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1)
  • 어느새 순응하고 체념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이 저택이 그녀를 감시하고 옭아매는 감옥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갈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나 익숙해져 버려 다른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알았다.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은, 오직 결혼뿐이라는 것을.

    아셀라는 자신의 하나뿐인 구명줄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끝이 절대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의 정략혼이라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절망하는 와중에도 무자비한 채찍질이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해 주마.”

    “…….”

    “어서.”

    상냥한 말투와는 정반대로 채찍질이 거세졌다. 얇은 실내복은 아셀라의 아픔을 조금도 줄여주지 못했다. 짐승의 털을 꼬아 만든 채찍은 단단하고도 질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이 해지다 못해 찢겨 나갔다. 그런데도 아셀라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호라. 오늘은 꽤 오래 참는구나.”

    “…….”

    “하지만 과연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으윽……!”

    수십 번의 채찍질이 가해진 등허리의 천이 처참하게 너덜거렸다. 부어오른 살이 터지고 벌어진 상처의 틈으로 피가 흘러 엉망이 된 옷을 적셨다.

    이 끔찍한 기분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리라고, 아셀라는 생각했다.

    “윽……!”

    “어서 대답해!”

    아셀라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견뎌왔는데, 결국 종착점은 다른 이름의 지옥이었다니. 적어도 자신의 입으로 기꺼이 가겠노라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가소롭다 한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그제야 자비 없이 내리쳐지던 채찍질이 멈추었다.

    필립이 인상을 구기며 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내 따로 부름이 있을 때까진 방해 말라 일렀을 텐데?”

    “죄송합니다, 각하! 베네비토 가문에서 사람이 왔기에…….”

    “대공가에서?”

    “예. 아가씨의 결혼과 관련하여 상의할 내용이 있다 합니다.”

    “미리 연락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필립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의 돈줄과 목줄을 쥔 칼릭스 베네비토였다.

    아셀라와 문가를 번갈아 보던 그가 결국 채찍을 바닥에 내던졌다.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눈이 바닥에 쓰러져 있다시피 한 아셀라를 노려보았다.

    “독한 년.”

    이마에 맺힌 땀을 꼼꼼하게 닦아낸 필립이 더러워진 손수건을 아셀라에게 내던졌다.

    기진맥진해진 아셀라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어 가느다란 숨만 힘겹게 색색거렸을 뿐이었다.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던 필립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문고리를 붙잡고 돌리기 직전, 뒤를 돌아보며 기어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다들 못 가서 안달 내는 자리를 쥐여줘도 불평하는 꼴이라니. 엎드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쾅, 문이 닫혔다.

    아셀라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지옥에 살게 만든 악마가, 또 다른 악마의 손에 자신을 쥐여주면서 감히 감사를 입에 담았다.

    울컥, 토기가 치밀었다.

    “욱!”

    아셀라는 바닥에 엎드려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먹은 게 없어 신물이 올라오는 게 고작이었다.

    한참이나 경련하듯 바닥에서 꿈틀거린 후에야 구역질이 멈추었다.

    감사라니.

    피할 수 없는 비참함이 몰려들어, 아셀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샤르투스 후작 성의 응접실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전하께서 인품이 대단하시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이렇게나!”

    필립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다 풀려 있었다. 불과 십여 분 전만 해도 분노에 차 있던 그는 온데간데없었다.

    라이젠 카단 백작. 칼릭스 베네비토의 최측근이자 대공가의 가신인 그가 전한 소식 덕분이었다.

    “그 말씀을 전하러 이곳까지 직접 와주셨다니, 이거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심지어 비굴하리만치 손을 비비며 눈치를 살피기까지 했다. 그러나 라이젠은 표정 없는 얼굴로 무뚝뚝하게 답했다.

    “이 결혼을 고대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고저 없는 말투였다. 필립은 앞에 앉은 사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라이젠 카단은 자신이 어떻게든 잘 보여 점수를 따야 할 자였다.

    “물론입니다!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으니 전하께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 전해주십시오.”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알게 되실 겁니다. 후작 권한 대행께서 정말 그렇게 하신다면 말이지요.”

    그 말에 필립의 속이 뒤틀렸다.

    ‘이 건방진 새끼가……!’

