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71)

신년축제나 건국제의 황궁 연회를 비롯해 중요한 사교 행사마다 참석시킬 계획이었다.

쓸 만한 혼처가 들어오는 대로 팔아치울 수 있도록.

그런데 아셀라가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필립의 치부를 폭로하겠다 말한 것이다. 메리엘에게 손을 좀 들어 올렸다는 이유로.

‘감히 제깟 것이 나를 협박해?’

필립의 표정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분노에 찬 얼굴이 금방이라도 김이 날 듯 벌게졌다. 그가 이를 으드득 갈며 외쳤다.

‘그딴 짓을 벌이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원하는 건 이루지 못하게 되시겠죠.’

필립은 장차 샤르투스 가문을 이을 후계자의 후견인 자격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양아들을 후계 위에 앉히기 위해, 정식 혈통인 딸들을 학대했다는 구설수에 휩싸이면 안토니의 후작위 승계는 요원해졌다.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명분과 체면도 만만치 않게 중시하는 집단이었다.

샤르투스의 가신들 정도야 힘으로 누를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귀족들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그날 필립은 메리엘에게 매를 들지 못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네 방에 가서 처박혀 있거라! 다시 부를 때까진 기어 나올 생각도 말아라!’

아셀라는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나 다행이라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필립의 보복이 이어졌다.

며칠 후, 메리엘을 후작령 남부의 어느 별장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샤르투스 후작령은 수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편에 속했지만, 그렇다 해도 후작령 남부까지는 마차로 족히 나흘은 걸렸다.

어느 늦은 밤, 필립이 반드시 참석하라 명했던 연회에 다녀온 아셀라는 텅텅 비어버린 메리엘의 방을 발견하곤 밤새 울었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그 어린 것을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한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뒤,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메리엘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정성을 다해 쓴 편지였다.

[언니,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날씨도 따뜻하고 다들 친절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적었을 메리엘을 생각하며, 아셀라는 편지를 몇 번이나 거듭 읽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몰라…….’

여기에 있어 봐야 좋은 꼴은 보지 못할 터.

메리엘이 잘 지낼 수만 있다면 오히려 떨어져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동생의 안위를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했다.

‘네가 잘해야 메리엘도 잘 지낸다는 건 알고 있겠지?’

‘이젠 메리엘이 걱정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필립은 필요할 때마다 메리엘을 걸고넘어졌고, 아셀라는 그의 말을 단 하나도 거역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감히 말대꾸는 어림도 없었다.

홀로 머나먼 타지에 있는 동생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바로 지금처럼.

“잘 대해줄 때는 감사히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하는 거란다. 그렇지 않으면 괘씸함에 마음을 바꾸어 목덜미를 물어 뜯어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알겠니, 아셀라?

필립이 독사 같은 눈을 살포시 휘었다. 갈라진 혀가 연신 넘실거리며 지독한 말들을 속삭였다.

절명한 동물처럼, 아셀라의 의지가 순식간에 꺾였다.

말라비틀어진 초목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한 줌 먼지로 흘러내리듯, 미약하게 움텄던 희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재만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섭섭하고 서운한 일이 좀 있었다고 해서, 그걸 마음에 담아두면 안 되지.”

“…….”

“이해가 되었니?”

필립이 손을 뻗어 아셀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깨에 닿는 손길에 소름이 죽 끼치고 속이 메슥거렸다. 순간적으로 그 부위를 도려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일었을 만큼.

차라리 내려쳐지는 채찍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답해야지.”

“……네, 아버지.”

아셀라가 자꾸만 흐려지는 눈을 깜박이며 간신히 답했다.

그제야 필립이 매끄러운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때, 밖에서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마담 에프로듀가 조금 전 저택 앞에 도착했습니다.”

“때맞춰 왔군.”

필립이 입꼬리를 양옆으로 늘리며 명했다.

“들어오라고 해.”

도주하는 대공비 10화

3. 거짓된 로맨스, 만들어진 낭만

최고급 부티크를 운영하는 마담 에프로듀의 명성은 실로 대단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그녀가 제작한 드레스를 구입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예약하고 기다릴 정도였다.

