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1)

그 전략은 매우 유효했다.

“메리엘 아가씨도 있잖아요?”

메리엘.

그 가여운 아이는 아직도 너무나 어렸다. 보잘것없는 그녀의 작은 보호막마저 절실할 정도로.

“아가씨, 몸을 이쪽으로 돌려보세요.”

아셀라는 소리 없이 발을 움직였다. 체념 섞인 몸짓은 거의 기계적이었다.

분명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자신의 몸 같지 않은 비현실적인 감각이 들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견뎠다. 견뎌야만 했으니까.

“자, 다 됐어요. 아주 예쁘네요.”

품평하듯 아셀라를 위아래로 훑은 하녀가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최대한 조심해서 소파에 앉으세요.”

“앉고 나면 가능한 한 움직이지 마시고요. 애써 바느질한 게 망가질 수도 있으니까.”

“아가씨도 흉한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녀들이 얼기설기 꿰매놓은 흔적들을 교묘하게 가리며 당부했다. 아셀라는 말없이 따랐다.

세상에는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셀라는 아주 가끔,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지곤 했다. 어머니를 기억할 때면, 그리고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한 어린 동생을 생각할 때면, 모래사막에 발이 푹푹 빠지는 것처럼 생각이 이어지질 못하고 침잠했다.

시간의 풍파 속에서 조금은 무뎌질 법도 한데, 그저 영원히 변치 않는 것도 있는 모양이려니 하였다.

“카단 경이 곧 오실 텐데, 잘하실 수 있겠죠? 가문을 위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메리엘 아가씨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아셀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바둥거려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수십, 수백 번의 시도와 고통을 거쳐 그 사실을 깨우쳤다.

……어차피 달라지지 않는 거라면.

아셀라는 눈을 감고 다가올 굴종을 준비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 * *

마침내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던 필립의 얼굴에 그제야 화색이 떠올랐다. 그는 얼른 응접실 문을 열어젖히곤 라이젠에게 소식을 전했다.

“딸아이가 준비가 다 됐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예. 다만 방에서 경을 뵙고 싶다고 하는군요.”

라이젠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필립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평소에는 건강한 아이인데 오늘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가지요.”

“손님을 오라 가라 하게 만들었으니 이것 참……. 모쪼록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라이젠이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과연 샤르투스 영애가 지금껏 했다는 그 ‘준비’라는 게 뭐였을지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그의 주군, 칼릭스 베네비토의 명으로 아셀라 샤르투스의 정보는 낱낱이 보고된 상태였다. 물론 그녀가 뿌리내리고 있는 샤르투스 가문의 정보 역시.

아셀라 샤르투스가 이곳에서 어떤 위치인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대공께 책을 잡히지 않으려는 필립의 의지 하나만큼은 칭찬해줄 만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필립이 직접 라이젠을 안내했다.

중앙 계단을 오르자 널찍한 복도가 이어졌다. 앞서가는 필립의 뒤에서, 라이젠이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알고 있던 길과 전혀 다른 탓이었다.

아셀라 샤르투스가 머무르는 방은 저택의 본관이 아니라 별관에 있었다.

잘 사용하지 않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구역, 그중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저기가 딸아이의 방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떠나고 나서 많이 힘들어했었거든요.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고 있답니다.”

필립이 본관의 가장 크고 좋은 방을 가리키자, 라이젠은 보이지 않게 실소했다.

어쩜 이자의 속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나 투명한지.

“각하, 카단 경. 오셨습니까.”

그들을 발견한 보좌관이 냉큼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몸을 돌려 문을 노크했다. 라이젠과 필립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아가씨, 후작 각하와 카단 경께서 오셨―”

“잠깐만.”

필립이 보좌관의 말을 막고는, 걸음을 옮겨 문 앞에 바짝 다가가 섰다.

‘잘 보여 나쁠 건 없지.’

기왕 라이젠을 여기까지 불러왔으니, 딸을 아끼는 자상한 아버지의 연기를 할 셈이었다.