    샤르투스 후작가의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조차 필립 앞에서는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뒤에서는 뭐라고 욕을 하든, 후작 권한 대행이라는 표현을 대놓고 말하는 자는 없었다.

    아주 극소수 일부를 제외하면.

    애석하게도 베네비토 대공은 그 일부에 속했다.

    필립은 자신과 신분이 비슷하거나 높은 이들이 그렇게 부르는 건 어떻게든 참아 넘겼다. 참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겨우 대공가의 가신 따위가 그 표현을 입에 올리는 건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만일 라이젠 카단이 칼릭스 베네비토의 최측근이 아니었다면 이미 따귀 한대를 올려붙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게다가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라고? 기분 나쁜 놈 같으니.’

    한마디로 필립의 요청을 묵살하겠다는 의미였다. 모욕적인 언사에 필립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지만, 라이젠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문서가 그의 이성을 붙잡았다.

    필립이 초월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보잘것없는 제 딸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하다 하셨습니다.”

    구겨졌던 필립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펴졌다.

    ‘이게 당연하다니! 잘만 하면 더한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잖아!’

    필립이 재빨리 얼굴 가득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그의 예상대로였다. 베네비토 대공가와의 혼사는 그야말로 노다지나 마찬가지였다.

    ‘황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광맥이나 다름없어!’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할 만큼 짜릿해졌다. 결국엔 참지 못하고 제 탐욕스러운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런데 혹시, 채굴량은 얼마나 됩니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기왕 이리된 거 시원한 대답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서류에 적혀 있으니 읽어보시지요.”

    “아, 아아! 그렇군요!”

    그제야 필립이 서류뭉치를 집어 들고는 재빨리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껏 체면을 차리느라 못 보았을 뿐, 아까부터 확인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오, 오오……! 정말 굉장하군요! 이렇게나 많이…….”

    필립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연간 채굴되는 보석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한 문서에 다다라서는 거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추잡한 인간 같으니.’

    라이젠은 그 모습에 비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족의 고상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기야 물욕에 눈이 멀어 양딸을 팔아먹은 자이니 설명해 무엇할까.

    ‘겨우 이런 작자가 샤르투스 가문을 통째로 집어삼킨 건가.’

    샤르투스는 제국의 건국 공신 가문이었다. 그 드높은 위상과 유서 깊은 역사는 어떤 가문도 따라오기 힘들었다. 매 세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능자를 배출해 온 가문이기도 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라이젠이 쓰게 웃었다.

    필립이 어떻게 샤르투스 후작가를 손에 넣었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어리석고 무능하면서 탐욕스럽기까지 한 인간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행운도 얼마 남지는 않았다만.’

    라이젠이 입매를 팽팽하게 당겼다.

    그는 지금부터 자신이 여기에 온 진짜 목적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정신없이 서류를 읽던 필립이 라이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떠올랐던 경멸을 능숙하게 감추며, 라이젠이 입을 열었다.

    “샤르투스 영애를 뵙고 싶군요.”

    도주하는 대공비 4화

    필립은 당황했지만, 짐짓 괜찮은 척 얼굴색을 꾸몄다.

    “갑자기 제 딸은 왜 찾으시는지?”

    “전하께서 샤르투스 영애에게 보내신 약혼 선물을 전해야 하니까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에 필립이 입술을 짓씹었다. 약혼 시기에 결혼 상대에게 예물을 보내는 건 일종의 관례였으니 딱히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하필이면!’

    필립은 자신에게 닥친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아셀라를 체벌한 것을 후회했다.

    그간 아셀라의 외출을 막고 저택에 가두다시피 했으니 여기에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아셀라를 상대로 청혼서를 넣은 연유가 뻔했던 탓이다.

    혈통 좋은 후계.

    후계를 위한 목적으로 데려올 여자가 몸이 나쁘다는 말을 들으면 이 결혼은 없던 일이 될지도 몰랐다.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사용을 했어도 반품하고자 하는 게 사람 심리인 것을, 하물며 구입 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미혼 귀족에게 파혼은 썩 좋은 모양새가 아니지만, 칼릭스 베네비토라면 파혼을 열 번쯤 한다 한들 전혀 문제 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필립이 할 수 있는 대답 역시 정해져 있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황급히 응접실 밖으로 나간 필립이 문밖에서 대기 중이던 제 보좌관을 찾았다.

