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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130/142)
  • 130화

    ‘로저먼드!’

    몸부림을 치던 로저먼드 역시 날 보고는 무척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이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정말 미안해, 엘프윈! 내가 미쳤었나 봐! 정신이 어떻게 됐던 게 틀림없어. 날… 용서하지 마! 절대로…!”

    로저먼드는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붙잡을 것처럼 손을 뻗었으나 순간 멈칫했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댈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로저먼드의 손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꽉 말아 쥔 두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정말 돌았었어.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의 꼬드김에 넘어가 버렸어. 멍청했던 거지. 그녀들도 내가 멍청한 것을 알고 내게 접근했겠지.”

    “역시…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가 뒤에 있었구나.”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널 궁지에 몰아넣었어. 넌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인데 말이야. 여기서 나가면 죽음으로 사죄할게.”

    차악!

    순간 열불이 나서 로저먼드의 뺨을 내려쳤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큰 타격감은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뺨을 맞은 로저먼드는 당황한 듯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힘없이 떨리고 있었다.

    “죽음으로 사죄하다니. 말 같지도 않은 말 하지 마! 죽을 생각은 꿈에도 말고, 살아! 살아서 죄 갚아!”

    “엘프윈….”

    “날 모함한 죗값! 다 받아 낼 테니까! 이자까지 톡톡히 다 받아 낼 테니까!”

    “그래. 살아서 벌 받을게. 꼭 갚을게. 죽지… 않을게. 흐으윽!”

    결국 로저먼드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서 떨어진 굵은 눈물방울이 그의 주먹을 적셨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도론 공녀와 핸더슨 공녀의 뱀과 같은 혓바닥에 놀아난 로저먼드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미운 마음이 더 컸다. 

    그의 눈물을 닦아 줄 만큼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다시 문이 열렸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시작인 건가!’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열렸던 문은 다시 닫혔고, 안으로 들어온 이들은 베로니카와 아미트였다. 

    앉아있는 날 본 베로니카가 달려왔다.

    “공작 부인! 정말 죄송해요!”

    날 꽉 끌어안은 베로니카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는 기력이 달려서 울 힘도 없는데 로저먼드도, 베로니카도 아직 울 힘은 있나 보다. 

    나는 베로니카의 등허리를 토닥토닥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다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믿어요. 신녀님도 그렇지요?”

    “공작 부인…!”

    베로니카가 몸을 풀고 나를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그녀의 눈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베로니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어요. 제가 공작 부인을 지켜 드릴 거예요. 위메나께서 공작 부인을 지켜 주실 거예요.”

    베로니카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두려움에 덜덜 떨던 창백한 내 손은 베로니카의 따스한 손 안에서 편안한 안정감을 느꼈다. 

    “자, 우리 다 함께 기도를 드리는 게 어떨까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미트 신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저도… 함께 기도드려도 될까요?”

    로저먼드가 쭈뼛거리며 묻자 아미트는 빙그레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베로니카도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네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눈을 감았다. 

    아미트의 입에서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위메나시여. 가엾은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옵고….”

    기도의 힘은 신기했다. 

    기도가 이어지자 그동안 온몸을 강하게 속박했던 두려움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아! 그래, 아직 희망을 버리긴 일러.’

    맞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   *   *

    많은 신관과 신녀들이 대예배실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 대예배실 안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오늘은 마녀로 고발당한 여인의 영혼 검사가 있는 날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혼 검사가 시행됐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다. 

    10년 만에 시행되는 영혼 검사였기에 역사적으로 중대한 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실에 모인 신관과 신녀들은 엄숙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마침내 문이 열렸고, 대신관을 필두로 해서 고위 신관과 고위 신녀들이 줄 맞춰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증인인 아미트와 베로니카가, 또 그 뒤에는 고발인인 로저먼드가, 그리고 맨 뒤에는 고발당한 엘프윈이 차례로 걸어 들어왔다. 

    마지막에는 제크론도 있었다. 

    그가 소란을 피울 것을 걱정했는지 입에는 재갈이, 몸통에는 밧줄이 단단히 감겨 있었다. 

    제크론과 엘프윈이 눈을 마주쳤다. 

    상대에 대한 걱정을 담은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엘프윈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난 괜찮을 거예요.’

    두 눈을 부릅뜬 제크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프윈이 애써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녀로 고발당한 여인이 엘프윈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에 몇몇은 흡, 하고 헛숨을 삼켰고, 또 다른 몇몇은 어머나,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고요했던 실내에 잠시 소란이 일자 대신관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대신관의 눈초리가 날카롭고 매서워 그 자리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예배실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마침내 대신관이 입이 열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로저먼드 월시가 엘프윈 윌트슨을 마녀로 의심하여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억울했던 로저먼드는 한마디 하기 위해 입술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옆에 섰던 성기사에 의해 제지당했다. 

    엘프윈은 로저먼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괜찮아. 그러니까 하지 마.’

