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 결혼 선물은 이혼 서류입니다 (16/154)

파비안은 진저리 치며 눈을 떴다.

'깜빡 잠들었었나…….'

조금 전까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악몽의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찝찝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침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대공 이마의 얼음주머니를 갈아주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가문의 주치의는 심각한 얼굴로 대공을 내려다보며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벨만 선생, 할아버님께서는 좀 어떻지?"

"발작은 멎으셨지만 여전히 고열이 심하십니다. 조금 전에 조수를 보내지 약상자를 가져오게 했습니다만……."

주치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발작이 한 번 더 오면 그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파비안은 답답한 마음에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지난밤, 대공은 갑자기 발작하며 쓰러진 이후로 계속 혼수상태였다.

파비안은 당장 달려와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히고 주치의를 불렀다.

무사히 깨어나길 바라며 밤새 곁을 지켰지만, 주치의는 대공이 쓰러진 원인조차 알아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기본적인 처치만 해주었을 뿐이었다.

대공은 나이도 지긋했고, 젊은 시절 부상당한 다리가 악화되어 최근에는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정도로 건강이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파비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무슨 수를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의심되는 자는 물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도 없지.'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대공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날이 서서히 밝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예 서류 더미를 가져오게 해서 급한 일도 처리하기 시작했다.

대공의 대리로 일한 지 꽤 되어서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방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며 한눈으로는 계속 대공을 살폈다.

오후가 되자 집사가 별로 달갑지 않은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발레리 님과 도미닉 님 내외분, 그리고 자녀분들께서 오셨습니다."

"고모님과 숙부님께서?"

파비안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대공의 침실 문이 열리며 친척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저 중에 있겠군.'

대공을 해치려 한 자.

병문안을 핑계로 들어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누군가가.

현 로랑 대공 프레데릭은 슬하에 세 자식을 두었다.

그중 세상을 떠난 파비안의 부친을 제외한 두 사람, 발레리와 도미닉이 가장 의심스러운 자들이었다.

물론 그들의 자식들 또한 의심 선상에서 쉽게 배제할 수는 없었다.

파비안은 의혹이 서린 눈으로 친척들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누구 하나 서로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자가 없었다.

"어머, 벨만 선생. 아버지는 그냥 잠드신 것 같아 보이는데? 멀쩡하잖아."

침대로 다가가 호들갑을 떠는 중년 여자는 발레리 콘라트 후작 부인으로, 대공의 딸이자 파비안의 고모였다.

뒤이어 발레리를 따라 결 좋은 갈색 머리를 한껏 말아 늘어뜨리고 아름답게 치장한 소녀가 들어왔다.

발레리의 딸 엘로이즈 콘라트였다.

엘로이즈는 대공이 누운 침대는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파비 안에게 다가왔다.

"잘 지내셨나요, 파비안 오라버니."

그녀는 장밋빛으로 뺨을 붉히며 인사해 왔다.

열여덟 살, 소녀 티를 벗기 시작한 그녀는 미모에 물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듯, 보석으로 반짝거리게 치장한 차림새였다.

얼핏 봐도 병문안을 오는 사람의 차림은 아니었다.

파비안이 그녀의 인사에 대답하기도 전에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반쪽짜리가 무슨 자격으로 아버지 침실에 와 있지?"

대공의 막내아들, 파비안에게는 숙부인 도미닉 로랑 백작이었다.

파비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편찮으신 분 앞입니다.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아버지 아니었으면 어디 길거리에서 비렁뱅이나 되었을 놈이, 어디서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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