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Z 갠소/공금
#선결혼후연애 #학대받은여주 #도망여주 #후회남주 #관계역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양아버지로부터 학대받던 아셀라.
그녀는 강제로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그녀의 어머니를 죽인 남자였다.
아셀라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칼릭스에게서 도망치려 한다.
칼릭스는 자꾸만 이는 낯선 감정을 부인하면서도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아셀라를 붙잡아 곁에 두려 하는데…….
“난 놓아줄 생각이 없어. 그러니 당신이 포기해.”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의 소용돌이 속, 그들이 품고 있던 비밀이 벗겨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도주하는 대공비 1화
프롤로그
“헉, 허억……. 헉…….”
아셀라는 살기 위해 달렸다.
조각달마저 가려진 칠흑 같은 밤이었다. 어두운 산길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친 나뭇가지와 뾰족한 가시덤불을 맨손으로 헤치고 지나가면서도, 그녀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이미 찔리고 베인 상처로 그득했지만, 그저 달리고 또 달리면서 한 가지만을 생각했다.
‘도망쳐야 해.’
적막이 내려앉은 숲속에는 그녀의 헉헉대는 숨소리와 작은 발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그러나 아셀라는 확신했다.
남편인 칼릭스 베네비토 대공.
그가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대공이 보낸 자객들이 소리도 흔적도 없이 그녀를 뒤쫓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는 것이 고작이었을 여자의 몸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당장에라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점점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에 정신을 차리는 것마저 힘들었다. 험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린 다리가 지독한 고통을 호소하며 느려졌다.
그러나 아셀라는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춘다는 건, 곧 죽는다는 거니까.
‘안 돼…….’
무리한 다리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크게 꺾였다. 아셀라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그 충격에 느슨히 묶었던 긴 은발이 풀려 바닥에 흩어졌다.
‘어서 일어나야…….’
아셀라는 젖은 솜처럼 늘어진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넘어지며 입은 충격 탓인지 몸 곳곳에 강한 통증이 일었지만 지체할 새가 없었다. 이 순간에도 추격대는 포위망을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제발…….’
그러나 신은 아셀라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했다.
‘……!’
가까스로 상체를 바로 세운 그녀는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주변에는 온통 흑색 제복을 입은 자들이 서 있었다.
신발도, 얼굴을 가린 천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두 눈뿐이었지만 그마저도 짙은 어둠에 가려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웠다.
아셀라는 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르메니아 제국의 신민이라면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질린다는 암흑가 ‘카르마’의 암살단.
그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끔찍한 두려움이 일며 가냘픈 몸이 잘게 떨렸다.
설마 추격을 위해 카르마를 보냈을 줄은.
“…….”
그러나 암살단은 기껏 아셀라를 찾아 놓고도 미동도 없었다. 하다못해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진 적요한 숲에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기를 잠시, 검은 형체들이 길을 내듯 양옆으로 물러서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셀라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
서늘한 목소리에 그녀의 푸른 눈이 파르르 떨렸다. 진득한 공포가 목덜미를 잡고 내리눌렀다.
여기서 볼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사람. 보아서도 안 될 사람.
무엇보다도……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
“아…… 아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지워졌다. 말이 되지 못한 불분명한 신음만이 겨우 새어 나왔다. 간신히 부여잡았던 이성이 한도 끝도 없는 무저갱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사흘이라.”
한 폭의 삽화 같은 아름다운 얼굴은 표정 없이 무미건조했다. 단지 맹수의 눈처럼 형형한 안광만이 핏빛으로 번득였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을 짓누르는듯한 압박감에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모든 일엔 끝이 있게 마련이지.”
도망쳐 봐야 소용없다고, 그러니 이제는 그만 포기하라는 선고. 아셀라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눈앞의 세상이 일그러졌다.
“…….”
아셀라에게 다가가기 전, 칼릭스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려 신음성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모습이 꼭 맹수에게 목이 붙들린 사슴 같았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바람을 들어줄 순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칼릭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셀라의 코앞까지 다가간 그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며 몸을 낮추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붙이자, 아셀라가 화살 맞은 새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셀라 베네비토.”
