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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화 (140/142)
  • 외전 3화

    가족이 전부 모인 응접실에 디저트 테이블이 빠른 속도로 준비됐다. 

    낯가림이 전혀 없는 세르안은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품을 점령하고 앉아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할부지 머리도 빨강. 우리 엄마 머리도 빨강!”

    “허허, 우리 세르안은 관찰력도 좋구나! 맞단다! 세르안 엄마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머리카락 색도 닮은 거란다!”

    “달마써? 나도 아빠랑 달마써요! 아빠 머리도 까망, 세르안 머리도 까망! 빨강, 빨강! 까망, 까망!” 

    세르안이 작은 손가락으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아직 빨리 말하지는 못했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트 모양의 눈동자로 한참 동안 세르안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나를 보며 말했다. 

    “너도 어렸을 때 말도 빨리 시작하고 잘했는데 세르안도 널 닮았나 보다.”

    “제가 그랬어요?”

    “그럼. 아주 야무지게 말 잘했지.”

    어머니가 빙그레 웃자 나도 따라 웃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세르안이 끼어들었다. 

    “세르안은 울 엄마도 달마써요?”

    “물론이지! 엄마도 어렸을 때 세르안처럼 말 잘했거든. 말 잘하는 건 세르안이 엄마를 닮았네!”

    “와아! 엄마 달마따!”

    세르안이 짧은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기분 좋게 외쳤다. 

    지켜보고 있던 언니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우리 애는 벌써 세 살인데도 아직 할 줄 아는 말이 얼마 없는데. 부럽다!”

    “헬레나, 조급해 할 필요 없어.”

    그러자 어머니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애들마다 성장 속도가 다 다른 거야. 너희들도 그랬거든. 헬레나는 기저귀도 빨리 떼고 걷기도 빨랐지만 말은 좀 느렸고, 클랜시와 엘프윈은 다른 건 보통이거나 조금 느렸지만 말은 또 빨랐지.”

    “그런데 지금 봐라. 다들 잘나거나 모자란 것 없이 어엿한 성인으로 잘 성장했잖니?”

    아버지가 허허허 웃으며 어머니를 거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오빠 클랜시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난 게 없다니요,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은 뛰어난 전투 능력으로 무공훈장도 받고 작위도 받았습니다만?”

    “맞아요. 저도 음악이든, 미술이든, 운동이든 어떤 활동에서든지 뒤처지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언제나 보통 이상으로 해내고 있는데요? 자식들이 보통이라도 잘났다고, 특별하다고 해 줘야죠, 아버지! 무슨 아버지가 그래요?”

    자식들의 반격에 할 말을 잃은 아버지가 볼을 긁적거렸다. 

    한편 어깨를 으쓱거리며 의기양양하게 할 말을 내뱉은 헬레나와 클랜시가 이번엔 나를 바라보면서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너도 한마디 해야지, 라는 의미가 담긴 신호였다. 

    윽, 순간 당황했다. 

    ‘그렇게 쳐다봐도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는걸요!’

    이 상황이 꽤 난감했다. 

    나도 그렇고 엘프윈도 그렇고 특별히 잘나 보이는 점은 없었으니 말이다. 

    언니와 오빠가 듣고 싶어 하는 답변을 들려 주지 못한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을 때였다. 

    내내 내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던 제크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엘프윈은 공감능력이 뛰어납니다.”

    “엘프윈이….”

    “고, 공감능력… 이라고요?”

    “…뛰어났었군요.”

    제크론의 말에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할 말을 잃은 채 두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감을 잡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긴장한 나는 주먹을 말아 쥐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속이 훤히 보였다. 

    부정하고 싶었으리라.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엘프윈이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항상 저 하고 싶은 대로만 해야 직성이 풀리던 막내 엘프윈이요?

    늘 쓸쓸하다, 부족하다, 외롭다, 이건 이래서 싫고, 저건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평불만 많았던 그 엘프윈 말씀하시는 거 맞죠?

    다들 이런 식으로 한마디쯤 하고 싶어서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차마 제크론 앞이라 그럴 수 없었겠지. 

    제크론이 아무리 이 집 막내딸의 남편으로 가장 손아랫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위가 공작이었다. 

    그 말인즉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지위가 최고로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크론의 말에 선뜻 동의할 수도 없었으리라. 

    아무리 공작 각하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거짓으로 동의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들의 심리를 완전히 이해했다. 

    ‘제크론의 말대로 지금의 난 공감능력이 뛰어나니까.’

    민망한 상황이 이어졌다.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세르안이었다.

    “아빠! 곰감 늠력이 모예요?”

    “공감 능력이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 상황을 잘 이해해 주는 것이란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말이지.”

    “으, 응…?”

    두 살인 세르안이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말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세르안은 제가 했던 질문이나 제크론의 대답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다른 장난거리를 찾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주요 타깃은 할아버지의 주름 많고 커다란 손등이나 턱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염이었다. 

    한편 어른들의 난감한 분위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서로 힐끔힐끔 눈치 보기 바빴다. 

    마침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하긴. 아무래도 여자는 결혼을 해서 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다 보면 부쩍 성숙해지기 마련이지.”

    “하, 하하…. 맞아요. 그렇네요.”

    “3년이란 세월은 참 길긴 하니까요.”

    헬레나와 클랜시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나름대로 애써 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뇌리를 스쳤는지 클랜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제크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 참! 에이미가 정말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너와 공작님 덕분에 신성수 치료를 받게 됐거든. 치료를 받기 전과 후가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해산일이 다가오는데도 많이 안심하는 눈치야. 정말 고마워, 엘프윈. 고맙습니다, 공작님.”