    “각하, 벌써 일이 다 끝나신 겁니까?”

    “당장 아셀라를 데리고 와!”

    소리죽인 명령에 보좌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바로 말씀입니까? 갑자기 아셀라 아가씨는 왜…….”

    필립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두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가, 각하…….”

    “라이젠 카단이 그 계집을 만나야겠다고 버티고 있어. 대공이 보낸 약혼 선물을 직접 전하겠다면서 말이다.”

    필립이 입술을 질근질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아마 제 방에 있을 거다. 적당히 치료해서 데려와. 라이젠 카단이 눈치채서는 안 되니까.”

    그러나 보좌관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필립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이냐?”

    “아가씨에겐 손님을 맞을 만한 옷이 없지 않습니까.”

    순간, 필립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아셀라 앞으로 들어가는 돈이 아까워 제대로 된 실내용 드레스 한 벌 사주지 않았다. 그동안은 아셀라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으니 문제 될 일이 없었다.

    “빌어먹을.”

    대외적으로 그는 고상한 귀족이자 둘도 없는 좋은 아버지인 척 연기하고 있었다. 라이젠 카단 앞에 아셀라를 거지 같은 꼴로 내보일 순 없었다.

    필립의 비상한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레베카의 옷을 가져다 입혀.”

    “예?”

    보좌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레베카는 필립의 오랜 애인이었다.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해 그동안 차일피일 미뤄왔지만 안토니가 무사히 후작위를 승계하고 나면 결혼할 예정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을 뿐, 레베카는 이미 후작저에서 제일 좋은 방을 자신의 취향대로 꾸며놓고는 저택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었다.

    희게 질린 보좌관이 더듬더듬 말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레베카 님이…….”

    “입 다물고 당장 가져와!”

    필립이 신경질적으로 말허리를 잘랐다.

    레베카가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제 앞에서 아셀라가 입었던 드레스를 북북 찢어버릴 레베카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어떻게 자기에게 이럴 수 있냐며 징징대겠지.’

    생각만 해도 짜증스럽고 성가신 일이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오늘 레베카가 찾아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레베카에겐 내가 알아듣게 설명할 테니까 일단 입혀.”

    성질이 괄괄하긴 해도 아둔한 여자였다. 듣기 좋은 달콤한 말을 적당히 속살거려 주면 금세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었다.

    “각하, 그렇다 해도 사이즈가 맞지 않을 겁니다.”

    레베카는 아셀라보다 키가 한 뼘 정도 더 컸고 몸매도 풍만한 편이었다. 레베카의 옷이 자그마한 체구의 아셀라에게 맞을 리가 없었다.

    “일단 가져와서 대 봐. 대충이라도 맞으면 그만이니.”

    필립이 윽박지르자 보좌관이 얼른 허리를 숙이고는 허둥지둥 뛰어갔다.

    ‘혹시 모르니 내가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겠어.’

    필립이 입술을 짓씹으며 아셀라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은 저택의 가장 외진 곳에 있었다. 커다란 나무가 창문을 가려 제대로 햇볕도 들지 않는 작고 초라한 방이었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복도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바닥을 구르던 뭉친 먼지가 바지 밑단에 들러붙었다. 필립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짜증 나는군.”

    그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결혼은 거래였다. 사람을 사고파는 거래. 조율은 끝났고 받을 건 다 받았다. 이제 남들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적당히 식을 열고 아셀라를 넘기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답지 않게 약혼자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건지.”

    칼릭스 베네비토의 입장에서는 값을 다 치른 셈이었으니, 굳이 예물까지 줄 이유가 없었다. 왜 이런 귀찮은 일을 벌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구시렁거리던 필립의 눈에 아셀라의 방이 보였다. 하녀들이 레베카의 옷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 뒤, 하녀 하나가 방에서 나오더니 어두운 얼굴로 필립에게 고했다.

    “각하, 옷이 맞질 않습니다.”

    레베카는 자신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 화려하고 노출도 높은 드레스를 선호했다. 그녀에게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으나 다른 이가 입기에는 퍽 어려운 옷이었다.

    필립이 이를 악물며 명령했다.

    “줄이든지 잘라내든지 어떻게 해서든 맞춰.”

    “각하, 하지만…….”

