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 고생길이 훤합니다 (90/154)
  • "마르시아 언니!"

    공부방으로 삼은 작은 서재의 문이 열리고 발그레한 얼굴의 라리사가 통통 뛰어나왔다.

    "라리사. 수업 끝났니? 재미있었어?"

    "네!"

    라리사는 답삭 내게 안기며 대답했다.

    뒤이어 나온 베르너 부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라리사 양은 참 영민해요. 뭘 가르쳐도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이는군요."

    "수업이 즐거운걸요."

    라리사가 헤헤 웃었다. 웃는 얼굴이 연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 이런, 쓰다듬을 부르는 얼굴이잖아.

    깨닫기도 전에 내 손은 이미 라리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니, 라리사가 먼저 내 손에 머리를 대고 비빈 것 같기도 하고…….' 

    베르너 부인의 수업은 공부라기보다 놀이에 가까웠다.

    엄격하지 않고 자애로운 분위기에서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오늘은 이런 걸 해볼까요'하면서 쉽게 접근했다.

    어떻게 아냐면, 수업에 몇 번 참관해 봤기 때문이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다과라도 들고 가세요, 부인."

    "어마, 그럴까요."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자, 시간을 맞춰 미리 준비해 놓은 간식과 따끈한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너 부인, 실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예, 뭔가요?"

    "부끄럽지만, 저도 수업을 받아야 할 처지라서요."

    베르너 부인의 수업을 몇 번 옆에서 구경하다 보니, 나도 수업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대공비가 되었거든요."

    대공가 따위 내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마음이 바뀌었다.

    '언제까지나 모른 체하고 놀고만 있을 순 없지.'

    라리사가 나중에 진짜 대공비가 되어 넘겨받는다고 해도 그때까지 몇 년이나 남았으니.

    그때 가서 엉망진창이 되지 않은 대공가를 넘겨주려면 아무래도 내가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름뿐이어도 대공비는 대공비니까.'

    제일 급한 건 고급 사교계의 예절과 대저택의 운영 방법이었다.

    그나마 저택 운영은 집사와 하녀장, 그리고 소피아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의 것들을 배우려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선생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베르너 부인에게 좋은 선생을 소개받을 생각이었다.

    라리사의 수업 시간에 나도 옆방에서 수업을 받으면 딱 좋지 않을까?

     "그렇군요. 어떤 것을 공부하고 싶으신지요?"

    베르너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던 찰나, 소피아가 조심스레 다가와 나를 불렀다.

    "마님."

    "소피아. 무슨 일이지?"

    "손님이 오셨습니다. 레오니드 오를로프 후작님과 그 친구분이시라는군요."

    "손님?"

    오늘 누가 온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는데?

    아, 그러고 보니 파비안이 전에 말한 적이 있었지.

    '오를로프 후작은 아무 기별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난다고 했던가.'

    오늘이 아무래도 그런 날인가 보다.

    베르너 부인은 소피아가 난감해하는 것을 보고는 먼저 말했다.

    "비전하, 급한 일이시라면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또 올 테니까요."

    "미안해요, 베르너 부인. 오늘 이야기는 나중에 마저 하지요. 부디 편안하게 다과를 즐기다 가세요."

    "언제든 편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라리사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베르너 부인을 잘 부탁할게."

    "네! 걱정 마세요."

    라리사는 방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베르너 부인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그럼 라리사 양, 우리 역할놀이를 해볼까요? 마침 이렇게 다과도 마련되어 있으니, 티파티에 참가한 레이디들을 주제로. 라리사 양은 주최자가 좋아요, 아니면 손님이 좋아요?"

    "저는 손님 할래요!"

    "그래요. 그럼 저는 주최자로 하지요."

    베르너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완벽한 동작으로 라리사를 향해 인사하며 말했다.

    "라리사 블리크 영애! 오늘 제 티파티에 와 주어서 감사합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러자 라리사도 자리에서 통 튀듯 일어서서는,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를 하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그레타 베르너 남작 부인, 초대해주셔서 영광이어요."

    라리사는 베르너 부인이 열어준 가상의 문으로 총총 들어갔다.

    고개를 빳빳하게 든 라리사의 등 뒤로 늘어뜨린 은발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진행된 연장 수업을 즐기는 라리사의 모습에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나는 웃으며 응접실을 나섰다.

    바깥에서 알프레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님."

    "손님들은 어디에 계시지?"

    "일 층 메인 응접실로 모셔다 드렸습니다."

    "고마워. 대공 전하는?"

    "곧 내려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알프레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실 파비안 손님이고 내가 굳이 내려가 맞이할 필요는 없지만, 온 사람이 레오니드였으니까.

    전에 날 도와준 적도 있고,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메인 응접실로 내려가자 레오니드의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빨간 머리의 사람 좋은 곰 한 마리 옆에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른 초중반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오를로프 후작."

    "비전하."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 레오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

    "정말로 아무 기별도 없이 갑자기 오셨군요."

    "아, 미안합니다. 이러던 게 버릇이 되어서요."

    "미안하긴요, 이미 대공께 들어서 알고 있었답니다. 게다가 전하의 친구분이신데 언제나 환영이지요."

    나는 옆의 갈색 머리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흠칫하고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분은 누구신가요?"

    "아, 저는 오를로프 후작의 친구입니다. 에르니라고 불러주십시오."

    에르니라니, 에른스트의 애칭이잖아.

    '특이하네. 처음부터 자기를 애칭으로 소개하다니.'

    게다가 그가 말한 것은 이름뿐이다.

    혹시 성이 없나?

    그렇다면 평민 친구?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소문의 그 대공비시군요! 의문의 미녀!"

    그는 요란스럽게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상당히 쾌활한 남자였다.

    갈색 눈동자가 나를 대담한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역시 대단한 미모이십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생각한 것보다도 더."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외모 칭찬이었다.

    마르시아가 하루가 멀다 하고 파티에 참석할 때 줄곧 듣곤 했던 말들.

    익숙한 말에 나는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의례적으로 인사하며 답했다. 

    "반가워요. 그런데 의문의 미녀라니요?"

    "아! 아직 신문을 안 보신 모양이군요. 지난달 호이터 지에 실렸던 기사로 사교계가 온통 떠들썩했었답니다."

    "사교계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평민은 사교계에 출입할 수없다.

    그렇다면 귀족이지만 일부러 자기 성을 말하지 않았다는 얘긴데…….

    그러고 보니 남자의 옷차림이 평민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귀족인가? 신분을 숨기고 싶은가 보지? 왜? 누구길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