“…….”
“산책은 끝났다.”
말을 마친 칼릭스가 대답조차 못 하는 아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늘 고요한 호수를 연상시키던 푸른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처럼 하얗던 피부는 이제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얼마나 깊게 깨물었는지 아랫입술은 터져 핏방울마저 맺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은 칼릭스가 엄지로 아셀라의 입술을 훑듯이 쓸었다.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친 아내를 잡으러 온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칼릭스는 개의치 않았다. 조심스럽지만 말끔하게 입가에 맺힌 핏방울을 전부 닦아냈다.
“돌아가지.”
칼릭스가 몸을 깊게 숙여 아셀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미간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여전하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대체 이 가냘픈 몸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 정도로 절박했던가.’
떠오른 생각에 칼릭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찢기고 더럽혀진 아셀라의 옷가지에 닿았다.
구두는 온데간데없었고 질척한 흙에 엉망진창이 된 스타킹은 죄다 올이 나가 있었다. 팔목과 목 등 드러난 피부는 긁힌 상처로 성한 데가 없었다.
그렇게나 제가 싫었던가.
이렇게 약한 몸으로 이 험한 산을 넘으려 했을 만큼. 이렇게 다쳐가면서까지 도망쳐야 했을 만큼.
아셀라를 안아 든 팔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도, 칼릭스는 아내를 놓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셀라 베네비토는 그의 여자였다. 명실상부한 그의 아내였다.
돌아가면 어떻게 할까.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감히 이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그러나 위험한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흣…….”
들려온 소리에 고개를 내리자, 아셀라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몸을 바르작대고 있었다. 칼릭스가 순간적으로 힘을 주는 바람에 억세게 붙잡힌 몸이 아픔을 느낀 탓이었다.
그가 얼른 팔에 힘을 빼고는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싫…….”
“잠을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당황한 아셀라가 황급히 몸을 떼어내려 했지만 칼릭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되려 더 단단히 붙든 통에 두 사람의 몸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아셀라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아내의 반응에 칼릭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여정이 고단했던지 얼굴이 해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냘픈 몸이 더 여윈듯했다. 아마 도주하는 내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리라. 지금까지 버틴 게 용했다.
“성에 도착하려면 한참은 걸릴 테니 좀 자둬.”
“…….”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칼릭스는 아셀라의 몸에서 점점 힘이 풀리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눈꺼풀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아래로 감겼다. 그의 가슴팍에 자연스레 아셀라의 머리가 기대어졌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아셀라는 깊은 무의식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
칼릭스가 기절하듯 잠든 아셀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규칙적으로 색색이는 여자의 숨소리가 옅었다.
‘아셀라 베네비토.’
그의 붉은 눈이 깊게 침잠했다.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희미한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산을 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막상 엉망인 몰골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여자를 마주하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고 말았다.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일단은…….’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모든 것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놓은 뒤, 이후의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아셀라를 품으로 단단히 끌어당긴 칼릭스가 걸음을 옮기자, 카르마의 일원들이 일제히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녀가 몇 시간을 헤매며 힘겹게 올랐던 산길이었건만 그가 내려가는 데는 불과 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산길 초입에 준비된 마차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 중이던 베네비토 가문의 병사들이 허리 숙여 깍듯하게 주인을 맞이했다.
칼릭스가 짧게 명했다.
“성으로 돌아간다.”
도주하는 대공비 2화
1. 원치 않는 결혼
샤르투스 후작가의 적장녀, 아셀라의 혼처가 결정된 건 베네비토 대공의 청혼서가 도착한 지 정확히 하루 만이었다.
그녀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가문의 위신을 최소한이나마 세우기 위한 처사였다.
아셀라는 이른 아침부터 양아버지인 필립의 부름을 받고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가, 단 한마디의 사전 언질도 없이 결혼을 무작정 통보 당했다.
그녀는 필립을 똑바로 보려 애쓰며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덜덜 떨리는 턱에 힘겹게 힘을 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 아직 결혼할 준비가…….”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다, 다른 혼처도 알아본 후에…….”