    무어라 대꾸하려던 하녀는 필립의 살기 어린 눈을 마주하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옷이 크니 밑단이며 소매를 줄이고, 앞섶이 많이 파여 있으니 꿰매 여미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하녀가 바느질 도구를 찾으러 급히 뛰어나갔다.

    필립이 어금니를 질끈 깨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끝까지 성가시게 구는군.’

    아델의 두 딸은 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하나는 아직 어린 데다 먼 곳으로 보내버려 그나마 덜했지만, 아셀라는 볼 때마다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외딴 수도원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치솟았다.

    차마 그리하지 못한 건, 그랬다간 귀족들의 질타가 쏟아질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아셀라의 방문을 바라보는 필립의 눈에 초조함이 감돌았다.

    ‘이번에만 어떻게든 무사히 넘기면 돼.’

    결혼식까지는 고작해야 한 달이었다. 그리고 아셀라의 결혼과 동시에 안토니의 가문 승계는 기정사실이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결혼을 성사시켜야 해.’

    샤르투스 후작가는 그의 아들이 물려받아야 했다. 그리고 안토니의 가장 큰 장애물은 아셀라 샤르투스였다.

    그녀에겐 안토니가 갖지 못한 정통성이 있었다. 아델이 죽기 전까지는 후계자로 교육까지 받았으니 필립으로선 가장 경계해야 할 상대였다.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가차 없이 짓밟았다. 마땅히 누려야 할 것조차 철저히 박탈하고 집안의 모든 대소사에서도 일부러 배제했다.

    그러나 제국의 고매한 귀족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중시하는 건 핏줄의 계보였다. 그 빌어먹을 핏줄의 정통성 탓에 안토니의 위치는 아직도 견고하지 못했다.

    필립이 아셀라의 결혼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각하.”

    “어찌 되었느냐.”

    “대충 그럴듯하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녀의 보고에 필립이 입매가 만족스럽다는 듯 휘어졌다.

    “좋아. 이제 레베카의 방으로 데려가서 최대한 빨리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는 하녀를 필립이 불러세웠다.

    혹여 아셀라가 라이젠 카단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필립이 메리엘의 목줄을 쥐고 있는 한 함부로 경거망동하진 않겠지만 방심해선 안 됐다.

    게다가 조금 전 과한 훈육을 해두었으니 더 제대로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년이 허튼소리 안 하게 입단속 철저하게 시켜. 쥐새끼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예, 각하.”

    필립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2. 결혼의 이유

    아셀라는 초점 잃은 멍한 눈으로 멀거니 서 있었다.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정도로 두통이 몰려왔고, 얻어맞은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말도 못 했다. 진통 효과가 있다는 약을 발랐는데도 등이 욱신거렸다.

    “아가씨, 가만히 계셔 주시겠어요?”

    아셀라의 몸이 작게 휘청이자, 가슴 부분의 프릴을 여미던 하녀가 곧바로 차갑게 일갈했다.

    그녀는 이름 모를 하녀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몇 번 얼굴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뿐, 레베카의 하녀들이라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다.

    “…….”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풀면 그대로 고꾸라져 버릴 것만 같아, 자꾸만 흐려지려는 정신을 힘겹게 붙잡았다.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써 발끝에 힘을 주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입술을 깨무는 아셀라를 보며, 하녀가 입꼬리를 당겼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 비싼 드레스에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소매를 손보고, 치맛단을 줄이던 다른 하녀들의 조롱이 이어졌다.

    “잠깐 쓰고 나서 버려야 할 텐데 아깝기도 해라.”

    “고급스러운 드레스가 죄 망가지겠어요. 볼품없게.”

    “참, 아가씨가 볼품없다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하녀들의 입에서 무례한 언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어떻게 보아도 후작가의 영애에게 할 수 있는 언행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아셀라는 묵묵히 모욕적인 말을 감내했다.

    어차피 얼마 후면 보지 않을 사람들이다.

    샤르투스에 충성했던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이미 쫓겨난 지 오래였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필립의 입맛에 맞는 이들로 교체되었다.

    “아!”

    따끔한 바늘이 손목을 찔렀다. 프릴을 줄이고 있었기에 바늘은 적잖이 두꺼웠다.

    “아가씨, 생각보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이게 뭐 별거라고.”

