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1)

“소신은 그저 폐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싱겁긴.”

그러나 페르난데 역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는 제 앞에서 의견이랍시고 건방진 말을 나불거리는 것들을 싫어했다.

회의에서 주제도 모르고 나대던 귀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두었다가 반역의 죄를 뒤집어씌워 깡그리 멸족시킨 적도 있었다.

“샤르투스라. 이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페르난데가 검지를 비스듬히 기울여 제 턱을 쓸었다. 황제의 의중을 가늠하던 던컨이 조심스레 물었다.

“개들을 풀까요?”

황제 직속의 기밀부대. 속칭 황제의 개.

그들은 살인과 납치, 고문 등 황제의 명령이라면 어떤 것이든 마다치 않고 따랐다. 명분도, 이유도 필요치 않았다. 어릴 때부터 세뇌된 탓에 황제의 말 한마디면 자결도 불사했다.

“아니. 샤르투스의 첫째 계집에겐 힘이 없어. 조사할 가치도 없지.”

페르난데가 고개를 저으며 빈정댔다.

“의외로 필립이 인내심이 좋은 모양이야. 나 같으면 그런 버러지는 진즉 폐기해 버렸을 텐데.”

“…….”

“하기야 워낙 약삭빠른 장사치니 나중에 크게 팔아먹을 생각을 했겠지. 보석 광산을 받았으니 소원을 이룬 셈이군.”

페르난데가 멸시에 찬 어투로 조롱 조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둘째가 있었지. 이름이 메리엘이라고 했던가, 올해 몇 살이지?”

“곧 열 살 생일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던컨의 대답에 페르난데의 잿빛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개들을 붙여라. 지켜보다가 혹여 이능이 발현된다면…….”

황제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회를 봐서 죽여버려.”

* * *

대공저의 집무실에서 사내가 보고를 받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뒤편, 커다란 창을 등지고 선 그의 그림자가 방 안에 길게 늘어졌다.

진한 노을빛을 받은 남자의 뒷모습은 흡사 전쟁의 신을 연상케 했다. 큰 키와 넓은 어깨, 탄탄한 근육질의 몸은 정복으로도 미처 가려지지 않았다.

“……이상입니다, 전하.”

보고를 마친 라이젠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그의 주군, 칼릭스 베네비토의 명을 숨죽여 기다렸다.

정적이 이어진 끝에,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라이젠.”

“하명하십시오.”

남자가 몸을 천천히 돌리자 그린 듯 매혹적인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어둠을 담은 흑발이 약간 흐트러져 퇴폐적인 인상마저 주었다.

강렬한 적안이 저를 쳐다보자, 라이젠이 마른침을 삼켰다.

주군을 곁에서 보좌한 지도 어느새 수년이었지만 아직도 눈을 마주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섬�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비단 그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고위 귀족들조차 이 젊은 대공과 말 한마디 나누기는커녕,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수년을 전쟁터에서 보내온 사내에게선 절로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 모습에 누군가는 두려움을, 또 누군가는 경외감을 느꼈다.

라이젠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결혼을 대대적으로 알려라. 산골짜기의 촌부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명 받들겠습니다.”

자신의 결혼을 널리 자랑하고픈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칼릭스 베네비토는 철저한 계산 아래 움직이는 남자였다.

필요하면 취하고, 쓸모가 다하면 버린다.

그러니 이는 차라리 아셀라 샤르투스가 자신의 것임을 공표하는 일종의 의식에 가까웠다.

완벽히 계산된 행보.

라이젠은 말 몇 마디도 나누어보지 못한 미래의 대공비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만나 보니 어땠나.”

물음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으나 라이젠은 말을 삼가기로 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의 주인이 선택한 이였다. 곧 가문의 안주인이 될 분을 함부로 재단하여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일전에 보고 드린 대롭니다.”

충직한 가신의 입에서 정석적인 대답이 나왔다.

“네가 보기에도 전혀 능력이 없던가.”

“예, 전하.”

“추후 각성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습니다.”

“재미있군.”

칼릭스의 무심하던 얼굴에 일순 흥미로움이 스쳤다. 날렵한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유려한 호선을 그렸다.

“네 판단이 그러하다면 일단 지켜보도록 하지.”

라이젠이 이토록 확신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였다.

여자에게 정말로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라이젠이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거나.

