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9화 (129/142)
  • 129화

    나는 다른 신녀들 틈에 끼어 마차에 올라탔다. 

    평소 타던 마차와는 많이 다른 마차로 짐마차에 기다란 나무 의자를 설치한 게 다였다. 

    천장이 없는.

    마차에 올라탄 나는 마치 짐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이내 로브를 깊게 눌러 쓰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손을 모은 채 눈을 감았다. 

    베로니카의 조언에 따른 행동이었다. 

    “기도하는 척하면 아무도 말 걸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몇 명이 서로 소곤거리기 시작했지만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길목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제크론을 기대하며 고개를 살짝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아, 저기!’

    저 멀리 말에 탄 기사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제크론과 그의 기사들이리라.

    ‘제크론!’

    두근두근, 곧 제크론을 다시 만날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그때였다. 

    뒤에서 거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성기사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워어… 워어!”

    마부가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느려지는 마차를 보며 나는 좌절했다.

    ‘이런… 들켜 버린 건가? 결국 이대로 다시 대신전으로 끌려가게 되는 건가?’

    쿵쾅쿵쾅,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무서웠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마차가 섰고, 성기사들이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확인이 필요하니 신녀님들은 모두 로브를 내리고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성기사가 외쳤다. 

    그의 손에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가 들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 초상화인 듯했다. 

    ‘역시!’

    결국 들키고 말았구나.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가발을 정돈하고 로브를 내렸다.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두 눈을 부릅떴다. 

    내 얼굴을 확인하는 성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동그랗게 커졌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빙긋 웃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가시지요, 윌트슨 공작 부인.”

    *   *   *

    잠시 전, 제크론은 엘프윈을 실은 마차가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지금이라도 당장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저 앞은 대신전의 영역이었다. 

    예고 없이 무장한 채 대신전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가는 신성모독죄로 처벌을 받는다.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말고삐를 말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굵은 핏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채 한곳만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을 때였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마침내는 완전히 멈춰 섰다. 

    그리고 성기사들이 마차 주위를 에워싸는 게 보였다. 

    “저게 뭐야?”

    제크론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짓씹듯 말했다. 

    곁에 섰던 조쉬가 얕은 한숨을 뱉어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습니다.”

    “안 돼! 이대로 엘프윈을 저들 손에 다시 넘겨줄 수 없다! 내가 직접 가야겠다!”

    고삐를 잡아당긴 제크론이 말에 박차를 가하려 할 때였다. 

    조쉬가 제크론의 앞을 막아섰다. 

    “안 됩니다, 각하! 지금 가시면….”

    하지만 제크론은 아랑곳 않고 말을 몰았다. 

    황실 마법 기사단의 단장 소피아 루커를 비롯한 기사들이 일제히 제크론의 앞을 막아섰다. 

    순식간에 제크론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인상을 구긴 제크론이 소피아를 노려봤다. 

    소피아가 말했다.

    “여기는 대신전에 속한 영토입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군사 행동을 했다가는 신성모독죄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성모독죄는 최소 10년형이고 무기 징역이나 사형을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참으셔야 합니다, 각하!”

    제크론을 말리는 조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금방이라도 이성을 잃고 성기사들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크론은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이건 군사 행동이 아니다. 대신전 측에서 납치해 간 내 부인을 찾으러 가는 것뿐이야.”

    제크론에 말에 바로 반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대신전에 속한 영토이고, 제크론은 무장한 채 황실 소속 마법 기사단과 함께 왔다. 

    잡혀간 아내를 몰래 빼내기 위해서 말이다. 

    결국 소피아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군사 행동이 아니지만 저들이 우기면 충분히 군사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공작 부인 납치 건에 대해서도 저들이 신성을 운운하면서 저들만이 논리를 들이대면….”

    “알겠으니, 그만하지.”

    제크론이 소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금니를 까득 문 탓에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제크론이 말 머리를 돌렸다. 

    ‘다행이다. 살았다!’

    휴우, 조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모두가 안심하던 그때, 제크론은 다시 말 머리를 돌려 말에 박차를 가했다. 

    “으럇!”

    워낙 잽싸게 움직인 탓에 이번엔 누구도 제크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마침내 제크론의 시야에 엘프윈의 모습이 온전히 담겼다. 

    답답하고 비참했던 가슴이 드디어 풀리는 것 같았다. 

    살 것 같았다. 

    “엘프윈!”

    “…제크론!”

    제크론을 보자마자 엘프윈의 눈가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왔다. 

    말에서 뛰어내린 제크론은 엘프윈을 와락 껴안았다. 

    그의 품 안에 안긴 엘프윈의 가녀린 몸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크론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너무 늦게 와서.”

    “제크론….”

    그때였다. 

    성기사들의 칼끝이 제크론과 엘프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윌트슨 공작님께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신전에 속한 땅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칼을 치워라. 그저 내 아내를 데리러 왔을 뿐이니. 보다시피 난 무장도 하지 않았으니까.”

    제크론이 두 눈을 부릅뜨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뭐라?”