아델이 살아 있었을 적 감쪽같이 후작가의 사람들을 속였던 필립이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 가물가물해지긴 했지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비열한 입꼬리를 한껏 들어 올렸다.

“아셀라, 나다. 들어가도 되겠니?”

꾸며낸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다정했다.

“…….”

그러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재차 노크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년이 왜 대답이 없어?’

필립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필립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그의 손놀림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라이젠은 필립의 표정 변화를 흥미롭게 지켜보며 상황을 관망했다.

“아셀라, 혹 준비가 덜 된 것이냐? 괜찮으니 솔직하게 말해보렴.”

“……아니에요.”

마침내 안에서 자그마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필립이 무심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멈칫하고는 라이젠의 눈치를 살폈다.

‘천만다행이군.’

라이젠의 시선이 문 쪽을 향한 것으로 보아, 다행히 보지 못한 듯했다. 필립은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사이좋은 아버지와 딸로 포장하려던 노력이 하마터면 무용지물이 될 뻔했다.

‘저놈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제대로 교육해야겠어.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필립이 소리 없이 이를 바드득 갈며 생각했다.

“그럼 들어가마.”

“……네.”

필립이 묵직한 문을 손수 열어젖혔다. 고가의 가구와 온갖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방으로 들어간 필립이 아셀라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똑바로 처신해.’

아셀라가 알아들었다는 듯 양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필립이 만족스럽게 입매를 당기며 뒤를 돌아 라이젠에게 말을 건넸다.

“이 저택에서 가장 좋은 방이지요. 제가 특별히…….”

그러나 라이젠은 필립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소파에 앉은 가냘픈 여자를 향해 지체없이 걸어갔다.

노골적인 무시에 필립이 눈을 치켜떴다. 분노로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후작가 사람들에게는 왕처럼 군림하는 그였지만, 칼릭스 베네비토 앞에서는 완벽한 약자였다. 심기를 거슬러 결혼을 파투낼 수는 없으니 참는 것 외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샤르투스 영애, 처음 뵙겠습니다.”

아셀라 앞으로 다가간 라이젠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자세를 낮추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6화

지금은 핍박과 멸시를 받고 있으나, 곧 주인의 하나뿐인 비가 되실 분이었다. 고개를 깊게 숙이며 예를 갖췄다.

“저는 라이젠 카단이라고 합니다. 대공 전하를 곁에서 모시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카단 경.”

라이젠이 고개를 들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은 아셀라를 보았다. 수척한 얼굴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짐작게 했으나 그럼에도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는 가히 귀족의 그것이었다.

“전하께서 영애께 약혼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라이젠이 가져온 상자가 하녀에게, 이어서 아셀라에게로 전해졌다. 그녀가 건네받은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근처에 서 있던 하녀들이 저마다 작은 탄성을 냈다.

금으로 만들어진 사각 보석함은 전면부는 물론이고 모서리까지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곳곳에 색색의 보석이 박혀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보석함이 저 정도라면 안의 내용물은 대체……!’

지켜보던 사람들이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필립조차 분노를 잊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아셀라의 손끝을 주시했다.

그러나 아셀라는 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셀라, 무얼 하느냐? 어서 열어보질 않고.”

필립이 기다리다 못해 아셀라를 재촉했다.

“맞아요, 아가씨.”

“안에 든 게 뭔지 확인해 보세요.”

“전하께서 특별히 준비해 주신 거라잖아요.”

하녀들이 필립을 도와 곁에서 맞장구를 쳤다. 아셀라가 말없이 느릿하게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쇠에 손을 뻗었다.

달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보석함의 뚜껑이 열리고, 내용물이 모두의 눈에 비쳤다.

“세, 세, 세상에!”

“설마……!”

안을 확인한 이들의 얼굴이 충격에 휩싸였다. 여기저기에서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녀들은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두 눈으로 오롯이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보석함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수백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티아라였다.

<여신의 영광>.

별도의 이름까지 붙었을 만큼 널리 알려진 가보 중의 가보, 제국의 보물.