“능력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

“예외 상황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메리엘 샤르투스 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도.”

샤르투스 가문은 자손이 귀했다.

한 세대에서는 한 명의 여아만이 태어났고, 그 외엔 남자아이였다. 두 번째 여아가 태어나는 경우는 첫째 딸이 사망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삼 백여 년 전부터는 아예 남아가 태어나지 않았다.

가주가 될 단 한 명의 이능자만이 태어나는 가문. 현재 샤르투스에 공식적인 방계가 없는 이유였다.

이 탓에 한때는 많은 이가 곧 샤르투스의 대가 끊기리라 여겼으나, 예상을 깨고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샤르투스의 둘째라.”

그렇기에 유복자로 태어난 메리엘 샤르투스의 출생은 제국 내에 실로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유례가 없던 일이 벌어진 탓에 온갖 허무맹랑하고 얼토당토않은 말이 사교계에 나돌았다.

그 소문들을 단번에 잠재운 건, 어머니였던 아델 샤르투스 후작의 말 한마디였다.

도주하는 대공비 8화

‘제 이름과 이능을 걸고, 두 아이 모두 제 딸임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어머니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는 왈가왈부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메리엘 샤르투스는 공식적인 후작가의 둘째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삼 년 후, 아델은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 샤르투스 후작가는 그대로 필립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열 살 생일이 머지않았다고 합니다.”

“확인하는 대로 보고하라.”

“예, 전하.”

칼릭스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일 이능이 발견된다면 그 아이가 차기 후작이 되겠군.”

마치 저녁 식사 메뉴를 읊는듯한 여상스러운 말투였다. 결혼의 대가로 안토니의 후작위 승계를 약속했던 건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이 자리의 누구도 그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태연한 얼굴의 라이젠이 입을 열었다.

“필립은 제 아들이 곧 후작위에 오를 거라 철석같이 믿고 있더군요.”

“그게 제 명을 재촉하는 줄도 모르고 있겠지.”

눈앞의 황금 더미에 눈이 멀어 바로 발 앞의 낭떠러지도 못 보는 아둔한 자. 칼릭스에겐 굳이 시간 내어 평하기에도 아까운 인간이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이능자를 두고, 그 머저리를 후작위에 앉힐 수야 있나.”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넘긴 칼릭스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책상에 가까이 다가섰다. 얇은 입술이 벌어지며 말이 이어졌다.

“지금껏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라이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일’과 관련해 황제께서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전혀.”

“생각보다 황제 폐하의 고민이 길어지시는 듯합니다.”

“아직은 써먹을 데가 있다고 판단했겠지.”

칼릭스가 신랄하게 빈정거렸다.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가 책상 위를 향했다. 결혼허가서에 선명하게 찍힌 황제의 직인을 가볍게 훑고는 옆의 서명으로 눈을 돌렸다.

-아셀라 샤르투스.

우아하고 단정한 필체였다. 칼릭스의 긴 손가락이 여자의 이름을 지그시 눌렀다.

“다른 특이점은 없었나?”

라이젠이 멈칫했다. 여간해서는 두 번 묻는 법이 없는 그의 주인이 재차 질문을 던진 것이다.

아셀라 샤르투스에 대해서.

물론 아까와 같은 대답을 내놓을 수도 있었다.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알면서도 초연하게 앉아 있던 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알려진바 보다는 괜찮은 분인 것 같았습니다.”

답지 않은 말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칼릭스의 무감한 얼굴에 조금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라이젠이 누군가를 호의적으로 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나?”

“예. 하지만 보고드린 것 외에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거의 말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판단을 내렸지?”

순간, 라이젠의 말문이 막혔다.

자신조차 이유를 알 수 없었으므로.

그가 오늘 명 받았던 일은 아셀라 샤르투스에게 주군의 약혼 예물을 전하고, 이능 각성 여부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만남은 극히 짧았다. 대화라고 해보아야 방을 나서기 전 잠깐 나눈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이 든 건지 모를 일이었다.

생각하는 와중에도 칼릭스의 추궁이 이어졌다.

“벌써 사람을 파악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 않나?”

경솔했음을 깨달은 라이젠이 잘못을 청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미숙한 판단이었습니다.”

