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불거리는 램프의 불꽃 위로 햇살이 드리워졌다.
책상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파비안은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어느새 집무실 안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그는 램프의 덮개를 내려 불을 껐다.
'아침이로군.'
전 대공이 쓰던 집무실은 그간 임시로 사용해 오던 작은 집무실과는 정반대였다.
널찍한 방 안에는 책상뿐 아니라 손님을 배려한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전 대공이 수집한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일하기 위한 방이지만 응접실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한 공간이었다.
파비안은 자신의 서명 위로 떨어지는 햇빛이 천천히 잉크를 말리는 것을 쳐다보았다.
머리가 다소 멍했다. 그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를…… 진한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어.'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집무실 문을 두드릴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들어와."
포투스는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추켜올렸다.
"안 주무셨습니까?"
"조금 전에 막 다 끝낸 참이야."
"그걸 전부 다요?"
포투스는 파비안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더미를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시지 그러십니까? 벌써 이틀이나 못 주무셨잖습니까."
"해가 떴는데 그럴 수는 없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고 차 가져왔습니다."
포투스는 들고 온 쟁반을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작은 주전자 안에는 탕약만큼이나 진하게 우린 차가 들어 있었다.
"고맙군."
파비안은 손수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차를 따랐다.
따뜻한 차를 한입 머금은 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너무 진한 탓이었다. 덕분에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오를로프 후작님께서는 간밤에 저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도울 일도 없을 거라시면서요."
포투스의 보고에 파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도 되었지."
간다는 인사도 없이 간 것이 그답다고 파비안은 생각했다.
어차피 때가 되면 별다른 기별도 없이 또 불쑥 나타날 것이다.
파비안이 마지막으로 레오니드를 본 것은 어제였다.
* * *
전날, 이고르를 내쫓은 파비안을 맞이한 것은 집무실에 마련된 화려한 손님용 소파에 걸터앉은 레오니드와 독한 술 냄새였다.
"왔냐?"
파비안은 그를 무시하고 포투스에게 말했다.
"내가 술 내주지 말랬지."
포투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후작님께 제가 어떻게 개깁니까."
"그래, 그래. 대공이 되면 뭘 해, 아직도 내 눈엔 꼬맹이인데."
"……."
"포나 자네나, 꼬마 둘이서 용쓰는 거로밖엔 안 보이지. 아직도 아카데미에 갓 들어온 자네들 두 녀석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거야."
레오니드가 술잔을 든 손을 휘저으며 포투스의 편을 들었다.
저리 취한 것처럼 말해도 레오니드가 여간해서는 취하지 않는다는 걸고 자리의 세 명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오그라들어선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덜덜 떨던 어린아이가 지금은 대공 전하라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지."
"누가 들으면 자네가 나보다 일곱 살이 아니라 일흔 살은 많은 줄 알겠군."
파비안은 투덜거리며 목을 조이고 있던 크라바트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평소에는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 그였지만, 이 두 사람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레오니드와 포투스는 파비안이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들이었다.
셔츠 꼭대기 단추도 두어 개 풀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내친김에 셔츠 소매의 커프스단추도 떼어 내며 테이블 위를 흘끔 쳐다보았다.
반쯤 빈 위스키병 옆에는 얼음이 담긴 그릇과 빈 잔이 두 개 더 놓여 있었다.
파비안은 픽 웃으며 잔에 술을 채웠다.
"자칭 자네 장인은 어떻게 되었나?"
"돈 줘서 내쫓았어."
"오호."
레오니드가 자기 잔을 들어 파비안의 잔에 가볍게 건배하듯 부딪혔다.
"별로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닌데."
파비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레오니드가 그를 지켜보다가 픽 웃으며 말했다.
"참 이상한 가족이란 말이야."
"……뭐?"
"블리크 가 말이야. 가족애가 넘치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게."