‘마담 에프로듀, 샤르투스 후작가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직원에게서 말을 전해 들은 에프로듀는 처음엔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샤르투스에서는 한 번도 자신을 찾은 적이 없었다.

하르메니아 제국에 몇 없는 후작 가문인 데다가, 영애가 둘이나 있는걸 감안하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마담 에프로듀를 마주한 사용인은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아가씨의 결혼 예복을 의뢰 드리러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실례가 아니라면, 혹 결혼식이 언제일까요?’

‘다음 달입니다.’

달력을 휙휙 넘기며 일정을 확인하던 에프로듀가 멈칫했다.

‘아, 그건 좀 곤란한데요. 주문이 많이 밀려 있어서요.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죄송하지만…….’

그녀가 난색을 표하며 거절의 말을 입에 올리려던 때였다.

‘대공 전하의 결혼식 예복 제작은 마담께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텐데요.’

마담 에프로듀는 귀를 의심했다.

‘대공 전하라고요? 그럼 샤르투스 영애께서 결혼하신다는 분이…….’

‘예.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 전하이십니다.’

베네비토 대공 부부의 결혼식 예복.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거절 자체도 불가능했겠지만, 에프로듀 역시 만사를 제치고서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곧바로 예약된 일정을 모조리 미루고 한 달여를 통째로 비웠다. 고객들에게 사과와 함께 선물을 보내다 보니 반나절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대공의 결혼 예복이라는 이유를 대면 쉽게 끝날 문제였겠지만,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함구령이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성공적으로 시간을 비워낸 에프로듀는 직원들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샤르투스 후작저를 찾았다.

“어떤 분일지 궁금한걸.”

에프로듀가 함께 마차를 탄 직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저두요!”

“대공 전하께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분이라니. ‘그’ 대공 전하께서 말이에요.”

“혹시 그분 얼굴을 뵌 적 있으세요?”

직원들의 물음에 에프로듀는 고개를 저었다. 아셀라 샤르투스의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데뷔탕트를 치른 지 삼 년이 다 되었다는데.’

마담 에프로듀의 으리으리한 부티크는 살롱 역할도 겸했고, 덕분에 그녀는 꽤 다양한 인맥과 정보통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샤르투스 후작가의 두 영애만큼은 아주 간간이 들려오는 소문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다만 에프로듀는 작고한 아델 샤르투스 후작의 모습을 비교적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만나게 될 영애가 상당한 미인이리라 확신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마담 에프로듀입니다.”

마침내 아셀라를 마주한 에프로듀는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그녀가 제국 제일의 의상 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천부적인 미의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에프로듀의 눈에 비친 아셀라는 단순히 미인이라는 말로 수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파란 눈과 풍성하게 물결치는 은빛 머리칼은 샤르투스의 직계에게만 보이는 특징이었다. 그녀의 어머니처럼 아셀라 역시도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자그마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태생적인 고아함과 품위에, 에프로듀가 잠시 말을 잃었다.

“아셀라 샤르투스예요.”

아셀라의 인사에 에프로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애. 아니, 이제 대공비 전하가 되시겠네요.”

능수능란한 말과 함께, 고운 사교적 미소가 곁들여졌다. 에프로듀의 눈짓에 부티크의 직원들이 아셀라 앞에 수십 가지의 원단과 레이스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셀라는 에프로듀의 설명을 차분히 들으며 그녀가 추천하는 것 중에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의 안목은 익히 알고 있으니 전적으로 맡겨도 나쁘지 않았고, 너무 부담스러운 디자인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그럼 치수를 재도 될까요?”

“아.”

아셀라의 얼굴에 스치듯 근심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마담께서 직접 재시나요?”

“그럼요, 영애.”

“마담만 남고 다른 이들은 모두 내보냈으면 해서요.”

마담 에프로듀는 충분히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위 귀족들은 평민의 손에 몸이 닿는걸 기피했다. 에프로듀 역시 비록 한미하기는 해도 귀족이었기에 귀족들을 대상으로 부티크를 운영할 수 있는 거였다.

일부러 직원들도 몰락하거나 형편이 좋지 않은 귀족가의 영애들을 고용했다.