칼릭스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라이젠을 꽤 오랜 시간 곁에 두었지만, 오늘처럼 생소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제법 흥미롭기도 해서, 칼릭스는 보좌관의 실수를 너그러이 보아넘기기로 했다.

“결혼식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샤르투스에서 별도로 요청한 건?”

“몇 가지 있었습니다만, 예산이 충분하여 문제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해줘. 무엇이든.”

베네비토 가문의 막대한 부는 이미 황가를 능가했다. 샤르투스가 어떤 요구를 하든, 드넓은 백사장의 한 줌 모래밖에는 되지 않을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예, 전하. 그리고…….”

라이젠이 짧은 망설임 끝에 물었다.

“샤르투스 영애와 따로 약속을 잡으시겠습니까?”

귀족 사회에 정략혼은 흔한 일이었다. 가문 간의 결속과 동맹, 가문의 이익을 위한 담보로써 끊임없이 재고 계산했다.

다만 어찌 되었든 부부가 될 사이였기에, 대부분의 귀족 가에선 결혼 전에 긴 약혼 기간을 가지면서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안배했다.

보통 일 년 이상, 짧아도 육 개월 남짓.

그러나 칼릭스 베네비토가 결정한 결혼식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불과 한 달 뒤였다.

“샤르투스에 연락을 취해 만날 시간을―”

“필요 없다.”

단칼에 말을 잘라낸 칼릭스가, 서류로 눈을 돌렸다.

라이젠의 반응에 약간의 흥미가 인 건 사실이었지만, 굳이 결혼 전에 만날 정도로 마음이 동하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용 가치에 따라 데려오는 여자일 뿐. 물건만 확실하다면 상관없었다.

능력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자는 제 효용을 다 하게 될 터.

그러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필요 없었다.

* * *

필립은 황궁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아셀라의 방이 있는 별관까지 직접 찾아갔다.

“말해. 카단 경과 무슨 말을 나누었지?”

라이젠은 필립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입의 인간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거의 하지 않았고, 충성심이 강해 회유나 협박 따위는 통하지도 않았다. 어설프게 시도했다간 오히려 역풍을 맞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필립은 칼릭스 베네비토의 입김으로 사업이 좌초된 사실을 알았을 때, 라이젠을 통해 줄을 대보려다가 된통 당한 전적이 있었다.

필립이 라이젠을 업신여기면서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오늘만 해도 라이젠에게 입도 벙긋 못한 그는, 대신 아셀라를 닦달했다.

“대체 단둘이서만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뭐였느냔 말이다.”

“특별한 말씀은 없었어요.”

아셀라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이며 답했다. 라이젠이 떠나기 전 나눈 짧은 대화를 제외하면 아무런 말도 오가질 않았으니까.

필립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아셀라가 일부러 숨기는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니까, 그 말이 무엇인지를 묻는 거다.”

이어진 채근에도 아셀라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하자 필립의 화가 치솟았다. 얼굴이 벌게지고 목에 핏대가 섰다. 아셀라는 자동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느껴져야 할 고통이 없었다.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니 놀랍게도 필립이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있었다. 늘 기분대로 손부터 내지르는 자가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물론 필립의 이와 같은 행동 변화엔 이유가 있었다.

‘대공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걸 준 거지?’

그새 필립의 시선은 책상 위 보석함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좁고 누추한 방에서 이질적일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티아라, ‘여신의 영광’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보석이자 장신구였고, 세기의 장인인 로젠이 만든 제국 최고의 예술품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베네비토 가문의 안주인.’

역대 대공비들은 모두 공식적인 자리에 나올 때 이 티아라를 착용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티아라가 대공비 개인의 것은 아니었다. 베네비토 가문의 재산이자 가보로서 대대로 물려내려 왔다.

하지만 라이젠은 분명 티아라를 두고 약혼 선물이라 칭했다.

이는 아셀라의 사적 재산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칼릭스 베네비토는 아내가 될 여자에게 아무런 관심이나 애정이 없었다. 필립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확신했다.

샤르투스와 베네비토 가문은 서로에게 정적이나 다름없었고, 특히나 칼릭스 베네비토는 샤르투스에 대한 적대심을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의 청혼이 어떤 의미인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아셀라 샤르투스는 허울 좋은 대공비의 이름만을 달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애정 한 줌 없이 짓밟히며 죽지 못해 살아갈 테고, 아마 여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 못 할 일들을 당할지도 몰랐다.