신음처럼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네게 들어온 청혼서는 베네비토 가문에서 온 것뿐이다.”
“…….”
가문을 이을 자격을 잃고 후계 위에서 밀려나면서, 아셀라도 정략혼만큼은 각오했었다.
혼기가 찬 귀족가의 영애와 영식들은 격이 맞는 가문을 찾아 혼담을 주고받았고, 그녀 역시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여겼다.
하나, 적어도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한때 샤르투스의 후계자였던 아셀라를 원하는 가문은 적지 않았다. 필립이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내세운 안토니는 아직 정식으로 가문을 승계하지도, 혼인하지도 못했다.
불명예스러운 말들이 이름 뒤에 따라붙는다 한들, 아셀라는 여전히 선대 샤르투스 후작이었던 아델의 첫째 딸이었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었지만 아직도 귀족들은 아셀라가 소가주의 자격을 잃은 일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더불어 가문의 먼 핏줄이라는 안토니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했다. 샤르투스엔 공식적으로 방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채 열 살이 되지 못한 나이였으나, 둘째인 메리엘 샤르투스도 있었다.
안토니를 손수 데려와 양자로 삼은 필립은 그런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격분하여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내던지고는 했다.
필립의 화풀이 대상은 대부분 아셀라였다. 그럴 때면 그녀는 도망도 치지 못하고 꼼짝없이 양아버지의 잔인한 폭력을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사용인들은 사실상의 가주인 필립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사렸다.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필립의 행위에 동참하기도 했다.
필립의 괴롭힘은 잔인할 정도로 집요했다. 폭언과 폭력으로 점철된 학대가 무려 칠 년간 지속 되면서, 아셀라는 타고난 빛과 생기를 잃어갔다.
누구보다도 반짝이던 푸른 눈은 어느새 체념의 빛을 띠었고, 자유분방하게 저택을 누비던 아이는 필립의 뜻에 따라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숙녀로 자라났다.
이 모든 일이 아셀라의 어머니, 아델 샤르투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녀가 열 한 살 때의 일이었다.
필립은 아델이 죽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선한 인간인 척했던 가면이 벗겨지고 나자, 남은 건 자격지심과 심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남자였다.
후작 권한 대행의 자리를 꿰찬 그는 아델의 죽음이 아셀라와 관련이 있다며 강제적으로 그녀의 후계 위를 박탈했다.
아셀라가 샤르투스의 장녀에게만 대대로 전해지는 능력을 그때까지도 발현하지 못한 것 역시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녀는 양아버지에게 모든 권리를 빼앗기면서도 제대로 대항조차 못 했다. 샤르투스 후작가에 오래도록 충성해 온 몇몇 가신이 들고일어나 이 불합리한 처사를 반대했으나, 필립의 처절한 보복이 이어진 뒤로는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사실, 아셀라는 이제 와선 그때의 자신이 더 나이가 많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거라 여겼다.
오랜 학대는 그녀가 체념에 익숙해지도록, 좌절에 무뎌지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어서.
“……보여주세요.”
“뭘 말이냐?”
“제게 청혼서를 보낸 다른 가문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필립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자신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만 같은 두려움을 애써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번 페일렌트가의 파티에서, 페일렌트 영식이 제게 직접 말했어요.”
“뭐?”
“청혼서를 보냈노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달라고요.”
“영식이 착각한 거겠지.”
필립은 이제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아셀라는 분노가 아니라 되레 공포를 느꼈다.
입안이 바짝 마르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꽉 부여잡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아버지, 저는 제게 온 청혼서를 볼 정당한 권리가 있어요.”
“하! 뭐라? 권리?”
“……아시잖아요.”
물론 혼처는 가문이 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르메니아 제국에서는 결혼 당사자들에게도 자신의 결혼에 대한 최소한의 선택권이 있었다.
청혼서가 온 가문 중에서 원하는 상대를 고를 수 있는 권리.
“청혼서를 감추고 보여주시지 않는 건 제국법 위반이에요.”
“뭐? 이 건방진…….”