“영애, 그 부분은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 부티크에선 흠잡을 데 없는 이들만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거든요.”

에프로듀가 직원들의 신분을 에둘러 밝혔다.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그렇다면요?”

“다른 이에게 몸을 보이는 것이 조심스러워서요.”

아셀라의 대답에 에프로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들은 일반적으로 몸 시중에 익숙했다. 먹을 때도, 씻을 때도, 옷을 갈아입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샤르투스 가문 정도라면 다른 이의 손을 빌려 생활을 영위하는 게 당연할 터.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에프로듀는 제국 최고의 부티크를 운영할 만큼 노련한 수완가였고, 재빨리 고객의 필요에 응했다.

“모두 잠시 나가주겠어?”

에프로듀를 제외한 부티크 직원들이 모두 나가고 문이 닫혔다.

“영애,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마담 에프로듀.”

“네?”

“혹 무언가를 알게 되시더라도 모른 척해주셨으면 해요.”

맥락 없는 말에 에프로듀는 더 의아해졌다. 그러나 아셀라는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완전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에프로듀가 아셀라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가 입고 있던 드레스 끈을 풀어 내렸다.

잠시 뒤, 마담은 이 고귀한 영애가 감추고 싶어 했던 비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얇은 이너는 안쪽이 살짝 비쳤다.

상반신은 붕대로 거의 다 감겨 있다시피 했고, 붕대 바깥쪽으로는 붉다기보다는 검은빛에 가까운 혈흔이 말라붙어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후작 권한 대행인 필립이 두 양딸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고고하고 명망 높은 귀족가의 영애에게 실은 끔찍한 학대가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까.

에프로듀가 말문을 잃었다.

그 순간, 스치듯 떠오른 경고 하나.

‘여기서 보고 들은 그 어떤 것도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정문에서 에프로듀 일행을 맞이했던 사용인 하나가 신신당부를 했었다. 만일 발설 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는 협박성 말을 곁들여서.

대부분의 귀족 가에선 보안을 중시했고, 마담 에프로듀는 그런 면에서 적임자였다.

입이 가벼우면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의상실도, 살롱 운영도 어림없다. 그녀는 보아도 보지 않은 척, 들어도 듣지 않은 척 입을 다무는 데 능했다.

그런데 알 만한 곳에서 유독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하니 의아하게 여겼었다.

‘설마 이것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충격적인 광경에 에프로듀의 동작은 완전히 멈춘 상태였다. 어정쩡하게 벗겨진 드레스가 한쪽 어깨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아무것도 못 하던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울렸다.

“비밀…… 지켜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프로듀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는 빠르게 치수를 재었다.

이제 막 성년이 된 어린 영애가 이 시간을 얼마나 수치스러워하며 견디고 있을지 알 것 같아서였다.

여느 때보다도 신속하게 일을 마무리한 에프로듀가 다시 아셀라의 겉 드레스를 끌어 올려 단단히 여몄다.

아셀라가 에프로듀의 배려를 짐작하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했다.

“수고하셨어요.”

마담 에프로듀는 기본적으로 장사꾼이었으므로 이해타산에 밝고 불필요한 언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의 말을 건넸다.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실 거예요.”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불행할 신부가 될 아셀라는,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 *

결혼이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대공의 약혼 소식은 제국 사교계를 뒤흔들었다.

지금껏 대립각을 세우던 두 가문이 혼인으로 화해를 이루고 새 시대를 열었다며 세간이 떠들썩해졌다.

특급 일간지에서부터 저급한 타블로이드 신문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일 면에 기사를 실어, 제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는 어디든 그들의 이야기가 화제로 등장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셀라 샤르투스에게 청혼서를 보냈다.]

아셀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거짓된 이야기가 꾸며질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었다.

[이 년 전, 하르메니아 제국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영토 확장 및 정복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선두에 서서 무패 행진을 이어오던 베네비토 대공은 마지막 전투까지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화려하게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대공은 황궁에서 열린 승전 기념 축하연회에서 아셀라 샤르투스를 만나 첫눈에 반했고, 영애가 성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다가 마침내 청혼하였다…….]

