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대신관의 집무실.
대신관과 제크론이 마주 앉았다.
“지하 연구실과 지하 감옥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안내해 주시지요, 대신관님.”
“…….”
자리에 앉자마자 제크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대신관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쉽지 않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제크론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역시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신성력을 운용할 줄 아는 자만 이용 가능한 통로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하 연구실과 지하 감옥으로 연결되는 통로로 안내해 주시지요, 대신관님.”
제크론이 차분한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활활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와는 대비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신관은 시치미를 떼기로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저도 아는 바 없는 통로에 대해서 들으셨다니 의아할 따름입니다. 혹시 클라크 휴딧에게서 들었습니까? 오랜 떠돌이 생활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의 말을 맹신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공작.”
후후, 대신관은 짐짓 여유롭게 웃음까지 흘렸다.
이제 질세라 제크론 역시 피식, 조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 두려워 그렇게도 열심히 클라크를 찾아다니셨습니까? 그런데 어쩝니까? 저희가 먼저 선수를 쳐서요.”
“아, 그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공작이 부상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만. 독이 묻은 화살이었다는 것 같은데… 치료에는 진척이 있었습니까?”
마치 제삼자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은 대신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사건과 위벨교를 분리하려는 속셈인가.
‘암흑 군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성기사단 외에 위벨교에서 관리하고 있는 또 다른 군사 조직.
황실에서조차 파악하고 있지 못했던 군사 조직.
베일에 싸인 군사 조직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공론화시켜야 가장 효과적일지를 생각하는 제크론의 입가에 피식,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직 치료 중입니다. 부상은 안타깝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덕분에 중요한 증거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대신전에 대한 수색 영장도 손쉽게 발부받을 수 있었고 말입니다.”
“크흠….”
대신관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제크론을 노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어느 한쪽으로 조금도 치우치지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한마디로 팽팽했던 줄이 대신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윌트슨 공작에게 독대를 요청 드린 이유는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감히 엘프윈을 입에 담아?
대신관의 입에서 엘프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제크론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불꽃 중에서도 가장 뜨겁다는 푸른 불꽃이 제크론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박혔다.
“로저먼드 월시라는 자로부터 고발이 들어와서 말입니다.”
“로저먼드 월시라면….”
엘프윈의 단 한 명뿐인 옛 친구였다.
제크론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로저먼드의 얼굴과 태도를 떠올리며 대신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고발이라니!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쿵쾅쿵쾅,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제크론의 가슴을 쳐 댔다.
“기억을 잃은 것과 동시에 영혼도 잃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로저먼드 월시란 자가 말입니다.”
“그런….”
제크론은 잔뜩 경직된 상태로 대신관의 입술을 노려봤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입니다. 마녀인 것 같다고 말입니다.”
“마녀라니!”
제크론은 제 귀를 의심했다.
로저먼드 월시가 엘프윈을 마녀라고 고발했다니!
대신관이 엘프윈을 마녀라고 의심하고 있다니!
부르르 치가 떨렸다.
결국 참지 못한 제크론은 칼을 빼 들었다.
대신관의 목을 향해 겨눠진 칼끝이 조명을 받아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아무리 당신이 위벨교의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내 아내를 모욕하는 언사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제크론은 한 음절 한 음절 짓씹듯이 내뱉었다.
칼끝이 급소를 겨누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관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대신관이 빙긋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공작.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칼을 빼든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죄로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수도 있습니다. 위벨 메시나 증서도 이미 써 버렸으니 당신을 구제할 수 있는 수단은 없을 텐데요.”
“…….”
“곧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조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 전에 공작 부인을 모시러 가도록 하지요. 공작 부인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뻔뻔하기 그지없군! 엘프윈은 당신들이 데려갔잖아!”
제크론은 대신관을 향해 버럭버럭 외쳐 댔다.
하지만 대신관은 제크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군요. 그 이야기 역시 클라크 휴딧에게 들은 이야기인가 봅니다.”
후후, 대신관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제크론만 남겨 둔 채 천천히 자리를 떴다.
여전히 허공을 향해 있는 칼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생을 살면서 지금처럼 무력감을 느낀 적은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모함을 당했다.
사랑하는 아내가 이곳에 잡혀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제크론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한심하군.’
툭, 마침내 칼날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제크론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클라크를 이곳에 데려오는 방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으윽!’
제크론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춰야 했다.
갑자기 몰려온 끔찍한 고통에 그는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직 몸 안에 남아 있는 독으로 인한 통증이리라.
‘위급한 순간에 몸은 또 이 모양이라니!’
제크론은 등에 난 상처 부위를 완전히 도려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애써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프윈을 늦지 않게 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 * *
“아앗!”
대신관의 집무실을 나선 제크론이 황급하게 걷고 있을 때였다.
복도의 코너를 도는데 마주 오던 신녀와 쿵 부딪히고 말았다.
“저런,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쓰러질 뻔한 신녀를 붙잡은 제크론이 물었다.
그리고 신녀의 얼굴을 알아본 제크론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어머,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님. 절 기억해 주시는군요.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를 담당했던 베로니카입니다.”
“…….”
“제가 부주의해서 그만 공작님의 길을 방해했네요. 죄송합니다.”
베로니카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제크론은 얼떨떨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살펴 가세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베로니카는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났다.
제크론은 그대로 선 채 사라지는 베로니카의 뒷모습을 가만히 봤다.
‘이게 대체…!’
제크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안에 든 작은 쪽지가 선명히 느껴졌다.
아까 부딪힐 때 베로니카가 그의 손안에 밀어 넣은 쪽지였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제크론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 쪽지 내용을 살펴야 했다.
내부자가 돕는다면 지하에 숨겨진 연구실도, 감옥도 찾을 수 있으리라!
‘엘프윈을 구할 수 있어!’
* * *
제크론은 마차가 대신전을 완전히 벗어나서야 손안에 든 쪽지를 폈다.
쪽지의 내용은 짧았다.
내일 오전. 약초 관리 담당자 이송.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