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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128/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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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화

    베로니카의 바람대로 그녀는 손수 엘프윈의 수발을 담당했다. 

    아미트의 간곡한 요청에 대신관이 승낙했다고 한다. 

    끼이익. 

    베로니카가 문을 열고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엘프윈은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몸이 더 작게 보여 마음이 아팠다. 

    베로니카가 조용히 엘프윈을 불렀다. 

    “윌트슨 공작 부인. 저예요, 베로니카예요.”

    “…….

    “부인. 윌트슨 공작 부인.”

    대답이 없는 엘프윈의 등에 대고 베로니카는 한 번 더 불러 봤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순간 베로니카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설마!’

    엘프윈이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덜컥 겁이 난 베로니카는 엘프윈이 누워 있는 좁은 침대로 바짝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엘프윈의 가슴이 미약하게나마 확실히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다행이야!’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베로니카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 

    “흐흐… 흐흐흑!”

    무서웠다. 

    엘프윈을 구하지 못한 채 이대로 그녀를 놓쳐 버릴까 봐 두려웠다. 

    베로니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온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때였다. 

    그제야 베로니카의 기척을 느낀 엘프윈이 몸을 일으켰다. 

    *   *   *

    흐느끼는 소리에 눈을 뜨고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내 곁에 누군가 바닥에 엎드린 채 서럽게 울고 있었다.

    옆얼굴을 살펴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베로니카 신녀님?”

    “윌트슨 공작 부인! 깨나셨군요!”

    베로니카가 날 와락 끌어안았다. 

    어찌나 세게 안았는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여전히 흐느끼고 있는 베로니카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그녀의 등허리를 토닥토닥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녀님. 전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만 우세요.”

    “흐흑… 괜찮으실 리가요! 공작 부인께서 이런 곳에서 지내시는 게 괜찮을 리 없지요! 흐흐흑… 이런 곳에 갇히시다니! 이건 말도 안 돼요! 흐흑!”

    나는 베로니카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 날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몇 번의 신성수 치료를 받으며 그녀를 만났지만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얼떨떨한 기분마저 들었다. 

    잠시 뒤, 안정을 되찾은 베로니카가 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운 탓에 그녀의 고운 두 눈이 붉게 부어 있었다. 

    “내일 오전, 약초 관리를 담당했던 신관과 신녀들이 추가 조사를 받기 위해 황궁으로 끌려가요.”

    “…….

    “그 틈에 공작 부인을 빼낼 생각이에요.”

    “아….

    베로니카 입에서 나온 탈출 계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대신전에 소속된 신녀였다. 

    그런데 대신전의 최고 수장인 대신관의 말을 거역하고 날 구해 줄 계획을 세우다니.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베로니카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신녀복을 벗기 시작했다.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베로니카는 신녀복을 두 벌 겹쳐서 입었던 모양인지 풍성한 신녀복을 벗자 그 안에 다른 신녀복이 또 나왔다. 

    그녀는 벗은 신녀복을 내게 건넸다. 

    은발의 가발도 함께 있었다. 

    “내일 아침, 이 옷을 입고 계세요. 제가 식사를 가져오면, 그때 같이 나가요.”

    “…….

    “다른 신관과 신녀들 틈에 마차에 올라타세요. 그러면 잠시 뒤 윌트슨 공작님께서 마차를 세우실 거예요.”

    “제크론이요…?”

    “네.”

    베로니카의 입에서 제크론이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운 이름이었다. 

    다시는 불러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이름이었다. 

    “흐흐… 흐흐흑!”

    울고 싶지 않았는데, 절대 눈물 따위 흘리고 싶지 않았는데, 약해지고 싶지 않았는데….

    제크론의 이름 앞에서 나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나 보다. 

    이번엔 베로니카가 내 눈물을 닦아 줬다. 

    “울지 마세요, 공작 부인! 윌트슨 공작님께서 꼭 부인을 구하실 거예요. 제가 도울 거고요.”

    “흐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베로니카가 내 등허리를 토닥토닥 쓸어줬다.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다만 하나 걱정되는 게 있었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그렇지만… 저 때문에 신녀님께서 대신관의 눈 밖에 나고 벌을 받게 되는 건 싫어요.”

    그녀는 대신전에 소속된 사람이었다. 

    날 구하기 위해 대신관의 뜻을 거스른다면 후환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작은 손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억센 힘이었다. 

    억센 손과는 달리 그녀의 입술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편안한 미소를 만들었다. 

    “인간이 내리는 벌은 무섭지 않아요. 위메나께서 내리시는 벌이 무섭지요.”