    로저먼드는 고개를 푹 숙였다.

    대신관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고위 신관과 신녀들의 신성력을 동원하여 엘프윈 윌트슨의 영혼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대신관이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엘프윈 곁에 섰던 성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른 실내의 중앙에는 신성수로 채워진 욕조가 놓여 있었다. 

    “자, 엘프윈 윌트슨은 신성수에 들어가세요. 신성력이 당신의 영혼을 투명하게 비출 테니까요.”

    대신관의 말에 엘프윈의 가슴이 쿵쾅쿵쾅 거세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엘프윈은 성기사의 안내에 따라 욕조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신성수가 엘프윈의 발목에 감겨 왔다. 

    신성수 치료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엘프윈은 일련의 동작들을 어색하지 않게 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베로니카와 아미트 그리고 로저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슴이 쓰라렸다. 

    베로니카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아미트가 베로니카의 손을 굳세게 잡아 줬다. 

    그때였다. 

    “웁…!” 

    가만히 서 있던 제크론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밧줄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괴력이었다. 

    “우우웁! 우우… 우우웁!”

    재갈을 물고 있어 말은 할 수 없었지만 있는 힘껏 괴성을 내질렀다. 

    “제, 제압하라!” 

    밧줄이 거의 풀리자 제크론은 곁에 섰던 성기사들을 밀치며 엘프윈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제크론은 다시 쓰러졌다. 

    성기사들이 신성력을 사용해 제크론의 몸을 제압한 탓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제크론이 엘프윈을 바라봤다. 

    사랑하는 아내를 구할 수 없는 제 처지가 한심했다. 

    끝도 없는 무력감이 제크론의 몸과 마음을 덮쳤다.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난 정말 괜찮아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제크론! 당신이 다치는 건 더 싫어요!’

    엘프윈이 속으로 간절히 외치며 제크론을 바라봤다. 

    성기사들이 쓰러진 제크론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대로 끌고 갔다. 

    대예배실 밖으로 끌려가는 제크론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엘프윈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럼, 이제부터 엘프윈 윌트슨의 영혼 검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고위 신관과 신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시지요.”

    대신관의 말에 따라 엄숙한 표정의 고위 신관과 신녀들이 신성수 욕조를 빙 둘러쌌다. 

    그리고 곧 그들은 손을 모아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욕조에 앉은 엘프윈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는 신관과 신녀들의 입술을 바라봤다. 

    이 자리에 앉으면 무척 떨릴 줄 알았다.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어.’

    마치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미리 아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 기도를 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의 아이야.]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기이한 현상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였다.

    기도문을 외는 신관과 신녀들의 몸에서 신성력을 담은 빛 구슬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중을 부유하는 빛 구슬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빛 구슬들이 점점 엘프윈에게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넋 놓은 채 보고 있던 엘프윈의 눈이 어느새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엘프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 빛 구슬들이 잠시 그녀의 몸 안을 유영했다. 

    예배실에 모인 모든 신관과 신녀들이 입을 벌린 채 황홀한 광경을 바라봤다.

    ‘아름다워!’

    ‘신비롭군!’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유가 마녀로 고발당한 여인의 영혼 검사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엘프윈의 몸 안을 떠돌던 빛 구슬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바로 더욱 강력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엘프윈의 몸에서 뿜어지는 환한 빛줄기에 사람들은 눈을 찌푸려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빛은 장막을 이루었고, 그 장막 위에 그림이 맺히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그림이었다. 

    마치 연극 같은. 

    베로니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빛의 장막에 맺힌 움직이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그마한 여자아이 두 명이 비쳤다. 

    둘 다 검은색 머리에 진한 갈색 눈동자를 가졌다. 

    몸집이 조금 더 큰 아이는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작은 아이는 콩나물을 다듬는 엄마 옆에 앉아 엄마를 돕고 있었다. 

    “우리 큰딸은 똑똑해서 공부도 잘하고, 발표도 잘해! 이번 웅변대회에서도 대상 받았잖아! 아, 수학경시대회에서도!” 

    “어머, 대단하네! 작은딸도 엄청 똘똘해 보이는데?” 

    “작은딸? 우리 작은딸은… 착해. 이렇게 엄마도 도와주고.” 

    아이가 엄마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콩나물을 다듬는 작은 손이 더 빨라졌다. 

    움직이는 그림들은 계속 이어졌다. 

    작았던 아이는 어느새 자라 소녀가 돼 있었고 길었던 머리카락은 짧아져 있었다. 

    단발머리 소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하게 매달려 있었다. 

    “대학은… 좀 있다가 가자. 지금은 언니 등록금만으로 엄마 등골 휘는 거 너도 잘 알잖아.” 

    “하지만….”

    “가지 말라는 거 아니야.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는 거지. 미안해, 우리 딸.” 

    “…알았어요.” 

    결국 단발머리 소녀는 고개를 떨구었고, 눈가에 맺혔던 굵은 눈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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