파비안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자 레오니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가족애의 방향이 일방적이잖아. 블리크 씨는 딸들을 사랑한다는데 딸들은 그 사랑을 거부하고, 자네 부인은 동생을 심히 아끼는 것 같은데 동생은 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 같고 말이지."
"사랑이라."
파비안은 눈을 좁히며 자기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르시아 양이 라리사 양을 그렇게 감싸는 이유가 뭘까.'
원래 자매애란, 가족애란 그런 것인가?
파비안은 형제자매가 없고 부모를 모두 어린 나이에 잃었다.
그에게 동생이 있었다면 그도 마르시아처럼 행동할까?
알 수 없었다.
마르시아뿐 아니라 이고르의 행동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파비안이 제시한 금광산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인생을 뒤집어놓을 만한 재산이었다.
그런데도 이고르는 금광산보다 라리사에게 비중을 더 두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워 보였어.'
정확히는 라리사를 향한 집착으로 보였다.
이고르는 마르시아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은 라리사를 놓고 싸우는 모양새였다.
'라리사 양의 무엇에 그리 집착하는 거지?'
파비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도 짐작해 보기엔 블리크가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적었다.
'마르시아 양이 동생을 그렇게 감싸는 것도 혹시 이고르 씨와 같은 이유인 것은 아닐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다가 그는 픽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한 사람은 학대하고 다른 사람은 정성을 다해 보살피는 게 같은 이유에서 기인할 리가.
파비안은 테이블에 놓인 나머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글쎄, 가족애가 넘치는 가족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마르시아 양이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
레오니드는 파비안의 말에 입을 조금 벌렸다. 그리고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그냥 도로 삼키며 생각했다.
'……마르시아 양이라고?'
아무리 절친한 친구들 앞에서라도 그렇지, 부인의 이름에 '양'을 붙이다니.
'이건 그냥 첫날밤을 안 치른 정도가 아니잖아?'
레오니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 둘은 손 한 번 안 잡아본 게 틀림없었다.
'첫눈에 서로 반해서 바로 결혼했다며…….'
역시 그건 거짓말이었나?
레오니드가 아는 파비안은 한눈에 누군가에게 반할 인간이 아니긴 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레오니드와 포투스가 그의 친구가 될 때까지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파비안이 사랑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급히 사람을 구해서 결혼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선대 대공의 유언을 생각해보면 더 그렇다.
레오니드는 얼음이 녹도록 위스키 잔을 천천히 손 안에서 굴리면서 생각했다.
'하지만 둘 다 서로에게 관심이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내가 그런 걸 잘못 봤을 리는 없지.'
두 사람은 정말로 반해서 결혼한 걸까, 아니면 필요에 의해 결혼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둘 다?'
파비안은 친구이자 보좌관인 포투스에게 막 채운 술잔을 건네주고 서류가 쌓인 책상으로 향했다.
그 웃음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을 보며 레오니드는 킬킬 웃었다.
"뭐가 그렇게 우습지?"
파비안이 자신의 잔을 옆에 내려두고 맨 위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며 물었다.
그 옆에 선 포투스는 술을 마시는 시늉만 하고는 이미 제 주인을 위해 서류를 착착 정리하고 있었다.
레오니드는 비어버린 자기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대답했다.
"쉴 틈도 없이 또 일하는 게 재미있어서 그런다. 이제 거의 다 끝났으니 술도 한잔하고 좀 쉬엄쉬엄해도 될 것을."
에휴, 내가 자네들과 무슨 놈의 술을 다 마시겠다고 잔을 사람 수 대로 가져와서는…….
그가 한탄하면서 잔을 들고 다가와 파비안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파비안은 픽 웃으며 제 잔을 들어 레오니드의 잔에 가볍게 챙, 하고 부딪혔다.
레오니드가 어깨동무를 한 채 파비안의 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비안, 그렇게 지나치게 손도 한번 제대로 안 잡은 티는 내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