    “신녀님….”

    “공작 부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어요. 부인을 지키는 것이 제 사명이라는 것을요.”

    “그런….”

    “아무래도 위메나께서 이런 일을 미리 알고 준비하셨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로니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아미트의 뒤에 서서 입을 다문 채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유약한 모습이 아닌 열의와 신념에 찬 모습이었다. 

    초롱초롱 밝게 빛나는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 식사는 남기지 않고 다 드셔야 해요. 그래야 내일 기운을 내서 탈출하죠.”

    “…네, 알겠어요. 감사해요.”

    베로니카에게서 기운을 받은 덕분일까. 

    끄덕이는 고갯짓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전 이만 나가 볼게요.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하면 의심을 살 테니까요. 잊지 마세요. 식사, 꼭 다 하셔야 해요.”

    “네, 잊지 않을게요. 신녀님.”

    나는 애써 미소를 만들며 방을 나서는 베로니카를 배웅했다. 

    베로니카가 사라진 좁은 방 안에 또다시 나 혼자 남았다. 

    10분 전까지만 해도 새하얗고 좁은 방에 갇혀 있는 내 신세가 끔찍하기만 했다. 

    겨우 죽음의 출산을 뛰어넘고 목숨을 부지했다 싶었는데, 그것도 잠시뿐. 

    운명의 여신이 대신관의 손을 빌려 내 목숨을 앗아 갈 것만 같았다. 

    운명이란 워낙 거대해서 나 같은 엑스트라 따위가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남자주인공인 제크론의 메시나 증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여자주인공인 베로니카의 신성수 치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채 그대로 죽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희망이 보였다. 

    베로니카가 날 돕겠다고 했다. 

    제크론이 날 구하러 온다고 했다. 

    작고 희미했지만 확실한 희망의 빛이 저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 살 수 있을 거야! 날 돕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걸!’

    다시 눈가에 맺히려는 눈물을 얼른 훔쳐 내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리고 식판에 담긴 음식을 하나둘 입 안에 넣기 시작했다. 

    빵은 다소 딱딱했고, 수프는 야채 몇 점이 떠 있는 게 다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유의 몸이 될 내일, 내 두 다리를 움직이게 해 줄 귀한 양식이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은발의 가발을 쓰고 새하얀 신녀복을 걸친 상태로 앉아 베로니카를 기다렸다. 

    이곳에 갇힌 이후 내내 한숨도 제대로 못 잤지만 어젯밤만은 달랐다. 

    베로니카의 탈출 계획을 듣고 결의를 다져 식판의 음식을 깨끗이 비운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잊고 잠을 청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잔 덕분에 정신도 맑았다. 

    가만히 앉아 베로니카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긴장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몸이나 풀고 있을까?’

    긴장감을 날려 버릴 생각으로 요소킨 동작으로 몸을 풀었다. 

    며칠 동안 좁은 공간에 갇혀 지낸 탓에 몸을 움직일 기회가 없었다. 

    이 상태로 갑자기 움직이면 근육이나 관절이 놀라 탈이 날 수도 있으리라. 

    “하나, 둘, 셋… 후우! 하나, 둘, 셋… 후우!”

    호흡에 집중하며 몸을 풀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고, 베로니카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표정을 먼저 살폈다. 

    살짝 긴장한 것 같았지만, 눈매를 부드럽게 휘면서 미소 짓는 모습에서 안심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공작 부인?”

    “네. 신녀님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어요.”

    “잘하셨어요. 탈출할 준비는 다 되셨죠?”

    “네.”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베로니카가 내 손을 세게 쥐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긴장되겠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가지려고 노력하세요, 공작 부인. 오늘 밤엔 윌트슨 공작성의 침실에서 주무실 거라고 믿으셔야 해요.”

    “네, 믿을게요.”

    듣기만 해도 황홀한 상상이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거친 소리를 내며 또다시 문이 열렸고, 아미트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미트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른 신녀도 함께였는데, 신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았다. 

    “수면제를 탄 차를 마셨어요. 곧 편히 잠들 거예요.”

    아미트가 속삭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신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녀는 약초 관리를 담당했던 신녀로 조사를 위해 황궁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잠에 빠진 그녀 대신 내가 그녀의 자리에 앉게 됐다. 

    지긋지긋했던 감방을 나오면서 나는 잠든 신녀의 두 손을 꼭 쥐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다음에 이 은혜 꼭 갚을게요.”

    물론 잠에 빠진 신녀는 듣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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