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42)
  • 134화

    약속이라도 한 듯 엘프윈과 베로니카가 제크론의 손을 한 쪽씩 잡자 신성의 빛이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었다. 

    치유의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제크론의 몸 전체를 덮고 있던 상처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치유가 끝나자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오늘 일과 관련된 모든 이들의 기억을 조정할 순서였다.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서로 마주 보고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들의 몸 전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빛이었다. 

    빛은 대신관을 제외한 모두의 기억을 정리했다. 

    한참 후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대예배실을 가득 채운 신관과 신녀들의 멍한 시선이 대신관에게로 꽂혔다. 

    그들은 마치 막 깊은 잠에서 깬 사람들 같았다. 

    대신관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 우리는 로저먼드 월시의 아르젠토 차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근엄한 목소리가 대예배실에 울려 퍼졌다. 

    신관과 신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신관의 말을 경청했다. 

    “위벨교는 타의 모범이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약초의 관리에 소홀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제국민들이 중독 증상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신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말아 쥔 둔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우리 위벨교에서는 로저먼드 월시의 신성수 치료를 필두로 하여 앞으로 아르젠토 차 중독증을 앓고 있는 국민들의 치료를 이어 나갈 것을 약속합니다.”

    대신관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신관과 신녀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도 그럴 게 치유 신관과 치유 신녀의 수는 한정돼 있는데 갑자기 환자 수가 늘면 감당이 힘들어질 것을 우려한 것이리라. 

    “여러분이 걱정하는 바를 모르지 않습니다. 하여 어린 신관과 신녀를 양성하는 기관을 신설하여 보다 더 많은 인력이 위벨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와아,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신관과 신녀의 인원수 제한에 힘써 왔던 대신관이었다. 

    인원수가 많아지면 특권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보다 더 많은 신관과 신녀를 양성하겠다고 발표하시다니! 

    듣고 있던 신관과 신녀들이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대신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번 사태를 사죄하는 마음과 앞으로의 치료에 성심성의껏 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자, 신성수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 모두 위메나 님께 기도드리겠습니다.”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관과 신녀들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대예배실 안은 위메나 신에게 올리는 기도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   *   *

    “세르안!”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세르안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새 더 자란 건지 아니면 내 근육이 빠진 건지 세르안을 안는데 부쩍 무겁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며칠 동안 못 봤는데도 세르안은 나를 낯설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이쁜 내 새끼.

    “꺄야아… 아앙!”

    “엄마 많이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세르안을 꼭 껴안았다. 

    아이의 냄새를 맡자 그제야 집에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드디어 온전한 내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 누구도 앗아 갈 수 없는 내 자리 말이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내 자리 말이다. 

    그리고 참아 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흐으으윽! 엄마가 미안해! 앞으로는 절대 어디 안 갈게! 흐흑… 약속할게! 세르안 곁에 꼭 붙어있겠다고! 흐으윽!"

    “우우… 우아아앙!”

    슬픔이 전이된 것일까. 갑자기 세르안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를 닮은 녹색 눈동자가 촉촉해지더니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아아… 아아앙!”

    “엄마가 슬프니까 우리 세르안도 슬퍼졌구나! 흐흑… 엄마가 울지 않을게! 엄마가 돼서 울기나 하고… 미안해! 흐흑….”

    울고 싶지 않았지만 흐르는 눈물을 제어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때였다. 

    제크론이 너른 품으로 나와 세르안을 동시에 감싸 안았다. 

    “가끔 울고 싶은 날은 울어도 괜찮아! 우리 세르안은 엄마만 있는 게 아니라 아빠도 있으니까.”

    “제크론….”

    “엄마가 울 땐 아빠가 울지 않고, 아빠가 울 땐 엄마가 울지 않고. 그러면 되지. 공동 육아! 역할 분담!”

    생글생글 웃는 제크론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 가슴도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여전히 주책맞은 눈물이 흘러내리긴 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안온했다. 

    내 아이를 품에 안은 그대로 내 남편의 품에 안긴 지금 이대로가 내겐 최고의 행복이고, 최고의 사랑이었다. 

    “사랑해, 세르안. 사랑해요, 제크론!”

    울음을 겨우겨우 삼키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크론이 몸을 살짝 풀어 나를 봤다. 

    우리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나는 다시 속삭였다.

    “평생 당신만을 사랑할 거예요. 지금 이 행복을, 지금 이 사랑을 지킬 거예요.”

