영원히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어렸을 때는 악몽으로 종종 꾸기도 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꾸지 않게 된 꿈이기도 했다.

    그랬던 기억이 몇 년 만에 다시 꿈으로 나타났다.

    ‘어머니…….’

    잊었던, 잊으려 애썼던 어머니의 유언과 당부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전 자신이 없어요.’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했건만,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차라리 잊어버리려고 했었다. 그러자 약속을 망각한 자신을 책망하기라도 하듯, 다시 꿈을 꾸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아셀라가 잊지 못할 소중한 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결혼식 당일.

    정신없이 부산한 사람들 속에서, 아셀라는 홀로 고요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적막하고 황량한 황무지를 비추는 괴괴한 달빛처럼.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그녀의 몸을 곱게 감쌌다. 온갖 귀한 보석으로 치장한 뒤, 단정한 이목구비를 살리는 정교하고 섬세한 화장이 정성 들여 이루어졌다.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긴 은빛 머리칼은 은은한 향이 나는 꽃 기름을 발라 수십 번을 빗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호화로운 티아라, ‘여신의 영광’이 아셀라의 머리 위에 놓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몸을 일으킨 마담 에프로듀가 나지막한 탄성을 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름다우시네요.”

    흙 속에 파묻혀 있어도 눈부시게 빛나는 진주처럼. 진창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에프로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금껏 수많은 이의 옷을 제작했던 그녀였다. 당연히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을 봐왔다. 모두가 하나같이 화려하고 빼어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누구도 아셀라 샤르투스를 능가하지는 못하리라 확신했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배어 있는 품격과 절제된 우아함은 타고난 것이었다.

    “세상에, 너무 예쁘세요!”

    “인형 같아!”

    부티크의 직원들이 감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셀라가 쓰게 웃었다.

    자신의 처지가 잘 포장되어 진열장에 놓인 인형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가씨, 웃으시니까 더 예쁘네요. 조금만 더 환하게 웃어보세요.”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셀라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언젠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녀를 조롱하며 팔목에 바늘을 찔러댔던 하녀였다.

    “환한 얼굴로 전하를 맞이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웃는 연습을 하셔야지요.”

    “…….”

    “이 모든 게 샤르투스 가문을 위한 일이니까요.”

    하녀의 마지막 말은 입을 귓가에 바짝 붙인 속삭임이었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고 말한 데다 워낙 목소리가 작았던 탓에 아셀라만이 들을 수 있었다.

    아셀라가 작은 입술을 꾹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하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뗐다.

    그 옆의 하녀가 기다렸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들으셨나요?”

    “아, 맞아요. 아침에 엄청난 소식이 있었지요.”

    어떤 이야기일지 몰랐음에도, 아셀라는 듣고 싶지 않았다.

    하녀들이 자진해서 아셀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대개 그녀를 괴롭게 만들고는 했으니까.

    “정말 굉장하더라고요.”

    “아마 아가씨도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걸요?”

    평소에 아셀라가 받는 정보들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필립은 그녀가 가문의 어떠한 일도 알기를 원치 않았다.

    ‘넌 얌전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쓸데없이 나서려 들지 마라.’

    그러나 결혼에 관련된 이야기만큼은 굳이 알려고 들지 않아도 아주 세세한 것까지 전달되었다.

    “대공 전하께서 샤르투스에 금괴 한 상자를 추가로 보내주시기로 하셨대요.”

    “결혼 선물로요.”

    “샤르투스의 삼 년 치 예산에 맞먹는 양이라고 하던걸요.”

    하녀들이 저마다 알고 있는 정보들을 풀어냈다. 대화하듯 자연스럽게 말이 이어졌지만, 아셀라는 그들이 고도로 계산된 말을 나누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동안 아셀라가 알고 싶어 했던 소식은 단 하나도 알려주지 않았던 하녀들이었다. 그들이 갑작스레 이런 친절함을 베풀 이유가 없었다.

    ‘메리엘.’

    예를 들면, 하나뿐인 동생의 안부 같은 것.

    아셀라는 지난 일주일간 방에 드나드는 하녀들을 붙잡고 몇 번이나 메리엘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답은커녕 아셀라의 물음을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정작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원치 않는 것만을 강제로 떠먹이고 있었다.

    “기쁘지 않으세요?”

    “…….”

    “아가씨께서 아직 실감이 안 나시나 보네요.”

    아셀라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으며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자자, 영애가 많이 긴장했나 봐요. 저도 결혼식 때는 어찌나 예민해지던지요.”

    “아, 그러고 보니 지난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역시 그러셨군요. 영애,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마담 에프로듀가 솜씨 좋게 수습하자, 하녀들이 눈치 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덕분에 상황은 매끄럽게 정리됐다. 짧은 침묵이 지나간 공간에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때였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청혼서가 도착하고 결혼식인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셀라는 칼릭스 베네비토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출입을 통제받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그는 아셀라를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드디어 오셨네요. 전하께서도 신부의 모습이 궁금하시겠지요.”

    마담 에프로듀의 말을 뒤로하며, 아셀라가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리도 없이 열리는 문을 보자마자, 아셀라는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깔고 말았다. 두려움에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열어 인사말을 내뱉었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아셀라의 인사말에 이어 방 안에 함께 있던 이들이 줄지어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칼릭스 베네비토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대신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만이 방을 가로지르며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아셀라 샤르투스.”

    “…….”

    “고개를 들어.”

    땅속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는 소름 끼칠 만큼 낮았다.

    아셀라는 그에게서 풍기는 달큼한 향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리고 숨을 쉬는 것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언젠가, 연회에서 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저렇게 멋진 분이 또 있을까!’

    ‘그뿐이게요? 풍기는 향기는 또 어떻고요.’

    ‘맞아요. 와인 향 같기도 하고, 초콜릿 같기도 하고.’

    ‘영애, 일부러 아까 전하 근처에 다가간 거 다 알고 있어요.’

    ‘눈치채셨어요?’

    ‘그걸 모르는 게 이상하죠! 그나저나 무슨 향수를 쓰시는 걸까?’

    지나치게 강한 향이 코로 밀려들고 있었다. 순간 몸이 비틀거릴 뻔한 것을, 발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지탱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바로 앞에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내리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 아니면.”

    “…….”

    “들리지 않는 척을 하는 건가.”

    칼릭스가 긴 손가락을 뻗어 아셀라의 턱을 붙잡았다. 강한 힘에 그녀의 고개가 속절없이 들어 올려졌다.

    놀라 엉겁결에 눈을 뜬 아셀라는, 날카로운 적안을 마주하고는 숨을 들이켰다.

    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단단히 붙들린 턱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이리 긴장해서야.”

    대공이 입매를 잡아당기며 나른하게 웃다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섬뜩한 무표정을 한 그가, 주변을 천천히 훑었다.

    시선을 받은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저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맹수 앞에 내던져진 먹잇감이 된 양 등골이 오싹해졌다.

    금방이라도 말라 죽을 것만 같은 긴장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이며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두, 나가.”

    행동은 재빨랐다. 칼릭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방 안에 아셀라와 칼릭스, 두 사람만이 남기까지 불과 몇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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