다이아몬드 하나하나가 웬만한 장신구의 메인 보석이 되어도 충분할 만큼 엄선된 것들이었다. 티아라 뒤쪽 구석에 자리하는 다이아몬드조차도 최고급 원석이 사용되었다.

더군다나 불세출의 보석 세공 디자이너라 불리는 로젠의 작품이었다. 그는 디자인과 제작 과정 전체를 도맡아 진행하는 건 물론, 세공에 필요한 다이아몬드까지 일일이 직접 커팅했다.

티아라를 완성한 뒤, 로젠이 남긴 말 역시 유명했다.

‘이 티아라는 제 일생의 역작입니다.’

대대로 베네비토 가문의 안주인이 착용했던 아름다운 장신구가 이제 아셀라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결혼식 때 사용하라 하셨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아셀라가 담담하게 답했다.

티아라의 아름다움은 가히 놀라웠으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이 결혼에서 오가는 상품은 그녀 자신이라는 것.

이 호화로운 티아라 역시, 상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 리본일 뿐이라는 것.

그녀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한편, 필립은 믿기 힘든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여신의 영광을 보내올 줄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필립의 탐욕스러운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칼릭스 베네비토의 의중을 가늠해 보려 했으나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설이나 다름없는 티아라를 고작 저 계집에게 약혼 선물로…….’

조금 전 대공에게 받은 광산에서 백 년쯤 보석을 채굴해도 이 티아라 하나의 값어치만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다며.’

‘결혼식만 끝나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 알았더니?’

하녀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본들 이유를 알 턱이 없었다. 충격과 놀라움 속에서 소리 없는 말들이 정신없이 오갔다.

혼란의 도가니가 이어지는 와중,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필립이었다.

“아셀라, 뭘 하고 있느냐? 전하께서 이리 귀한 선물을 주셨거늘.”

“전하께 감사하다 전해주세요.”

아셀라가 곧바로 감사를 표했다. 더할 나위 없이 순종적인 태도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정중히 답한 라이젠이 다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샤르투스 영애.”

“말씀하세요.”

“다른 이들을 모두 물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 말에 아셀라가 고개를 살짝 들어 라이젠을 쳐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이 자신을 직시하자, 라이젠이 덧붙였다.

“말씀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영애께만 전달하라고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생각하던 아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나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필립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안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그에게로 향했다. 라이젠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물었다.

“필립 후작 권한 대행,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필립이 말끝을 흐렸다. 당황한 나머지 막아서긴 했는데 막상 할 말이 없었다.

“전하께선 영애의 공식적인 약혼자이십니다. 결혼 전에 긴히 전하실 말이 있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제가 대신 온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자리를 비켜주시죠.”

필립은 다급해졌다. 혹여나 아셀라가 라이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 불안이 치솟았다.

늘 매처럼 상황을 주시하고 뱀같이 교활하게 행동하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만 자제심을 잃고 말았다. 조급해진 나머지 그냥 되는대로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생각을 거치지 않은 경솔한 말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나왔다.

“세상 어떤 아비가 딸과 사내를 단둘이 한 공간에 둔단 말입니까!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일순,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질식할 것 같은 싸한 침묵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그제야 제 말실수를 깨달은 필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라이젠의 잿빛 눈이 싸늘하게 변하자 필립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 떨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산 채로 갈기갈기 찢어 삼킬 것 같은 눈빛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전신에 소름이 쭉 끼치고 등줄기에서 진땀이 흘러내렸다.

“지금껏 이런 모욕은 들어본 적이 없군요.”

오싹하리만치 가라앉은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저는 전하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후작 권한 대행께서 하신 그 말씀, 대공 전하를 욕보이는 것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그, 그런 건 아닙니다!”

필립이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대공의 귀에 이 이야기가 들어갈 것을 생각하자 살이 떨렸다. 차라리 칼 들고 협박하는 강도가 낫지, 칼릭스 베네비토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는 날엔 끝이었다.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을 느끼며, 필립이 재빨리 변명을 주워섬겼다.