아셀라가 천천히 기사를 읽어내렸다. 필립이 그녀에게 직접 보라며 전해 준 것이었다.

기사를 받아 들 때부터 각오했었는데도 막판에는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가느다란 손끝에서 종이 가장자리가 약간 구겨졌다.

‘…….’

아셀라의 고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기사의 내용은 실로 낭만적이었지만, 대부분의 거짓에 약간의 사실만을 곁들여 만들어진 이야기였다.

일부의 진실이 섞여 빈틈없이 무장되어버린 거짓.

그러나 너무도 완벽히 꾸며져 잘 포장된 이야기가 일단 널리 퍼져 버리고 나면, 사람들은 그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열광하는 건 달콤하고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피도 눈물도 없다 알려진 잔혹한 전쟁 영웅이 사랑스러운 영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그런 이야기.

이면에 감춰진 질척하고 쓰디쓴 진실 따위,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바닷속으로 깊게 가라앉아버린 진실을 홀로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 * *

한편, 저택의 본관에서는 다른 누군가가 울분에 찬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레베카 로렌스. 필립의 애인이었다.

“아아악! 내 옷!”

레베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아끼던 옷이 실밥과 바늘구멍으로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내 옷이 왜 이렇게 됐어!”

레베카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녀의 멱살을 붙잡았다.

도주하는 대공비 11화

“그, 그게 어찌 된 일이냐면…….”

하녀들이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며칠 전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걔한테 입히려고 내 옷을 이따위로 만들어 놨다고?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가, 각하께서 명하시어 저희는 어쩔 수가…….”

“지금 장난해?”

레베카가 버럭 소리쳤다. 격한 움직임에 고혹적인 적색 머리칼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얼마나 힘들게 구한 건데! 삼 개월이나 기다려서 겨우 받은 거란 말이야!”

분을 참지 못한 레베카가 테이블보를 잡아챘다.

그 바람에 위에 놓여 있던 찻잔과 다과가 우르르 바닥으로 쏟아졌다. 찻잔과 접시가 깨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녀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맸다.

“제발 진정하세요, 마님.”

“시끄러워!”

레베카는 아직 필립과 결혼하지도, 그렇다고 안토니가 후작 작위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후작 부인 행세를 하고 싶어 했다.

그 탓에 샤르투스 저택의 모든 사용인은 레베카를 마님이라 호칭했다.

“필립은 대체 어디 있어? 뭘 하고 있기에 지금까지 안 오는 거야?”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거예요.”

“외출이라고? 웃기시네!”

레베카가 몸을 홱 돌려 문을 박차고 나서자 놀란 하녀들이 허둥지둥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필립!”

“오, 레베카.”

레베카는 정확히 필립이 있는 곳을 찾아 문을 열었고, 필립은 마치 그녀를 오매불망 기다린 사람처럼 레베카를 맞이했다.

레베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성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외출했다는 사람이 왜 여기에 있어?”

“조금 전에 돌아왔어. 여긴 잠시 들른 거고.”

“내가 오늘 오겠다고 미리 기별을 넣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레베카.”

필립이 레베카를 달래듯 어깨를 감싸 안았지만, 그녀는 거기까지 들고 간 드레스를 그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이거, 설명해.”

식식대는 레베카를 보며 필립이 보이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레베카의 징징거림과 응석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더 귀찮고 거슬렸다.

속으로는 진저리를 칠 만큼 짜증이 일었으나, 겉으로는 가면 같은 미소를 두르며 웃는 낯으로 레베카를 달랬다.

“왜 또 이러실까. 사정이 있었다니까.”

필립이 능글맞게 웃어넘기려 했으나 레베카는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눈이 더 뾰족해졌다.

“그러니까 무슨 사정이냐고!”

필립이 있었던 일을 간략히 정리해 설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레베카가 입술을 파들거리더니 벌게진 얼굴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래서 결국 걔한테 입히겠다고 내 드레스를 이 꼴로 만들어 놨다는 거 아냐! 하필이면 왜 이건데! 내가 이 드레스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

레베카가 분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며 연신 소리를 내질렀다. 이렇게 한 번씩 레베카가 폭발할 때면 말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필립이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애써 억눌렀다.