“다른 건 바라지 않아요. 베네비토 가문만 아니라면-”
“닥치지 못하겠느냐?”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아셀라의 뺨에서 불이 일었다. 그녀는 순간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지탱해 내곤 몸을 바르게 세웠다.
그러나 곧바로 같은 뺨에 더 강한 통증이 일면서, 이번에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멍청한 년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 했군.”
“…….”
연거푸 얻어맞은 뺨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비릿한 향이 퍼져 나가는 것이, 아무래도 입안의 여린 살이 터진 것 같았다.
“제 어미를 잡아먹고도 부족한 모양이야.”
“…….”
“아델이 네 한심한 모습을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아셀라가 말없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필립이 저 말을 꺼낼 때마다 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셨으니까.’
아델이 살해당하던 그때, 곁에 있었던 이가 아셀라였다. 그녀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칠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죄책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아직도 후계자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아요…….”
“설마 가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멍청한 기대를 품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에요.”
“그럼 얌전히 방에 처박혀서 결혼 준비나 해.”
“아버지!”
아셀라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반질반질한 구두코 앞에 비굴하리만치 머리를 조아렸다. 자존심 따위는 얼마든지 내버릴 수 있었다.
이 결혼을 피할 수만 있다면.
“다른 혼처도 얼마든 가능하시잖아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제발…….”
“너 같은 것에겐 과분하기 그지없는 분이시다.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 칼릭스 베네비토.
젊고 뛰어난 외모에 엄청난 부까지 갖춘 그는, 황제의 친척이자 황위 계승권까지 가진 남자였다. 누구든 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조건 탓에 대공을 원하는 귀족가의 영애들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아셀라는 세상 그 누구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 남자와는 절대 결혼할 수가 없었다.
“다른 후작가, 아니, 백작가라도 좋아요. 청혼서가 온 다른 가문 중에서…….”
“멍청하긴.”
필립의 입꼬리 한쪽이 뒤틀리듯 올라갔다. 조롱조의 말이 이어졌다.
“청혼서? 그따위 게 뭐라고.”
“아버지…….”
“칼릭스 베네비토가 네게 청혼한 사실이 지금쯤이면 제국 내에 다 퍼졌겠군.”
“그게 무슨…….”
“네게 왔던 청혼서는 죄다 휴짓조각이 될 거라는 이야기지.”
감히 베네비토 대공가의 뜻에 반기를 들 수 있는 하르메니아의 귀족은 없었다.
필립의 말대로 귀족 사회에 이미 이 소식이 알려졌다면 다른 가문과 혼담이 오갈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대체…… 대체 왜…….”
아셀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 아델 후작이었다면 또 모를까, 아셀라와 대공은 접점이 없었다. 대공은 신년축제와 건국제를 제외하면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에도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아셀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가야 하는 자리가 아니면 거절해 왔고, 심지어 대공의 눈에 띄지 않고자 피해 다니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말 한마디 나누기는커녕, 그와 얼굴을 마주칠 일조차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샤르투스 후작가와 베네비토 대공가는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대표적인 황제파 가문인 베네비토와, 신전의 세를 입은 샤르투스는 지난 몇백 년간 서로를 견제해왔다. 심지어 현 대공인 칼릭스가 베네비토 가문의 수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샤르투스를 향한 베네비토의 적대감이 표면적으로도 드러날 정도였다.
최근 필립은 샤르투스가 후원하던 상단에 별안간 닥친 세무조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배경에도 칼릭스 베네비토의 입김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공이 아셀라에게 청혼서를 넣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아셀라만이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이유를 제외한다면.
“안토니의 가주 승계를 승인하는 조건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따라.”
필립이 양아들을 공공연히 샤르투스의 후계자로 소개하고 다녔으나, 안토니는 귀족 사회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유는 당연히 아셀라 때문이었다.
아무리 후계자 자리를 박탈당하고 가문의 능력을 계승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여전히 샤르투스의 적통이었다.
그에 반해 안토니는 출생조차도 의심받는 상황이었으니, 필립으로서도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때에 마침 칼릭스 베네비토의 청혼서가 도착한 것이다.
