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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화 (133/142)
  • 133화

    대신관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가슴에서 시작된 끔찍한 통증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허어, 허억… 허억!”

    이내 대신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마치 곧 숨이 끊어질 사람 같았다. 

    대신관은 두려워졌다. 

    이러다가 진짜 죽을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은 싫었다. 

    대신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떻게 살아온 삶인데…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믿었던 모든 신념들이 한순간에 와장창 깨져 버렸다. 

    길을 잃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든 삶을 위벨교를 위해 바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강해져야 위벨교가 강해지고, 위벨교가 강해져야 제국이 강해진다고 맹신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식의 결과라니…! 이런 죽음이라니!’

    허무한 죽음이었다. 

    의미 없는 인생이었다. 

    대신관은 솟아나려는 눈물을 억지로 꾹 눌러 담았다. 

    입술을 너무 꽉 짓씹었는지 피 맛이 날 정도였다. 

    고통스러워하는 대신관을 지켜보는 신관과 신녀들은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화면 속 세계에는 다시 어둠이 내렸다. 

    주요 귀족을 잃은 황실과 최고 지도자를 잃은 위벨교는 대혼란에 빠졌다. 

    황실과 위벨교는 각자의 혼란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유약한 백성을 굽어살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리! 한 푼만 주십쇼!” 

    “젖먹이 아기가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배고파서 울고 있어요! 제발 좀 도와주세요!” 

    백성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였다. 

    빛의 장막 중앙에 베로니카가 나타났다. 

    화면 속 그녀는 울부짖고 있었다. 

    눈물범벅의 야윈 얼굴은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허공을 보며 위메나를 부르짖었다.

    “위메나시여! 위메나시여! 나의 주인이신 위메나시여!” 

    금방이라도 피를 토하며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이었다. 

    화면 속 베로니카는 두 손을 모은 채 허공을 올려다봤다. 

    “어찌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보잘것없는 저희입니다. 유약한 저희입니다.” 

    위메나께 드리는 기도 한 음절 한 음절에 간절함이 가득 묻어나 있었다. 

    “부디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위메나시여! 부디 저희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자비의 여신, 위메나시여!” 

    결심이 섰는지 화면 속 베로니카는 의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기꺼이 제물이 되겠습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구원을,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위메나시여!” 

    베로니카는 곁에 있던 칼을 들어 제 배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 

    내내 평정심을 지키고 있던 화면 밖의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나!”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럴 수가! 흐흐흑….”

    피 흘리며 죽어 가는 베로니카의 슬픔과 고통이 전해졌기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앞으로 푹 고꾸라진 화면 속 베로니카의 몸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의 머리 크기만 한 신성의 빛 구슬이 만들어졌다. 

    그 어느 빛 구슬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품은 빛 구슬이었다. 

    빛 구슬은 무지개 빛깔로 오묘하게 반짝였다. 

    “와아!”

    “신성이긴 신성인데, 무척 특이하네!”

    “저런 신성은 처음 봐!”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성의 빛 구슬은 하늘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신성의 빛 구슬이 도착한 곳은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였다. 

    바로 엘프윈이 만들어 낸 빛의 장막에서 봤던 곳이었다. 

    눈 오는 날 쓰러진 여인이 있던 곳. 

    신성의 빛 구슬은 쓰러진 여인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그녀의 몸속에 머물던 빛 구슬은 다시 그녀의 몸 밖으로 나왔다. 

    “와아… 신기하네!”

    “신성이 처음보다 더 밝아지고, 더 커졌어!”

    달라진 신성의 빛 구슬은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였다. 

    엘프윈이 만들어 낸 빛의 장막에서 봤던 곳, 윌트슨 공작성의 침실이었다. 

    엘프윈 윌트슨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심하게 아픈 모양이었다. 

    환하게 빛나는 신성의 빛 구슬은 잠든 엘프윈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녔다. 

    마치 신성의 빛 구슬이 엘프윈을 찬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관찰을 다 마쳤던 걸까. 바로 다음 순간, 빛 구슬이 그녀의 몸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강렬한 빛이 엘프윈의 몸에서 팟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빛은 자취를 완전히 감췄다. 