    “영혼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 검사라니!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윽!”

    제크론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뒤에 섰던 성기사가 기도문을 외우자 신성의 빛 구슬이 제크론의 손과 발을 구속하며 바닥에 무릎을 꿇렸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신전에 속한 영역의 땅이라서 그런지 신성력이 워낙 강해 제크론은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공작 각하!”

    뒤늦게 말을 달려 도착한 조쉬가 재빨리 몸을 날려 제크론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조쉬 역시 금방 제크론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쉬가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공작 각하께 행한 무례한 행동은 해명이 필요할 것이오!”

    “설령 무기는 없다 하나 아무런 예고 없이 대신전의 영역에 발을 들인 죄와 고발당한 윌트슨 공작 부인의 탈출을 도우려 했던 죄를 물을 것입니다. 압송해!”

    성기사단장의 명령에 성기사들이 옴짝달싹 못 하는 제크론과 조쉬를 끌고 갔다. 

    제크론은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눈으로 엘프윈을 좇았다. 

    “제크론…!”

    엘프윈은 비참한 심정이 됐다. 

    저 때문에 제크론까지 위험에 빠지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다.

    *   *   *

    베로니카는 대신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대신관님, 아미트 신녀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다 제가 부탁하여 제가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아미트 신녀님에게는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베로니카의 울부짖는 소리가 집무실 가득 울렸다. 

    머리를 조아린 아미트와 베로니카를 보는 대신관의 표정은 지극히 무감했다. 

    마치 하등한 존재들이 저지른 하등한 일을 수습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하찮다는 듯이. 

    마침내 대신관의 입술이 느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망입니다. 고작 마녀로 고발당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 위벨교를, 대신전을, 내 뜻을 저버리다니요.”

    대신관은 차분하게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화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언성도 전혀 높이지 않았다. 

    단지 귀찮고 성가신 날벌레들을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처벌에 대한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바로 엘프윈 윌트슨의 영혼 검사를 진행해야 하니까요.”

    “영혼 검사라니요, 대신관님! 그분은 마녀가 아닙니다! 대신관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베로니카가 소리 높여 말했다. 

    대신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는 말을 지껄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된 표정이었다. 

    대신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두 분 신녀님도 증인으로서 검사 현장에 참여하셔야 합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대신관이 곁에 섰던 성기사에게 눈짓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다가와 아미트와 베로니카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에 혼자 남은 대신관은 마시다 만 차를 다시 입가로 가져갔다. 

    특별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10년 만에 하는 영혼 조사인가?”

    대신관은 과거 시행했던 영혼 조사를 떠올렸다. 

    마녀로 고발당한 여인의 영혼을 들여다봤지만 별다른 수확이 없었다. 

    단지 이런저런 능력이 출중하고 운이 좋았던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 여인은 결국 어떻게 됐더라?”

    대신관은 이미 다 식어 버린 차를 마시며 10년 전 마녀로 고발당했던 여인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녀를 마녀라고 고발했던 이는 그녀의 전 약혼자였는데, 허위 사실 고발이라는 죄목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지하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남자는 감옥에서 병을 얻어 죽고 만다. 

    그리고 여인은 저 때문에 남자가 죽었다는 괜한 죄책감과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크흠….”

    씁쓸했던 뒷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일까, 대신관의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이 흘러나왔다. 

    엘프윈 윌트슨도 비슷한 결과를 맞게 되리라. 

    마녀라고 판명되든 아니든 그녀의 인생은 바닥으로 떨어질 게 자명했다. 

    엘프윈의 인생이 흔들리면 그녀 주위 사람들의 인생 역시 흔들리게 되리라. 

    ‘부부 금슬이 좋다던데, 윌트슨 공작의 인생은 얼마만큼 비참해지려나? 윌트슨 공작이 쓸데없이 날뛰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건 좋겠군.’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대신관은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10년 만에 열리는 특별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나서야 할 때였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확인하며 의관을 정제한 대신관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   *   *

    나를 끌고 온 성기사는 잠시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팔을 붙잡고 있던 성기사의 힘이 사라지자 나는 그대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영혼 검사인지 뭔지를 받게 되는 걸까?’

    두렵고 무서웠다. 

    그들이 내 영혼을 들여다본다는 사실은 끔찍했다. 

    ‘그렇다면… 내가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빙의했다는 것도 밝혀지게 되는 걸까?’

    이 세계의 신성력은 강력했다. 

    내 목숨을 구해 준 것도, 원작에서 제크론의 마물 중독을 치료해 준 것도 모두 신성력이었으니까.

    짧은 기도문 하나로 제크론과 조쉬를 단번에 구속했던 것도 떠올랐다. 

    ‘제크론에게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제크론을 떠올리자 가슴에서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만히 앉아 손을 내려다봤다.

    덜덜덜,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인지 눈물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몸속 수분과 혈액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성기사들이 누군가를 끌고 들어왔다. 

    팔을 붙들린 채 몸부림치는 사람의 얼굴을 봤다. 

    ‘로저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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