필립은 하마터면 사용인들 앞에서 체면도 차리지 못하고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칼릭스와 아셀라의 결혼은 그가 안고 있던 수많은 문제를 단숨에 끝내줄 황금 열쇠나 다름없었다.
칼릭스 베네비토가 공식적으로 안토니를 지지한다면 가문 승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대공의 말 한마디면 그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던 일들도 단번에 해결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눈엣가시였던 아셀라를 가장 좋은 값을 받고 치워버릴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는 없었다.
“너 같은 것의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가서 대공의 비위를 잘 맞춰. 지금처럼 뻣뻣하게 굴지 말고.”
“…….”
“또다시 주제 파악 못 하고 허튼소리를 할 시엔 가만두지 않겠다.”
그러나 아셀라는 대답하지 않았고,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집무실 안을 휘감았다.
“대답해라.”
“…….”
“대답 안 해?”
필립의 인내심은 짧았다.
그가 아셀라의 머리채를 거칠게 손목에 휘감아 당기자, 순식간에 목이 뒤로 꺾였다. 아셀라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키며 버텼다.
“감히 주제도 모르는 계집이!”
두꺼운 손바닥이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로 내려쳐졌다.
여러 차례 얻어맞은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아셀라는 끝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며 아픔을 참아냈다.
몇 번 더 손을 내지르던 필립이 서랍을 열었다.
“쓸데없이 고집부리는 버릇은 아직도 못 고쳤구나.”
그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그것’을 둘둘 감기 시작했다.
도주하는 대공비 3화
필립은 아셀라가 ‘고집’ 부리는 걸 싫어했다.
아셀라에게 얼토당토않은 요구나 명령을 내려놓고도, 그녀가 부당하게 여기고 거부하면 인정사정없는 매질과 폭언을 퍼부었다.
‘어미를 닮아 고집이 세다’는 말도 함께였다.
필립이 이뤄낸 대부분의 성취는 아델과의 혼인으로 말미암은 후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작가의 삼남이었던 그가 남편을 잃은 아델 샤르투스 후작에게 열렬하게 구애하여 결혼에 성공한 일화는 제국 내에서도 유명했다.
필립은 다정하고 바람직한 아버지상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아델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러나 아델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필립은 돌변했다. 아셀라가 그의 모든 행동이 잘 짜인 연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사실 필립이 그녀의 어머니를 증오할 정도로 싫어했다는 사실도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한동안 얌전히 있다 보니 그만 잊고 있었구나.”
“…….”
“한 번씩 밟아줘야 네가 기어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필립이 새하얀 장갑을 손에 꿰고는 서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단단히 감아쥐었다.
아셀라가 이어질 고통을 직감하고 눈을 감았다.
“흡……!”
차지게 붙었다 떨어지는 채찍 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입술을 깨물며 숨을 삼켰지만, 고통에 새어 나오는 신음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몇 년이 넘게 이골이 날 만큼 맞았음에도 이 끔찍한 아픔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셀라, 착한 내 딸.”
잔악한 손놀림과는 달리 말투만은 더할 나위 없이 사근사근했다. 아셀라는 그 차이가 더 무섭고 두려웠다.
“이젠 알 때도 되지 않았니? 어차피 변하는 건 없다는 걸 말이다.”
“…….”
필립이 처음으로 아셀라에게 손찌검을 했던 날, 그녀는 꿋꿋하게 버텼다.
잘못한 것이 없기에 당당했었다.
그러나 어린 몸에 가차 없이 쏟아지는 매질은 끝내 멈추지 않았다.
육체적 고통 앞에서 귀족의 자긍심도, 샤르투스의 명예도 모조리 무너져 내렸다. 굴복의 비참함은 잠시였고, 아픔이 사라지면 안도감이 금세 찾아왔다.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가 홀로 버틸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지켜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저택에서, 아셀라는 나름대로 살아남을 길을 빠르게 터득했다.
비굴하게 무릎을 꿇었다. 뜻과 의지를 꺾고, 폭력 앞에 엎드렸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었어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