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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5/142)

135화

시간은 흘러 어느덧 세르안이 태어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드디어! 오늘이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크론을 끌고 세르안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아직 자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우리 아들.”

“축하한다, 세르안.”

우리는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는 방을 나서야 했다. 

아이의 단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날이었고 다른 중요한 것들도 많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세르안의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충분히 잘 자둬야 파티 땐 기분이 좋아서 손님들을 향해 방긋방긋 웃어 주리라. 

아기방을 나선 우리는 다시 침실로 향했다. 

보통은 1층 다이닝룸에서 식사를 했지만, 오늘은 파티 준비로 공작성 전체가 어수선한 분위기일 거라 침실에서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침실로 돌아와 보니 역시 발 빠른 케이트와 주디가 식탁 세팅을 완전히 다 끝낸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안한 식사 시간 되세요, 주인님, 마님.”

“그래, 수고했어. 고마워.”

테이블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로 손을 뻗을 때였다. 

제크론이 불쑥 내 앞으로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두 눈을 깜빡이며 제크론을 올려 보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당신이 가장 고생한 날이잖아? 거의 죽다가 살아난 날.”

“제크론….”

“그러니까 당신 장하다고! 그리고 고마워.”

푸르른 숲을 닮은 싱그러운 미소를 내뿜던 제크론이 내 손등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했던 선물과 감사의 말에 당황한 나는 순간 얼떨떨한 기분이 됐다. 

그대로 굳어 있는 나를 대신해 제크론이 손수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목걸이가 있었다. 

수십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힌 목걸이의 중앙에는 로켓이 달려 있었다. 

“당신이 직접 열어 봐.”

그의 주문에 따라 나는 목걸이에 달린 로켓을 열었다. 

딸깍. 

“아….”

순간 할 말을 잃고 로켓 안의 그림을 바라봤다. 

하지만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바람에 시야가 곧 흐려졌다.

“제크론 이건….”

로켓에는 몇 달 전 브렌트가 그린 모자상의 작은 버전이 꽂혀 있었다. 

울먹이는 나를 향해 제크론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올핸 당신과 세르안의 그림이지만, 내년엔 꼭 우리 세 식구 그림을 담은 목걸이를 선물할 거야. 브렌트와 이미 약속했다고. 아직 구두 계약이긴 하지만.”

“…고마워요.”

얼른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마음에 쏙 들어요. 정말로요.”

“내년 선물은 더욱 마음에 들 테니까 기대해.”

“좋아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제크론의 손이 내 눈가에 남은 마지막 눈물방울을 훔쳤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자, 어서 들지. 우리 오늘 바쁘잖아.”

“네.”

*   *   *

앨리슨과 조안 그리고 데이비스와 메릴이 이벤트를 위해 준비한 자그마한 테이블을 보고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이 테이블은 무슨 용도인가요?”

“어머나, 이게 다 뭐예요? 일부러 조그맣게 제작한 것들인가요? 신기하기도 해라!”

앨리슨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숫자를 셌다.

“이건 실, 연필, 검, 그리고 이건… 붓, 금화, 청진기, 또 이건… 마법지팡이, 판사봉, 활… 다 세지도 못하겠네! 많기도 해라!” 

“그런데 이걸 다 어디에 쓰려고요?”

모두가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세르안 보고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할 거예요.”

싱긋, 웃으며 답하자 친구들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아무래도 ‘돌잡이’라는 개념이 이들에게는 무척 낯선 모양이었다. 

“물론 아직 한 살 꼬마가 뭘 알겠어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마음대로 고르겠죠. 그걸 보고 아이의 미래를 점쳐 보는 놀이예요.”

“미래를 점쳐 본다고요?”

“어떻게요?”

친구들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또 물었다. 

“아이가 실을 잡으면 오래 살고, 연필을 잡으면 공부 머리가 좋대요. 검을 잡으면….”

그때였다. 

메릴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는 메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이 되는 거군요!”

“네, 맞아요!”

“와아, 맞혔다!”

메릴이 마치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힌 학생처럼 좋아했다. 

천진난만한 그녀의 모습이 웃겨 모두 호호호 웃었다. 

“어머나! 이런 게임은 처음 봐요!”

“그러게요! 신기하네요! 엘프윈은 대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래요?”

“윌트슨 공작성 파티에서 했던 새로운 게임이라는 소문이 퍼지면 곧 제국 전체에 유행으로 번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요?”

