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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화 (131/142)
  • 131화

    빛의 장막에 비친 장면을 보고 있는 신녀 베로니카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사실 엄마와 소녀의 대화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이 무엇인지, 등록금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확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단발머리 소녀가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상처받은 소녀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베로니카의 가슴이 사무치게 아파 왔다.

    소녀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마치 본인이 저 소녀가 된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진 베로니카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다행히 옆에 섰던 아미트 덕분에 쓰러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빛의 장막에는 다른 장면들이 비춰지고 있었다. 

    단발머리 소녀는 이제 다 자라서 여인이 돼 있었다. 

    또 누군가가 여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그녀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곧 장면은 바뀌었고 여인은 어두운 밤길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것으로 보아 겨울인 것 같았다. 

    한 손에 조그마한 상자를 들고 걷던 여인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끼이익! 쿠웅! 

    거친 마찰음이 났고, 충격을 받은 여인의 몸은 공중에 붕 떴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쓰러진 여인의 몸 위로 눈송이가 소복이 쌓였다. 

    흩날리던 눈발을 힘없이 바라보던 여인의 눈이 스르르 닫혔다. 

    이 장면에서 예배실 안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갑작스러운 여인의 죽음에 눈시울을 붉히거나 코를 훌쩍이는 사람이 생겼다. 

    크흠, 탄식 섞인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더러는 쯔즛, 혀를 차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도 했다. 

    한편 베로니카의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졌다. 

    그녀는 거의 통곡하다시피 울고 있었다. 

    마치 갑자기 죽어 버린 여인의 고통과 회한을 그대로 흡수한 것처럼 베로니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이내 베로니카의 몸을 지탱하던 아미트도 결국 힘이 빠졌는지 둘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베로니카는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 본인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흐흐흑, 짙은 슬픔을 담을 흐느낌이 예배당의 공기 중에 스며들었다. 

    그런 베로니카를 매섭게 노려보는 시선이 있었으니, 바로 대신관이었다. 

    미간에 짙고 날카로운 주름이 생겼고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대신관의 상식으로는 베로니카의 상태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성기사들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베로니카를 밖으로 끌어내라는 신호였다. 

    대신관의 의도를 바로 파악한 성기사들이 발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빛의 장막에 새로운 장면이 떠올랐다. 

    어느 귀족 저택의 침실이었다. 

    침대에서 눈을 뜬 사람은 모두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바로 엘프윈 윌트슨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본인이 누구인지, 남편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모습의.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엘프윈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출산하면서 죽게 될 엑스트라에 빙의하다니! 또 죽고 싶진 않아! 이렇게 다시 허망하게 죽을 순 없어! 건강해질 거야! 살아남을 거야!” 

    순간 예배실 안에 혼란이 일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관과 신녀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 놀라움과 황당함을 어떤 식으로든 표출해야 했으니까. 

    “세상에나!”

    “마녀가 맞았어!”

    “역시 그런 사연이 있었군!”

    “빙의라니!”

    “마녀다!”

    빛의 장막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그것에 집중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이로써 엘프윈 윌트슨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다른 세계에서 한 번 죽은 영혼이 엘프윈의 몸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몸을 뺏은 마녀다!”

    “마녀를 처형해라!”

    “죽여라!”

    신관과 신녀들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마녀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이 세계에 절대로 살려 둘 수 없는 존재였다. 

    그때였다. 

    대예배실의 문이 열렸고, 피투성이의 제크론이 칼을 들고 달려왔다. 

    “내 아내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닿는다면 내 칼이 그 손목을 벨 것이다!”

    하지만 제크론의 처절한 몸부림은 엘프윈에게 닿지 못했다. 

    뒤따라 들어온 성기사들이 제크론을 제압한 탓이었다. 

    신성모독죄다! 끌어내라!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예배실 안은 곧 아수라장이 됐다.

    “그…만! 그만!”

    가녀린 목소리였지만 강력한 신성력을 품은 외침에 대예배실 안의 공기가 진동했다.

    어디선가 엄청나게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뭐, 뭐야!”

    “눈부셔!”

    “대체 무슨 일이죠?”

    새로운 빛이 너무 강해서 빛의 장막이 희미해질 정도였다. 

    눈부신 빛이 쏟아지자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점차 환한 빛에 익숙해지자 눈을 뜬 신관과 신녀들의 눈에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아, 아니… 베로니카 신녀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뿜어내는 존재는 다름 아닌 베로니카였다. 

    방금 전까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흐느끼던 베로니카였다. 

    저러다가 기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베로니카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베로니카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마치 중력을 거의 받지 않는 사람처럼 팔, 다리를 무척 가볍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베로니카의 앞을 막아섰다.

    베로니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은 마치 그녀의 몸을 보호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손을 뻗으면 찌릿, 하는 통증과 함께 손이 탈 것처럼 뜨거웠다. 

    결국 그녀의 앞을 막아섰던 사람들은 버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베로니카는 엘프윈이 잠들어 있는 신성수 욕조에 다다랐다. 

    그녀가 엘프윈의 머리에 손을 얹자 엘프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장막이 사라졌다. 

    그와 더불어 엘프윈의 머릿속을 보여 주는 장면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 

    베로니카는 엘프윈을 안아 들었다. 

    가녀린 베로니카가 인상 한 번 안 쓰고 축 늘어진 엘프윈의 몸을 쉽게 들어 올리는 광경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움직이는 여인은 베로니카가 맞았지만, 베로니카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부릅뜨고 베로니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몰랐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이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순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은.

    베로니카는 엘프윈을 욕조에서 꺼내 바닥에 고이 눕혔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크론이 엘프윈을 안았다. 

    “엘프윈! 엘프윈!”

    달려드는 성기사들을 상대하느라 만신창이가 된 제크론의 몸 곳곳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리 불러도 엘프윈의 눈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잠든 아내를 바라보는 제크론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몸에 남아 있던 마물의 독에 의한 중독 증상이었다. 

    “엘프윈! 크헉… 으윽!”

    엘프윈의 이름을 외치던 제크론은 마침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저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내내 감겨 있던 엘프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제크론?”

    하지만 제크론은 그녀의 부름에 대답할 수 없었다. 

    의식을 잃은 그는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제크론!”

    엘프윈은 쓰러진 제크론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엘프윈의 몸에서도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헉! 저, 저게 뭐야?”

    “서, 설마…!”

    기이한 광경에 대예배실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은 충격을 받았다. 

    베로니카가 천천히 엘프윈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엘프윈은 품에 안고 있던 제크론을 바닥에 고이 눕히고는 베로니카의 손을 잡았다. 

    손을 맞잡은 두 여인이 사람들 앞에 섰다. 

    둘의 입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하나였다. 

    엘프윈의 목소리도, 베로니카의 목소리도 아닌 다른 존재의 목소리였다.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손수 데려온 여인을 마녀라 몰아세우다니! 무엄하기 그지없구나, 우매한 자들이여!]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호했고, 또 위엄 있고, 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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