필립에게 이 결혼이 달가웠던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고고하고 우아했던 아델 샤르투스 후작.

그는 살아생전 아델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느꼈다. 그녀가 죽은 지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격지심에서 벗어나질 못했을 만큼.

신분, 작위, 재산, 하다못해 외모까지도 월등했던 여자.

그녀의 첫째 딸인 아셀라 샤르투스의 인생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니, 희열에 몸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그것도 귀족들의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방법으로.

그야말로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지 않은가. 필립으로서는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수지맞는 장사였다.

‘혈통이라는 게 중요하긴 한 모양이지.’

후계자를 낳을 도구 정도로나 여기면서도 값은 제대로 치르려는 모양이었다.

‘그 반대여도 나쁠 건 없고.’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셀라를 아내로 인정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베네비토의 부와 인맥은 상상을 초월했다. 베네비토의 수많은 사업에 줄 하나라도 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대공의 인맥을 바탕으로 어쩌면 황가와도 긴밀한 연을 맺을 수 있을지 몰랐다.

‘황녀의 나이가 안토니와 비슷했었지, 아마.’

생각할수록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계산을 마친 필립의 머릿속에서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생각보다는 쓸모가 있는 계집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부터 미리 손을 써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필립이 안면에 힘을 풀고 비열한 입꼬리를 한껏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많이 아프진 않니? 아까 상처가 난 곳 말이다.”

별안간 사근사근해진 필립의 목소리에 아셀라가 흠칫했다.

필립이 이런 식으로 나올 때는 보통 두 가지 경우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거나, 아니면 체벌을 하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때.

그리고 지금은 필립이 조심해야 할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다.

아셀라의 몸이 작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떨리는 입술을 힘주어 눌렀다.

“아까는 내가 조금 심했던 것 같구나. 화가 나 홧김에 일을 저지른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려무나.”

“…….”

“서둘러 치료를 받는 게 좋겠어. 주치의에게 일러두마.”

그동안 몸이 아파 밤새 끙끙 앓아도 아셀라가 의사에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적은 손에 꼽았다.

병세가 아주 심할 때만, 혹여나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아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니 마지못해 불러주곤 했다. 채찍질 당한 상처 같은 건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상처가 아물면 신관을 부를 거다. 이참에 흉터도 깨끗하게 지우는 편이 낫겠지.”

물건에 흠이 있어서는 안 될 터이니, 생각하며 필립이 흡족하게 웃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9화

아셀라 역시 필립이 태도를 바꾼 이유를 짐작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몸에 남은 상처를 그 전에 없애려는 것이다. 흉한 모습을 칼릭스 베네비토에게 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

그 점은 아셀라로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곧 마담 에프로듀가 올 거다. 결혼식과 피로연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출 예정이니 준비하고 있거라.”

“……네.”

“아, 그리고.”

마침 생각났다는 듯 필립이 덧붙였다.

“필요한 게 있거든 뭐든 말하렴. 무엇이든 지원해 줄 테니 말이다.”

정말 이 말만큼은 너무도 우스워서, 아셀라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실소를 참아야 했다.

결혼 비용은 전부 베네비토 가문에서 부담하게 되어 있었으니까.

아셀라의 결혼처럼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될 경우, 결혼식은 신부의 집에서 치르나 예식 비용은 남자 쪽에서 부담했다. 신부가 지내게 될 방을 꾸미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대신 여성은 그에 상응하는 지참금을 가져갔다. 미리 이루어지는 일종의 재산 상속인 셈이었다.

가주가 여성이라 남편이 아내의 성을 따르게 될 경우는 이와 반대였다.

그러나 필립은 요즘 가문의 사정이 어렵다는 핑계로 지참금 지급을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결혼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베네비토 가문에서 받아냈다.

다시 말해 웨딩드레스, 식에 사용될 꽃과 장식, 피로연의 음식, 초대장 발송 등 모든 부대 비용을 전부 베네비토 가문에서 지출하게 된 것이다.

필립이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닌 덕분에, 사용인들을 통해 아셀라의 귀에까지 들어온 이야기였다.

‘수치도 모르는 인간.’

그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 줄도 모르고.

귀족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보통 한 쪽이 재혼이거나, 아니면 몰락 귀족이라 도저히 지참금을 준비하기 힘들 때였다.