    “사랑해, 엘프윈.”

    제크론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쳐왔다. 

    따뜻한 입술에서 전해지는 숨결이 달콤했다. 

    오로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달콤함이었다. 

    ‘감사합니다, 위메나 님!’

    저 하늘 어딘가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을 이 세계의 절대신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   *   *

    며칠 뒤, 베로니카가 공작성으로 찾아왔다. 

    응접실 긴 소파에 나란히 앉은 나와 베로니카는 손을 맞잡았다.

    따듯한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져 안정감을 주는 손길이었다. 

    “고마워요. 당신이었군요. 내게 새 삶을 줬던 사람이.”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울컥하는 바람에 목소리가 떨렸다. 

    “부인께 새 삶을 주신 분은 위메나 님이세요. 전 그저 우리를 구해 달라고 빌기만 했을 뿐인걸요.”

    “그래도 다… 당신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신녀님.”

    “제가 감사하죠, 부인. 당신 덕분에 세상이 달라질 텐데요.”

    “저 때문에 세상이 달라진다고요?”

    “네.”

    베로니카가 새하얗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아니죠. 이미 많이 달라졌잖아요. 안 그래요?”

    “네, 그렇긴… 하죠.”

    그녀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다. 

    제크론은 이제 부인과 사별한 남자가 아니었고, 세르안도 역시 엄마를 잃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이미 많은 것이 달라졌다. 

    베로니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부인 덕분에 윌트슨 공작님은 아내를 잃지 않았고, 건강한 아들도 얻었죠. 그리고 윌트슨 공작님이 위벨교의 약초 관리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이유도 다 부인 덕분이잖아요?”

    “…….

    “그래서 로저먼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어요. 사람들이 건강하게 됐다고요!”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기분 좋게 들뜬 사람의 목소리였다.

    “게다가 대신전에서 행했던 마물 연구도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이제 더 이상 대신전은 마물 연구를 지속하지 않을 겁니다. 대신관이 달라졌거든요. 부인 덕분에요.”

    “…….”

    “그러니 윌트슨 공작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물의 독에 중독되는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고요. 그리고 다른 일들은… 앞으로 차차 밝혀지게 되겠죠.”

    어떻게 달라질지 벌써부터 기대돼요! 후후, 기쁨으로 충만한 눈동자의 베로니카가 환하게 웃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래 제크론의 옆자리는 베로니카의 것이었는데, 내가 뺏은 것 같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번 시작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이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내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베로니카의 눈매가 둥그렇게 휘었다. 

    그리고 내 어깨를 다정하게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이건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설마 전생에서의 저와 윌트슨 공작님의 관계 때문에 걱정하는 건 아니시죠?”

    “…….”

    속마음을 정확히 들켜 버렸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던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얼굴을 붉혔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베로니카가 얕은 한숨을 내뱉는 동시에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이세요. 바보 같은 걱정이세요. 제가 사랑했던 제크론은 전생에서 이미 죽었어요. 그를 많이 사랑했고, 우리는 행복했지만, 결국 그 사람은 죽어 버렸죠.”

    베로니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지금의 윌트슨 공작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에요. 그분에게 전 어린 시절 잠시 스쳤던, 기억도 희미한 인연일 뿐이죠. 그건 이번 생의 제게도 마찬가지랍니다.”

    “…….”

    “윌트슨 공작님은 부인을 사랑하세요. 부인을 보는 그분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부인 역시 마찬가지죠. 윌트슨 공작님을 사랑하시잖아요. 그렇죠?”

    “네, 맞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마음껏 사랑하세요. 마음껏 행복하세요. 사랑도, 행복도, 모두 당신의 것이랍니다, 부인.”

    “제게… 정말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물론이죠. 부인께선 위메나 님께서 제게 주신 선물과도 같은 분이세요. 아니죠. 저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주신 선물인걸요.”

    거기까지 말한 베로니카의 표정이 짐짓 경건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다니, 대체 왜?’

    너무 놀라고 당황한 나머지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을 떡 벌리고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의 표정이 무척 비장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시여! 부디 세상 최고의 사랑과 세상 최고의 행복을 누리소서.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한 자격을 지닌 자는 없을 테니.”

    베로니카가 내 손을 소중히 감싸 쥐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날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무척 엄숙하고 정중했다. 

    추앙받는다는 느낌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