‘비위 맞춰주는 것도 이제 못 해 먹겠군.’

필립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여러 뒷배와 운이 따라준 덕이었다. 그중 레베카 로렌스의 공도 적지 않았다.

비록 자작가에 불과하나, 각종 사업 투자의 성공으로 큰 부를 이룬 로렌스 가문의 금지옥엽 외동딸.

로렌스 자작 부부는 어렵게 얻은 딸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퍼부었고,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덕분에 사랑만 받으며 오냐오냐 자란 레베카는 철없고 세상 물정에도 어두운 영애로 성장했다.

그녀를 마주한 필립은 기가 막히게 그 사실을 알아보았다.

필립은 우연을 가장해 레베카와 접촉했다. 그는 꽤 장신의 미남이었고, 상대를 혹하게 할 만한 화술과 매너도 갖추고 있었다.

레베카는 필립과의 만남에서 로맨스 소설에서나 보던 운명적인 사랑을 떠올렸다. 의도된 친절과 상냥함에 고스란히 마음을 빼앗겼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속절없이 빠져든 뒤였다.

‘어찌 감히! 다시는 내 딸 앞에 나타날 생각도 마시오!’

필립은 이미 아델과 결혼한 후였고, 당연히 로렌스 자작 부부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제게서 필립을 떼어놓으신다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겠어요!’

그러나 레베카가 필립이 아니면 죽겠다며 한바탕 집안을 뒤집어 놓자, 로렌스 자작 부부도 설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딸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그저 두 사람의 불륜이 드러나지 않도록 기를 쓰고 막는 게 자작 부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의 전부였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오다, 아델이 죽은 뒤에야 두 사람은 자신들의 관계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귀족 사회에 썩 바람직하게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제하지 못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배우자가 없었으니까.

‘필립, 우리는 언제 결혼할 수 있는 거야? 부모님도 이제 결혼을 기다리는 눈치시란 말이야. 요즘은 건강도 부쩍 안 좋아지셨는데.’

이후로 칠 년.

레베카가 끊임없이 필립에게 결혼을 요구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핑계를 대며 미루어왔다. 제 손안에 거의 다 들어온 샤르투스를 레베카와의 결혼으로 놓쳐버릴 수는 없었다.

‘대체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건데!’

‘안토니가 후작이 되면 당신한테도 좋은 일이잖아. 조금만 더 참아. 알겠지?’

로렌스 가문에는 후계가 레베카 하나뿐이었다. 그녀가 원하기만 한다면 차기 로렌스 자작은 레베카였다.

후작의 양어머니로 사는 삶과 자작 가의 가주로 살아가는 삶.

레베카가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할지 가릴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판단력이 흐려질 정도로 깊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덕분에 필립은 지금껏 레베카의 많은 것을 알뜰하게 써먹으며 이용해 왔다.

“레베카,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당신도 알잖아. 부디 이해해줘, 내 사랑.”

필립이 남은 인내심을 한껏 끌어모아 레베카를 달랬다. 다행히 그의 노력은 빛을 보았다. 레베카의 화가 한결 누그러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아끼던 옷이었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기분 나빴는지 알아?”

레베카가 새침하게 토라진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다. 필립은 그녀가 이미 제 의도대로 넘어왔음을 깨달았다.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덕분에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 텐데도?”

그렇지않아도 부리부리하던 레베카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다래졌다.

“결혼…… 이라고……?”

“그래.”

“그, 그게 정말이야?”

“그럼. 대공이 안토니의 가주 승계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어. 안토니가 후작위에 오르는 대로 우리도 결혼하자.”

레베카의 입에서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비명이 터졌다. 이윽고 그녀의 눈가가 발개지더니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필립!”

레베카가 필립의 목을 와락 껴안으며 안겨들었다.

“이제 기분이 좀 풀렸어?”

“응! 나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필립의 입술 사이로 조소가 비죽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레베카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다른 쪽 손으로는 그녀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사랑해, 필립…….”

레베카가 그의 가슴팍에 뺨을 문지르며 행복에 겨워했다. 그러나 레베카를 내려다보는 필립의 얼굴엔 어느새 비뚜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냉소 어린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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