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 동화 속 악역의 어긋난 엔딩 플랜 (111/154)

내 상태를 봐주던 벨만 선생이 청진기를 내려놓았다.

그는 다소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허, 거 참."

"왜 그러시죠? 혹시……."

나는 그의 심각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증상이 악화됐나?'

몸은 가뿐한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회복되는 사람은 처음 봅니다. 후유증 하나 남지 않았습니다."

뭐야, 놀랐잖아.

'내가 좀 건강하긴 하지.'

벨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전에 드린 약은 더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완전히 회복하셨습니다."

"와아!"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벨만 선생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던 라리사가 탄성을 질렀다.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죠?"

라리사가 두 손을 꼭 모으고 눈을 반짝이며 동의를 구한 건, 바로 옆에 붙어 서 있던 파비안이었다.

"그래."

파비안이 라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러자 라리사는 헤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요 며칠간 주치의가 진찰하러 올 때마다 파비안이 따라 들어오긴 했다.

그러면 옆에 있던 라리사와 꼭 한두 마디씩은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 것 같기는 했는데…….

뭐랄까, 라리사가 파비안을 대하는 태도가 전보다 훨씬 스스럼없다고 해야 할까.

파비안도 자연스럽게 다 받아주는 것 같고.

'아무래도 라리사의 비밀을 들킨 이후부터인 것 같은데.'

요정의 눈물을 보고도 조금도 욕심이 생기지 않은 것 같은 파비안에게 신뢰감이 생긴 건, 나뿐만 아니라 라리사도 마찬가지였나보다.

"저, 대공님, 잠시만 귀 좀 빌려주세요."

라리사가 파비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파비안이 순순히 허리를 숙이자, 하리라는 발돋움을 하고는 파비안의 귀에 뭐라고 조그맣게 속닥거렸다.

'뭐, 뭐야, 날 빼고 둘이서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라리사가…… 라리사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다니…….

'아니, 둘이 같이 붙어 있는 건…… 참 좋긴 한데 말이야.'

예쁜 사람들끼리 붙어 있으니 눈도 즐겁고, 미래도 밝고…….

내가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리든 말든 짧은 비밀 이야기는 곧 끝났다.

파비안은 눈을 내리깔고 듣다가 이내 픽 웃었다.

"좋은 생각이야."

"헤헤……."

아, 뭐야, 뭔데?

그런데 라리사가 쪼르르 내 옆으로 달려왔다.

"마르시아 언니 회복 축하 기념으로 셋이서 티파티를 하기로 했어요!"

"……그걸 지금 말해 버리면 비밀이 아니잖아."

파비안의 서적에 라리사가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은 초대만 한 거예요. 자세한 건 비밀이니까 괜찮지 않나요?"

둘이서만 비밀 이야기를 한다고 조금이나마 섭섭했던 내가 바보 같아졌다.

우리 라리사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나 지금 초대받은 거야?"

"네! 오실 거죠?"

라리사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아, 장소는 아직 안 정했는데……." 

장담하는데, 라리사의 지금 저 얼굴에 대고 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거야.

"물론이지. 고마워."

라리사를 꼭 끌어안아 주는데, 파비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엷은 미소를 띠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따스한 눈길.

'두 사람 사이에 애정이 싹텄……나……?'

나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파비안을 쳐다보았다.

아까 머리를 쓰다듬어 준 거나 라리사의 반응을 보면 남녀 사이의 애정과는 좀 다른 것 같고.

'……아무래도 동지애나 형제애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내가 아픈 사이에 둘이서 한편이 되기라도 했나.

'동지애가 애정으로 발전할 수도 있나?'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이내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내가 혼자 아무리 생각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잖아.

라리사와 파비안에게 서로 사랑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일 웃긴 건 내가 지금 파비안에게 가져선 안 될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거지.'

더 깊게 생각했다간 내 꼴만 말이 아니게 될 게 뻔했다.

나는 그냥 다가올 티타임이나 즐기기로 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소피아가 문을 열자 알프레드가 들어왔다.

"마님, 주인님. 두 분께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은쟁반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쟁반 위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이건……."

화려한 금박으로 아낌없이 장식한 봉투였다.

입구를 봉한 붉은 밀랍에 찍혀 있는 것은 틀림없는 왕실의 문장이었다.

'올 게 왔구나.'

아니나 다를까, 수신인은 로랑 대공 부부, 발신인은 에른스트 노이만 왕세자였다.

파비안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사람을 물리고 함께 편지를 뜯어보았다.

"왕실 무도회 초대장이군요."

그것도 우리를 주빈으로 명시한 초대장.

에른스트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날짜가…… 한 달 뒤?!"

겨우 한 달? 너무 촉박하잖아! 나는 황급히 파비안에게 물었다.

"그럼 우린 언제 수도로 출발해야 하나요?"

"음……. 늦어도 무도회 일주일 전에는 수도에 도착하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내게 남겨진 시간은 많아야 삼 주였다.

"헉, 그럼 지금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준비할 게 너무 많았다.

밀린 신문도 다 읽어야 하고, 다른 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대책도 세워야 한다.

물론, 드레스와 보석도 잔뜩 맞춰야 하고. 라리사 것까지.

내 속도 모르고 파비안이 말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가서 춤 한 번 추고 온다고 생각하시면 될 텐데요."

"무슨 말씀이세요? 왕세자 전하의 무도회에 주빈으로 가는 건데 그게 춤 한 번으로 끝날 리가 없잖아요. 그 이후로 초대장이 산처럼 날아올 거라고요."

그중 잘 골라서 로랑 가에 도움이 될 만한 귀족들을 만나야 한다.

그냥 만나기만 하는 게 아니라, 파비안의 출신만 보고 편견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야 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파비안이 생각만큼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까지.

'나더러 내키는 대로 맘껏 저지르고 가문의 명성을 망쳐도 된다고 했지만, 그러다가 눈총을 받는 건 결국 다 나잖아.'

눈총뿐인가, 속으로 내 험담을 하면 듣지 않으려 해도 내겐 다 들릴 텐데.

난 사서 욕먹기 싫다고.

"소피아!"

"네, 마님."

"베르너 부인에게 당장 연락해서 급히 와주실 수 있겠냐고 물어봐줘."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의상실 카탈로그도 좀 가져다줘. 손이 빠른 곳 위주로."

"네, 마님!"

소피아가 나가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할 일이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