    에이미는 클랜시의 아내로 산달이 가까운 상태라 거동이 힘들어 서덜랜드에는 함께 올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의 말대로 위벨교는 1년 전부터 임산부도 신성수 치료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임신 초기와 막달 그리고 해산 직후, 이렇게 총 3회씩 신성수 치료를 시행했다. 

    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중간에 유산되는 아기의 수도, 아기를 낳다가 죽는 여인의 수도 절반으로 줄었다고 했다. 

    “신성수 치료가 효과가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다! 다음에 만날 땐 우리 세르안도 사촌 동생이 생기겠네!”

    “사톤 돈생?”

    “응, 외숙모가 곧 아가를 낳으시거든. 다음엔 아가 동생을 만날 수 있겠다!”

    “세르안은 아가 조아해! 아가! 쪼아! 꺄아아!”

    새로운 얼굴들을 많이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오늘따라 세르안은 별거 아닌 이야기에도 우렁차게 꺄르르 꺄르르 웃어 댔다. 

    웃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   *   *

    곧 우리는 로온 해변을 접하고 있는 별장으로 향했다. 

    휴가 기간 동안 우리 식구가 머물 곳으로 하이그린 백작성에서 일반 마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이마시는 공기에서 소금기가 확연히 느껴졌다. 

    두근두근, 설렜는지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별장까지는 헬레나와 클랜시가 동행해 줬다. 

    “원래도 매주 빠지지 않고 관리를 잘하고 있었지만 엘프윈, 네가 온다는 소식에 어머니께서 어제는 모든 하인들을 대동해서 쓸고 닦으신 모양이야.”

    “너 어렸을 때 여름엔 거의 별장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그건 기억나?”

    클랜시가 조심스럽게 묻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줄곧 그리웠어. 지금 와 보니 설레기도 해. 하지만 뚜렷한 기억이 있는 건 아니야.”

    “역시….”

    “그렇구나.”

    내가 사실대로 말하자 언니와 오빠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고선 등을 토닥여 줬다. 

    어느 날을 기점으로 내 기억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불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나를 동정해 주었다. 

    눈가에 멋대로 맺힌 눈물을 슬쩍 닦아 내며 헬레나가 소리 높여 말했다. 

    “앞으로 새로운 기억을 많이, 많이 만들면 되지!”

    “그리고 잃어버린 예전 기억들은 우리가 차근차근 알려 줄 테니, 기억 안 나면 외워!”

    클랜시의 장난스러운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를 부드럽게 흘겨보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잃어버린 기억을 외워야 한다니! 잘하면 시험이라도 보겠다고 할 태세다?”

    “어? 그거 좋은 생각인데? 시험 보자.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집중해서 외울 거 아니야!”

    “말도 안 돼! 시험은 싫어! 나 지금 휴가 중인 거 알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반박하는 나를 보며 언니와 오빠가 푸하하 배를 움켜쥐며 웃었다. 

    “역시 엘프윈! 공감 능력은 얻었어도 시험 싫어하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게! 기억은 없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네!”

    “시험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기억을 잃어서 잘 모르나 본데, 나는 시험이 좋은데?”

    “나도?”

    “뭐래!”

    하하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별장 정원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짠 내를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나부꼈다. 

    오늘 처음으로 직접 만난 엘프윈의 가족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가웠고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그들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시간이 꿈처럼 행복했다. 

    처음 만났지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같았다. 

    진짜 가족 같았다.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엘프윈의 기억 덕분이리라.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들과 만나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주저하고 긴장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괜한 걱정이었다.

    ‘이렇게나 쉬운 것을! 이렇게나 즐거운 것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존재들은 그렇다. 

    하나부터 열까지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워낙 오랜만이라 많이 달라진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 조금씩만 양보하고 인정하면 모든 게 훨씬 쉽고 즐거워진다. 

    나는 세르안을 단단히 안은 채 내 옆을 지키고 선 제크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고마워요, 제크론. 이게 다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편안히 즐기는 것 같아 다행이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   *   *

    “와아…. 노을이 정말 예뻐요. 바다의 노을은 원래 이런 색인가? 신기해요!”

    나와 제크론은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에서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오묘한 붉은 빛깔로 물든 바닷가의 모습에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잠시 내려놔야 했다.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새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은 제크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바닷가의 노을도 예쁘지만, 당신은 더 예쁘다고. 그거 알아? 저 노을이 당신 머리카락 색을 따라 하는 거?”

    “하늘이 날 따라 한다고요?”

    “응. 당신은 그런 존재거든. 하늘도 부러워서 따라 하려 애쓰는 존재.”

    “푸흡!”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듣기 좋았다. 

    반으로 곱게 접은 제크론의 두 눈은 오로지 나만을 담았다. 

    감미로운 중저음의 목소리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인 남자 주인공, 제크론은 오로지 나만을 사랑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고민했지만 오늘 헬레나와 클랜시를 만나면서 확실히 결심을 굳힌 생각을 그에게 전하기로 했다. 

    제크론의 목을 팔로 감으며 말했다. 

    “우리 세르안에게 동생이 많으면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생각도 같아.”

    제크론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살포시 내 몸을 들어 올리더니 그의 무릎 위에 앉혔다. 

    내 시선이 살짝 더 높아진 탓에 내가 그를 내려다보고 그가 나를 올려다봐야 했다. 

    저 멀리서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 나풀거렸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갰다. 

    우리의 숨결이 하나로 합쳐졌다.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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