“에이, 설마요.”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사실 조금 기대가 되기도 했다. 

‘진짜 그럴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쉐리던 제국 전체에 퍼진 돌잡이 문화라니.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때마침 제국 신문 기자 닐 베이스와 필립 빙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내게 같은 걸 물었고, 나는 아주 친절히 답해 줬다. 

설명을 전부 들은 닐 베이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 어렸다. 

“오! 무척 독특한 형식의 이벤트로군요. 이 댁 공자님께서 어떤 물건을 집을지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겠군요!”

“네, 맞아요. 그럴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이런 식의 이벤트는 어디에서 보고 착안하신 겁니까?”

“네?”

역시 닐은 기자가 맞았다. 

다소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순간 뜨끔했다. 

전생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뿌리 깊은 전통 문화였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까. 

내 고민을 알 리 없는 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택에 상주하는 실내악단의 고용을 유행시킨 것도, 여성들을 위한 운동인 요소킨을 유행시킨 것도 모두 공작 부인의 특별한 안목에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거든요. 확실히 다른 귀부인의 행보와는 차별되는 것 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처음 시도했던 것들이 결국 유행됐다는 말은 다른 귀부인의 생각 역시 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하하, 닐이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케이트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마님, 초대받은 손님이 모두 도착하셨습니다.”

“어머, 그래? 세르안은?”

“도련님께서도 준비를 다 마치셨습니다.”

“좋아. 가자.”

세르안을 데리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회장 안을 휘 둘러보며 제크론을 찾았다. 

‘제크론이 어디… 아, 저기 있네!’

제크론은 구석 테이블에서 아버님과 대화 중이었다. 

시부모님은 세르안의 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일주일 먼저 공작성에 도착했다. 

파티 준비를 도우면서 겸사겸사 세르안과 더 오래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처음 시부모님을 만난 날 데면데면한 제크론의 태도에 어찌나 놀랐던지!

아무래도 서로 떨어져서 지낸 세월이 길었던 탓인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는 제크론과 아버님 사이에 어색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한결 친숙해진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서로 쏙 빼닮은 모습의 부자를 보고 있으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그때였다. 

제크론과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싱긋 웃는 그의 눈부신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 넋을 놓아 버렸다. 

바로 정신을 다잡은 나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같이 나가요.’

‘좋아.’

역시 입 모양으로 답한 제크론이 생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매 순간 싱그럽게 빛났다. 

*   *   *

세르안을 유모차에 앉혔다. 

특별한 행사에 맞춰 맞춤 제작한 유모차는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윗부분은 각양각색의 조화로 장식돼 있었는데 각 조화의 중심에는 보석이 박혀 있어 반짝거렸다.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나무로 조각된 다람쥐와 토끼, 그리고 산새로 장식돼 있었다. 

무척 정교한 조각이어서 채색까지 했다면 마치 진짜 동물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세르안을 유모차에 태우고 연회장에 세 식구가 함께 등장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세르안이 유모차에 앉기를 거부했다.

“우우… 아아앙…!”

얼굴을 찌푸리며 눈물 없는 울음을 터트렸다. 

어제 몇 번 연습했을 때는 곧잘 탔는데, 아무래도 연습이 부족했던 걸까.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제크론은 세르안을 품에 안았다. 

“으으으… 으앙!”

하지만 세르안의 기분은 그대로였다. 

유모가 쩔쩔매며 말했다. 

“이상하시네요. 분명 아까까진 괜찮으셨는데.”

“많은 사람들 앞에 등장해야 하는 걸 세르안도 느꼈나 봐요. 그래서 긴장했나 봐요.”

호호, 나는 작게 웃으며 제크론에게서 세르안을 받아 안았다. 

“아앙… 꺄아아…!”

다행히도 아이는 짜증 섞인 울음을 그치고 방긋방긋 웃어 보였다. 

제크론이 입술을 삐죽이며 세르안의 통통한 볼을 꼬집는 시늉을 했다. 

“요 녀석, 아빠 품보다 엄마 품이 좋은 거냐? 엄마가 이렇게 가느다란 팔로 널 안아야 쓰겠냐?”

“세르안, 아빠한테 괜찮아요, 해! 우리 엄마는 밥도 많이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서 건강하니까 괜찮아요, 라고 해 봐!”

“꺄아… 아앙!”

신이 났는지 세르안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오, 지금 표정 좋아! 이제 입장하면 되겠군!”

“자,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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