“딸아이를 아끼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실언을 했습니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니 너그러이 넘어가 주십시오. 굳이 괜한 말을 전하께 전해 심려를 끼쳐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군요.”

라이젠의 눈이 슬쩍 휘어졌다. 그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마치 작게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곤 했다.

상대의 기색을 살피는 데 능수능란한 필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라이젠의 기분이 풀렸다고 멋대로 착각하고는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매끄러운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카단 경께서는 아직 자식이 없어 모르시겠지만, 부모가 되면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요. 아끼는 마음이 지나치다 보면 가끔 이렇게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곤 한답니다. 그러니 부디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찌나 그럴듯한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진심이라고 여길 모습이었다.

라이젠은 그 뻔뻔함에 속으로 차가운 비소를 흘리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전 일은 없던 것으로 하지요.”

필립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다행히 별문제 없이 지나갈 모양이었다. 이제 라이젠을 보낸 뒤 황궁에 가서 결혼 허가만 받으면 되었다.

계산을 끝낸 필립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과연 카단 경과는 말이 잘 통하는 것 같습니다. 전하와 제 딸이 결혼하고 나면 여러모로 자주 보게 될 터인데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그만 영애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필립이 약간의 비굴함마저 담아 건넨 말이었으나, 라이젠의 대답은 냉정했다. 필립이 당혹스러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예? 대화라니요. 분명 없던 일로 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대공 전하를 모욕하려는 뜻이 아니었다는 그쪽의 변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지, 영애와 대화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 그런 게 어디…….”

“아니면 제가 ‘오해’한 겁니까?”

말문이 막힌 필립이 입을 뻐끔거렸다.

여기서 대화를 막으면 자신은 꼼짝없이 대공을 모욕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선뜻 그러라고 답할 수도 없었다. 필립이 힐끗 아셀라를 쳐다보았다.

‘저게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지금이야 얌전히 앉아 있으나 또 모를 일이었다. 다시는 고개를 쳐들지 못하게 밟아놓아도,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쯤 꼭 한 번씩 성가시게 만들곤 했으니까.

‘이를 어찌한담…….’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 필립이 바지런히 머리를 놀리며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라이젠이 아니었다.

그는 필립이 더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말에 쐐기를 박았다.

“저와 영애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후작 권한 대행께서는 폐하께 결혼 허가를 받으러 다녀오시면 시간이 얼추 맞겠군요.”

“…….”

결국, 필립이 할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차를 준비해 드려라.”

꽉 말아쥔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분노가 치솟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필립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도 컸다. 아셀라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필립이 갑자기 우뚝 멈추어 서더니 뒤를 돌았다.

그 바람에 필립과 눈이 마주친 아셀라가 놀라 숨을 들이켜자, 그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라이젠은 필립을 등지고 앉아 있었기에 그를 볼 수가 없었다. 필립이 천천히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입 모양을 만들어냈다.

메, 리, 엘.

그 순간,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아셀라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지켜보며 필립이 입매를 휘었다. 더럽던 기분이 그나마 좀 나아지는 듯했다.

제 핏줄의 숨통을 쥐고 경고했으니, 감히 입을 함부로 놀리지는 않을 터.

필립이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도주하는 대공비 7화

하녀가 아셀라와 라이젠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차에서 풍기는 좋은 향기가 그나마 굳어 있던 공기를 풀어주었다.

아셀라는 무례하지 않을 정도로 라이젠을 응시했다.

시선을 바로 마주하지 않고 코끝을 바라보되, 관찰하는 듯한 인상은 주지 않도록.

‘이 사람이…… 카단 백작가의 가주였구나.’

카단은 베네비토의 대표적인 가신 가문으로, 전통적으로 뛰어난 기사들을 배출해 냈다.

‘빈틈이 없어.’

차는 물론이고 테이블 위에 놓인 어떤 음식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비열하지만 음식에 장난질을 치는 자들이 종종 있기야 했으니까. 독이나 자백제, 하다못해 수면제라도 들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 같으면 예의상으로라도 차 한 모금은 마셨을 텐데.’

