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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화 (132/142)
  • 132화

    정체불명의 목소리였다.

    대신관도 많이 당황했는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엘프윈과 베로니카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원래의 엘프윈 윌트슨은 죽을 운명이었다. 죽을 몸에 새로운 영혼을 불러들인 것이니 이 여인은 죄가 없다.]

    엘프윈 윌트슨이 원래는 죽을 운명이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은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움직였다. 

    두려웠지만 의구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설마… 위메나십니까?”

    [우매한 자들이 나를 뭐라 부르건 관심 없다. 나는 너희들과 세상을 만들고 지켜보는 자이니라.]

    “위, 위메나시여!”

    대신관이 넙죽 무릎을 꿇었다. 

    대예배실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도 대신관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의 지난 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물론 행복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암흑이 집어삼켜 버렸지.]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치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지난 생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 신녀는 슬펐고 좌절했다. 고통스러워했다. 나라는 망조로 들어섰고, 종교 역시 휘청거렸으며, 사랑하는 이들은 죽었다. 해피엔딩 이후의 삶은 극악 그 자체였다.]

    사람들은 이해가 힘들었다. 

    나라는 망조에 들었다니?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지 이제 2년. 

    쉐리던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발전하고 성장하는 중이었다. 

    위벨교 역시 휘청거렸다니?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우리 위벨교다. 

    예배실을 채우고 있는 신관과 신녀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신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내게 기도를 하는 것뿐이었다. 스스로의 육신을 제물로 바친 기도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데려왔다.]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서로를 마주 봤다. 

    서로에게로 향한 시선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기운만이 어려 있었다. 

    그러던 엘프윈과 베로니카가 갑자기 고개를 홱 올리더니 대신관을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마녀라니! 영혼 검사를 받아야 한다니! 처형당해야 한다니! 왜 이리도 아둔한 것이냐!]

    신성한 목소리가 점점 격앙됐다. 

    그녀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조된 기운이 예배실 공기를 진동시켰고 거기에 모인 신관과 신녀들은 어깨를 움찔거려야 했다. 

    [대체 왜 나의 의도를 의심하느냐? 위벨교를 위해서라고? 제국을 위해서라고? 모두 다 거짓이다!]

    목소리가 버럭 외쳤다. 

    목소리의 호통에 대신관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꾸지람은 계속 이어졌다. 

    [너는 너만을 위할 뿐이다. 제국을 위해서 위벨교가 강해져야 한다. 위벨교를 위해서는 네가 강해져야 한다. 너를 위해서는 다른 하찮은 것들은 희생될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얼굴에 경멸의 미소가 떠올랐다. 

    바닥을 짚은 대신관의 손이, 신성한 존재 앞에 조아린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리고 깨우쳐라! 제국을 위해서, 위벨교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나의 뜻에 있다.]

    더없이 단호하고, 더없이 위엄이 있는 어조였다. 

    주저함이나 흔들림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뜻은 바로 나와 함께 하는 이 여인과 이 신녀의 선함에 있다!]

    순간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몸 전체에서 파동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휘이이잉.

    마치 장내에 회오리바람이 인 것 같았다. 

    파동으로 인해 대예배실에 모인 모두의 몸이 휘청거렸다.

    여기저기서 흡, 헛숨을 삼키거나 어엇,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도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단상을 꼭 붙들었다. 

    그의 얼굴에 경이로움이 차올랐다. 

    하지만 가시지 않는 의구심도 있었다. 

    대신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위메나시여! 우매한 저희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사 저희들이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위메나 님을 믿고 의지하며 찬양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 네게 믿음이라는 것은 증거를 보여 줘야지만 생기는 것이로군.]

    엘프윈과 베로니카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걸렸다.

    저를 벌레 보듯 하는 그녀들의 태도에 대신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대신관의 표정 따위에 아랑곳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이런 것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구나. 아둔한 너는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피부로 겪어야 깨우치겠구나.]

    말을 마친 엘프윈과 베로니카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파장이 점점 더 늘어나더니 이내 천장 가득 빛의 장막을 만들어 냈다. 