가난한 가문의 셋째 아들이었던 필립 역시 이 탓에 거의 빈손으로 아델과 결혼했다.

그러나 아셀라의 혼사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명색이 제국의 후작 가문이다. 샤르투스의 이름을 가진 영애가 결혼하는데, 부담된다는 같잖은 이유로 지참금 하나 없이 비용을 상대방에게 모두 전가했다.

누가 보아도 뻔뻔하고 몰상식한 이야기가 알려지면 자연히 소문이 돌게 되는 것이다.

-팔려갔다.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게 숨겨줄 순 있었다. 아무리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한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였다.

귀족 사회에서는 명분이 제일 중요했고, 속사정이야 어떻든 드러나지만 않는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으니까.

아델이 남긴 막대한 재산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필립은 그 돈 몇 푼을 아끼겠다고 아셀라와 샤르투스 가문의 명예를 땅에 처박았다.

이는 이후 베네비토 대공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행동을 정당화해 줄 핑계가 될 것이다.

‘……괜찮아.’

필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기엔 너무도 늦어버렸다는 걸 안다.

칼릭스 베네비토 역시 필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체념 어린 푸른 눈이 방을 맴돌다가 문득, 테이블 위의 보석함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메리엘이라면…….’

아셀라는 얼핏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 티아라가 그녀에게 작은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성공한다면 메리엘의 처지가 조금이나마 나아질지도 몰랐다.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었다.

아셀라는 메리엘의 마지막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을 떠올리며 주먹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필립이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또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제국의 후작이자 가주였던 아델 샤르투스를 구워삶아 결혼까지 했던 필립이었다.

아직 새파랗게 어린 계집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필립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제법이더구나, 아셀라. 네 가치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셀라는 필립의 소름 끼치는 미소를 마주했다. 이유 모를 비웃음이 섞인 눈빛에 몸이 저절로 굳고 동공이 잘게 떨렸다.

독사 같은 필립의 눈이 아셀라를 천천히 훑었다.

제 어미를 닮아 얼굴은 반반한 계집이었다. 천하의 칼릭스 베네비토가 겨우 이 정도에 쉽게 넘어가진 않겠지만, 부부 사이는 또 모르는 일이다.

“설마하니…… 저 티아라를 믿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아셀라의 목이 턱 막혔다.

필립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당부처럼 들릴 목소리였다.

“그래, 예를 들면…… 남편의 체면치레를 호의로 착각하고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것과 같은 행동 말이다.”

무섭도록 상냥한 목소리로 읊어대는 말은 협박이었다.

“착한 내 딸아, 난 내일 당장 메리엘이 눈을 뜨지 못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단다.”

필립이 진득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

아셀라의 몸이 파드득 튀어올랐다. 작게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씨도 순식간에 짓밟혀 꺼졌다.

필립은 죽어가는 동물처럼 몸을 바르르 떠는 아셀라를 느릿하게 훑으며 입가에 잔혹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지 않아도 네가 떠난다니 마음이 적적해지던 참인데 말이야.”

“아, 아버지…….”

“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오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아셀라의 눈이 충격으로 파들거렸다.

메리엘. 하나뿐인 동생.

아셀라의 아픈 손가락이자, 그녀가 이 저택에서 반항 한 줌 못하고 필립의 손아귀에 틀어 잡혀 살아와야 했던 이유.

삼 년 전, 메리엘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에 필립이 불같이 화낸 적이 있었다.

‘이 쓸모없는 년! 그게 얼마짜린 줄 알고 깨뜨려!’

‘죄, 죄송해요. 아버지…….’

‘그만두세요!’

메리엘에게 필립의 손찌검이 날아오기 직전, 아셀라가 막아섰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그때만큼은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반항이었다.

‘만일 메리엘까지 때리신다면 절대 참지 않겠어요.’

‘참지 않으면?’

‘제가 언제까지…… 눈감고 귀 닫고 입 다물 거라 생각하세요?’

아무리 가문에서 아셀라의 입지가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나, 필수적인 사교계 활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귀족 사회에서 안토니를 마뜩잖은 시선으로 보고 있는데 함부로 움직일 순 없었다.

겉으로나마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가문에서 내보낼 방법을 찾다 보니 남는 건 정략혼뿐이었고, 그에 따라 아셀라의 데뷔탕트를 치르게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