    “원래 잘 참으신다고 들었는데.”

    “채찍으로 맞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아셀라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내려 바늘에 찔린 손목을 응시했다. 찔린 살갗 위로 작은 핏방울이 올라왔다. 하녀가 방울 맺힌 피를 거칠게 닦아낼 때까지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말한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들의 말대로, 채찍의 고통에 비하면 괜찮았다.

    아셀라에게서 반응이 없자, 하녀들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도주하는 대공비 5화

    “역시, 괜찮으신 모양이네요.”

    교묘한 괴롭힘이 이어졌다. 바늘이 계속해서 몸의 곳곳을 찔렀다. 보이는 곳은 얕게 찔러 상처나 흔적이 남지 않게 했고, 보이지 않는 곳은 조금 더 깊게 찔러댔다.

    “죄송해요. 많이 아프신가요?”

    “실수였어요. 네 번 정도 같은 곳을 찌르긴 했지만.”

    “하지만 아가씨라면 견딜 만하실 거예요. 그렇지요?”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아셀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 그들을 응시했다.

    만일 눈을 감는다면, 이 소란도 고요해질까.

    아랫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권력의 구조에 민감한 법이다.

    사용인들이 아셀라에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데에는 필립의 암묵적인 허락이 있었다.

    아셀라는 가끔 자신이 손발이 묶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리오네트와 똑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는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까지도.

    ‘메리엘을 생각한다면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할 거다.’

    ‘가문을 위해선 무슨 선택을 내려야 할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필립의 수많은 협박이 귓가를 윙윙 맴돌았다.

    먹은 것 하나 없는데도 속이 메슥거렸다. 하녀들의 말소리가 이명처럼 멀게 느껴졌다가 다시 커지길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아, 아셀라는 입안의 여린 살을 깊게 깨물었다. 비릿한 향이 입안에 감돌고 나서야 지끈거리던 머리가 그나마 맑아지는 듯했다.

    그러기를 한참, 이 정도쯤은 참을 수 있다고, 괜찮다고 여길 때였다.

    “윽…….”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등의 상처를 누군가가 일부러 바늘로 쿡 찔렀다. 드레스를 입기 위해 약을 바르고 마른 천을 덧대어 붕대를 감아놓은 자리였다.

    정수리가 찌릿하고 몸의 털이 바짝 서는 감각에, 아셀라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익숙하게 무표정한 얼굴 뒤로 아픔을 감춘 뒤 허리를 곧추세웠다.

    “…….”

    허울 좋은 이름뿐이라 한들, 그녀는 샤르투스였다.

    제국이 세워질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영광스러운 이름.

    지금의 처지가 어찌 되었든, 아델이 살아 있을 적엔 후계자 교육까지 받았던 그녀였다. 시간이 흐르며 많은 것이 풍화되어 흐려졌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한 것도 있었다.

    ‘샤르투스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것.’

    이를테면 태어날 때부터 뼛속 깊이 각인된 가문에 대한 긍지와 애정 같은 것.

    아셀라는 고통으로 떨리는 입술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더했다.

    머릿속을 울리는 두통과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생각하면서.

    길어지는 침묵은 그 탓이었다.

    입을 열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깊은 무의식에 묻어놓았던 비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잘 참으시네요, 아가씨.”

    하녀가 아셀라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몸을 기울이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속살거렸다.

    “그래야죠. 샤르투스 가문을 위한 일인데요.”

    어머니가 남기신 이 가문을 위해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 없는 남자에게 팔려가듯 하는 결혼.

    “이런 것쯤은 기쁘게 받아들여야죠.”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등에 칼을 꽂는다.

    마음속 골이 깊게 팬 흉터가 다시 찢기고, 벌어진 틈새로 무언가가 붉게 흘렀다.

    “겨우 이 정도도 제대로 못 해내시면, 돌아가신 선대 후작 각하께서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잔인한 말이었다.

    이제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반응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심장이 다시 아픔을 호소했다. 수십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심장을 난타당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질끈, 눈을 감았다.

    “가문을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세요, 아가씨.”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셀라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았다. 필립 덕분이었다.

    죽은 선대 후작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아셀라는 대꾸 한 번 제대로 못 했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본 사용인들은 필요할 때마다 자신들도 써먹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