    스르르 몸을 일으킨 엘프윈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다음은 엘프윈이 만들어 낸 빛의 장막에서 봤던 내용들이 잠시 이어지더니 곧 사라졌다. 

    신관과 신녀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 그런 거였구나.”

    “이제 이해됐어.”

    “위메나 님의 기적이었던 거야.”

    “맞아. 이 모든 게 위메나 님께서 하신 일이었어!”

    하지만 대신관은 달랐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의구심으로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지그시 대신관을 바라봤다. 

    대신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앞으로 저희는 어찌해야 합니까?”

    [악행을 멈춰라. 욕심을 버려라. 그리고 기억하는 자들을 옆에서 보좌해라. 그들을 따라라.]

    “기억하는… 자들이요?”

    [이 여인과 이 신녀 말이다. 이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행동을 지켜봐라. 이들을 도와라.]

    대신관은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종교역사학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몇백 년마다 한 번씩 나타난다는 ‘기억하는 자’라는 존재.

    위메나 님의 선택을 받은 존재이자, 사랑을 받는 성녀. 

    대신관은 대예배실을 주욱 둘러봤다. 

    원래 이 자리는 마녀로 고발당한 엘프윈 윌트슨의 영혼 검사의 자리였다. 

    ‘그런데 마녀가 아니라 오히려 위메나 님의 선택을 받은 성녀라니….’

    원래는 다른 세계에 속했으나, 위메나 님의 부름으로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뜬 여인이었다. 

    이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요’였다. 

    대신관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오늘 이 자리와 관련된 모든 이들의 기억을 정리할 수 있다.]

    “기억을 정리하다니….”

    대신관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역시 종교역사학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알고는 있지만, 직접 겪는 건 처음이라 얼떨떨하기만 했다. 

    [지금 이 자리는 로저먼드 월시의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신성수 치료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 그런….”

    [엘프윈 윌트슨이 치료를 의뢰했고, 너는 받아들였다. 그동안 위벨교는 약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에 로저먼드 월시 같은 중독자가 많아졌지. 대신전은 스스로 직접 나서서 제국 내 퍼져 있는 모든 중독자들에게 신성수 치료를 하겠다고 공표할 것이다.]

    “갑자기 그런 대규모의 신성수 치료는… 불가능합니다.”

    대신관이 낭패감이 짙은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그저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니. 가능하다. 너는 그 방법을 알지 않느냐?]

    “그, 그런….”

    대신관이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었다. 

    그리고 방금 빛의 장막 속 영상이 뇌리에 스쳤다.

    마물화된 남자의 피습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제 모습은 섬찟했다.

    오랫동안 막연히 바랐던 제 마지막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인 모습이었다. 

    저를 사랑하고 우러러보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임종을 맞고 싶었다. 

    모두의 안타까운 눈물과 슬픈 한숨 속에서 죽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참혹하게 죽고 싶지 않아!’

    대신관은 앙다물었던 입을 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위메나시여. 아르젠토 차 중독자에 대한 치료를 하루속히 시행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묻겠다.]

    “네, 말씀하시지요.”

    [네 기억은 어찌할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이 자리에서의 기억이 정리되기를 바라느냐? 아니면 그대로 간직하기를 바라느냐?]

    목소리의 물음에 대신관은 잠시 머뭇거렸다.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전생에서의 처절한 죽음 따위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마물화된 인간의 손에 살해당하는 마지막이라니. 

    ‘하지만 그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달라지지 않겠지. 달라지지 않으면… 비슷한 전철을 밟고, 비슷한 식으로 죽게 되려나?’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대신관이었다.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틀릴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결코 조금도 하지 않았던 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달라졌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 버렸다. 

    전생과 같은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됐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허망한 죽음을 이번 생에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결심이 선 대신관은 엘프윈과 베로니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고 싶습니다. 제 기억은 정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좋다. 그렇게 하지. 그전에 내가 선택한 이 여인의 소중한 존재의 치료를 먼저 해야겠군.]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크론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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