    먼젓번에 엘프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의 장막보다 세 배 이상 더 큰 장막이었다. 

    그리고 빛의 장막에 갖가지 장면이 비추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카악!” 

    “꺄아아!” 

    “으아아악!” 

    날뛰는 마물들. 

    마물들을 토벌하다가 부상당한 사람들. 

    마물의 독에 중독되어 점차 이성과 육체를 잃고 마물이 되어 가는 사람들. 

    내전.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투들. 

    땅에 흩뿌려지는 사람들의 피와 살들. 

    “아빠! 죽지 마! 우리 아빠예요! 아빠 데려가지 말아요!” 

    “여보! 안 돼!” 

    고통에 찬 신음과 울부짖음. 

    옮겨지는 시체들과 시체를 따라가는 통곡 소리. 

    계속해서 이어지는 피폐한 장면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은 얼굴을 찌푸렸고, 눈물을 흘렸다. 

    엘프윈의 영혼이 보여 줬던 장면에 베로니카가 마치 자신의 슬픔인 것처럼 느꼈던 것과 같았다. 

    즉 지금 보이는 장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장면 속 인물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장면 속 인물이 다치면 보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은 고통을 느꼈다. 

    장면 속 인물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면 보고 있는 사람들도 괴로워했다.

    그건 대신관도 마찬가지라 그도 빛의 장막에 비치는 여러 장면을 보는 내내 가슴을 움켜잡았다. 

    마침내 지옥과 같은 장면이 끝이 나고 사람들이 승리의 환호성을 외쳤다. 

    “전쟁이 끝났다!” 

    “우리가 이겼다!” 

    몇 년 동안 이어졌던 전쟁이 끝난 모양이었다. 

    기쁨이 넘치는 빛의 장막 속 장면에 신관과 신녀들의 얼굴에도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고통이나 슬픔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승리의 기쁨이 가슴 가득 들어찼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좋아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다시 통곡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세금 독촉장이에요. 이제 어떡해요?” 

    “먹고 죽으려 해도 없는데! 썩을 놈들!”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나라에서는 너무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다. 

    시름시름 앓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분노에 찬 사람들도 많았다. 

    귀족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이제 슬슬 우리가 나서서 저들을 견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고 손 놓고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 쪽에 인물이 영… 크흠.” 

    당파 싸움이 시작됐고 서로 견제하고 이간질했다. 

    중요 인물들을 향한 암살 시도들이 많았다. 

    살수의 공격이나 독약에 의해 죽는 귀족들이 생겨났다.

    “으윽!” 

    어느 귀족의 집무실. 

    차를 마시던 남성이 쓰러졌다. 

    제크론 윌트슨 공작이었다. 

    “공작님이 돌아가시다니!” 

    “세상에나! 아직 젊으신데!” 

    “그분이 안 계시면 이제 국정 운영은 누가 담당하는 거야?” 

    위대한 전쟁 영웅의 죽음에 국민들은 비통해했다. 

    빛의 장막에 비친 장면을 보는 신관과 신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가리며 비명을 삼키는 사람,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 속출했다. 

    내내 무표정이던 엘프윈과 베로니카도 이 장면이 비출 때만은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 다음 화면에는 위벨교 대신전이 비쳤다. 

    사람들이 모여 있고 단상에 오른 대신관이 연설 중이었다. 

    “지치고 힘들 때일수록 우리가 할 일은 위메나 님께 구하고 또 구하는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고 모였던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 주고 있을 때였다. 

    빵을 받던 남자가 갑자기 격분하더니 대신관에게 달려들었다. 

    남자가 걸치고 있던 로브가 벗겨지면서 붉은 눈동자와 마물화가 진행된 손과 팔이 보였다. 

    돌 같이 검고 우둘투둘한 피부가 자란 마물의 팔. 

    그리고 거대한 손톱이 자라난 손. 

    남자의 팔이 빠르고 거세게 움직였고, 남자의 손이 대신관의 몸을 관통했다. 

    “크억!” 

    대신관의 심장에서 붉은 피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장면을 본 대신관은 가슴을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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