거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이 어떤 성정의 사람일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자그마한 한숨을 내쉰 아셀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들려온 대답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없습니다.”

“……네?”

“전하께서 영애와 차 한잔을 다 마실 시간만큼을 머무르고 오라 명하셨습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셀라가 재차 물었다.

“어째서인지 여쭈어도 되나요?”

“그런 건 모릅니다. 명이 있었으니 따를 뿐입니다. 혹, 불편하십니까?”

“아니에요.”

짤막하게 답한 아셀라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아직도 그녀의 무릎 위에는 눈이 휘돌아갈 정도로 화려한 티아라가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결혼식 때 사용하라 하셨습니다.’

누군가에겐 예비 아내를 아끼는 남편의 애정이 담긴 선물로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낭만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도 아셀라가 잘 알았다.

이건 일종의 표식이었다. 자신의 소유물임을 알리는 표식.

철없이 들떠 좋아할 이유도, 과한 선물에 기뻐할 이유도 없다.

필립은 그녀더러 자리에 있지도 않은 대공에게 감사를 드리라 명령했지만, 아셀라는 자신이 어떤 반응을 하건 칼릭스 베네비토는 별 관심이 없으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

“…….”

한편, 라이젠은 아셀라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물론 주군의 명 때문이었지만 개인적으로도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건 아셀라 샤르투스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던 탓이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셀라 샤르투스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들이 많았다.

불행한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비운의 후작 영애, 아직도 능력을 각성하지 못한 샤르투스의 실패작, 후계자의 자리마저 빼앗긴 패배자…….

라이젠 역시 수많은 소문을 들었고, 대공의 명에 따라 막대한 정보를 입수해 왔다.

그러나 직접 본 아셀라는 라이젠의 생각과는 매우 달랐다.

그 어떤 소문도 그녀에 대해 온전히 말해주지 못했다.

오랜 학대로 체념이 몸에 깃들어 있었지만, 타고난 기품마저 앗아가지는 못했다. 반항 따윈 모르는 것처럼 유순하게 굴었지만, 어느 순간만큼은 눈빛이 반짝이곤 했다.

말수가 적지만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며, 행동은 조심스러워도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것이 아닌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눈치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용을 쓴 모양이지만, 예리한 라이젠의 눈은 이상하게 주름이 잡히고 얼기설기 꿰맨 허술한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냈다.

극도로 움직임이 없는 건, 바느질해 놓은 것이 뜯길까 싶어서일 것이다.

자신의 것도 아닌 옷을 억지로 걸쳤으니 우스꽝스러울 만도 한데, 아셀라 샤르투스가 입고 있으니 전혀 이상하질 않았다.

라이젠의 시선이 천천히 얼굴 쪽으로 올라갔다.

‘다친 건가. 그게 아니라면…….’

건조한 눈으로 티아라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입술이 터져 있었다.

깨끗하게 닦아 입술 화장을 해 감추려 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였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한 눈빛을 하고서도 곧은 자세는 흔들림 하나 없다.

라이젠은 모른 척 시선을 뗐다가, 이내 저답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모든 것을 감내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애.”

의외의 말에 아셀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물며 곧 대공비가 되실 이라면 말입니다.”

아셀라는 대답하지 않고 한동안 침묵을 고집했다.

찻잔 속의 찻물이 그대로 식을 때까지.

그러다 라이젠이 떠날 시간이 되어 몸을 일으켰을 때, 마침내 그 무겁던 입술을 떼었다.

“……말씀, 고맙습니다.”

작지만, 차분하고 또렷한 말투였다.

* * *

같은 시각. 황제의 집무실.

“칼릭스가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일을 벌였군. 그 많은 가문 중에서 하필이면.”

하르메니아 제국을 이끄는 황제, 페르난데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옆에 서 있던 이에게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던컨, 너는 이걸 어떻게 생각하나?”

던컨 리사크. 자작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오로지 뛰어난 검술 실력만으로 황제의 최측근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오랜 시간 황제의 곁에서 일한 연륜으로, 던컨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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