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로저먼드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신성모독죄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신관님!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엘프윈은 무고합니다! 고발을 철회하겠습니다! 엘프윈을 풀어 주세요!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로저먼드는 성기사들에게 붙잡힌 채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있는 힘껏 소리 높여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반응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로저먼드는 속절없이 성기사들에 의해 끌려갔다.
“위벨교가 대체 언제부터 이따위가 되었습니까! 무고한 시민을 잡아 가두려 하다니요! 나는 죄가 없습니다! 엘프윈은 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풀어 달란 말입니다!”
성기사들에 의해 기나긴 복도를 따라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로저먼드는 쉬지 않고 외쳐 댔다.
복도를 걷던 신관과 신녀들이 많았지만 모두들 끌려가는 로저먼드를 흘끔거리기만 할 뿐 나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먼드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엘프윈을 고발했던 것을 철회한다고요! 엘프윈은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조사를 하겠다는 겁니까! 나도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감옥에 갇혀야 하는 겁니까! 위벨교 대신전이란 곳이 이토록 무시무시한 곳이었습니까! 우우웁!”
마침내 참다못한 성기사가 로저먼드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우우… 우우웁!”
혀를 움직일 수 없게 된 로저먼드는 짐승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은 대신전.
이곳에 그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선 로저먼드의 몸이 마침내 공중 위로 들어 올려졌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버둥거리는 로저먼드의 몸을 성기사들이 그대로 들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기도실로 향하던 베로니카는 로저먼드가 끌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하얗게 질린 베로니카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고발을 철회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사는 계속 이어 나간다고? 공작 부인을 풀어 달리니? 그렇다면 부인께서 지금 여기 갇혀 계신 건가?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쿵쾅쿵쾅, 베로니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엘프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를 지켜 주고 싶다고 열망했던 베로니카였다.
그 열망의 크기는 너무도 거대해서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엘프윈이 위험하단다.
엘프윈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한다.
안 좋은 예감이 베로니카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안 돼! 윌트슨 공작 부인을 구해야 해! 내가 지켜야 해!’
굳은 채 섰던 베로니카의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흐음, 후우….”
방으로 돌아온 베로니카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요동치는 심장을 먼저 진정시켰다.
엘프윈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베로니카는 주저하지 않고 아미트의 방으로 향했다.
“신녀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요.”
아미트가 자신의 방문 의도를 단번에 알아채자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네, 맞아요. 신녀님께선 이미 알고 계셨군요.”
“이리 들어오세요.”
아미트는 다정한 미소와 목소리로 베로니카를 맞았다.
그리고 제 직속 견습 신녀인 베로니카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대신관님께서 이미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변을 확보하셨다고 해요. 공작 부인은 지금 지하 감옥에 계세요.”
“그, 그런…!”
“1층 로비에서 로저먼드 월시란 자가 난리를 치는 통에 들어서 알고 있겠죠? 그는 고발을 철회했지만, 대신관님께선 공작 부인에 대한 검사를 그대로 진행하신다고 해요.”
“검사라니요! 대체 왜?”
아미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베로니카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도저히 베로니카의 상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였다.
베로니카의 근심을 모르지 않는 아미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증인이 있기 때문이죠.”
“증인이라면….”
“바로 나와 베로니카, 그리고 대신관님이요.”
“아….”
공작 부인이 몸 전체로 신성의 빛 구슬을 머금었던 장면을 말하는 것이구나!
베로니카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미트가 베로니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공작 부인이 마녀인지 성녀인지 아니면 다른 특별한 존재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어요.”
“으….”
베로니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을 열면 눈물도 같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신성수 치료로 몇 번 만났던 게 전부인 공작 부인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공작 부인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그녀에게 마음을 쏟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도 왜 이렇게 그녀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게 드는 것일까.
베로니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녀님, 부탁이 있어요.”
“뭔가요?”
“검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분의 수발을 들고 싶어요. 식사를 챙겨 드리고 씻겨 드리고 싶어요.”
“…….”
“제가 맡아도 될까요? 제발… 부탁드려요.”
베로니카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미트를 바라봤다.
아끼는 견습 신녀를 향한 아미트의 얼굴에 난색이 떠올랐다.
* * *
수도에 도착한 제크론 일행은 바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중간 길목에서 황립 마법 기사단과 합류했다.
텔레포트 터널로 이동한 마법 기사단은 먼저 수도에 도착해 황궁으로 가 대신전에 대한 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서 온 참이었다.
이로써 대신전을 조사할 명분은 확실히 생겼다.
‘엘프윈, 제발 무사해야 해.’
제크론은 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잠시 뒤 대신전에 도착한 제크론은 대신관 앞에 수색 영장을 내밀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전의 주도하에 마물에 대한 불법 연구와 실험이 자행됐다는 증인과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대신관이 여유 있게 미소 지으며 길을 내주었다.
제크론은 평온한 대신관의 얼굴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대신관의 일거수일투족이, 표정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서 빨리 움직여야 했다.
어서 빨리 엘프윈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황립 마법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일제히 흩어져서 수색을 시작했다.
클라크의 증언에 따르면 마물에 대한 연구와 실험은 지하 연구실에서 시행됐다고 했다.
지하 연구실과 지하 감옥은 같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고도 했다.
수색을 맡은 대부분의 기사들은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갔다.
급한 마음에 제크론도 그들의 뒤를 따라 지하실로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곁에 섰던 조쉬와 매튜가 제크론을 막아섰다.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상태의 제크론이었다.
특히 독에 의한 부상이 문제였다.
몸을 많이 움직이면 아직 몸속에 남아 있는 독이 더욱 퍼지게 된다.
그러므로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하지만 제크론은 멈추지 않았다.
제 팔을 붙잡은 조쉬의 손을 천천히 떼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멀론 경, 이 손 놔야 할 거야. 난 내 아내를 찾아야 할 의무가 있어. 아내를 위한 일은 곧 우리 가문을 위한 일이기도 해. 가문을 위한 일에 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각하, 하지만….”
제크론의 팔을 붙잡았던 조쉬의 팔이 스르르 떨어졌다.
제크론의 매서운 눈초리와 엄중한 목소리에 조쉬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제크론을 막아설 수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매튜도 마찬가지였다.
조쉬와 매튜는 시선을 교환하며 조용히 제크론의 뒤를 따르기로 정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 * *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신만만하게 시작했던 수색은 별다른 수확 없이 끝났다.
지하 연구실은 찾았지만 마물을 연구했던 흔적은 하나도 없었다.
지하 감옥은 찾았지만 엘프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지? 클라크는 분명 대신전의 지하 연구실이라고 했는데! 엘프윈도 분명히 여기 잡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지 제크론은 이미 수색한 연구실과 감옥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봤다.
하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마물 연구에 대한 증거도, 엘프윈도 찾을 수 없었다.
‘없어…. 이럴 수가!’
후우, 제크론이 탄식 섞인 신음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하고 있는데, 마법 기사 단장 소피아 루커가 입을 열었다.
“마탑에도 마나를 운용할 줄 아는 마법사들에게만 보이는 통로가 따로 마련된 내밀한 공간이 있습니다. 외부에 공개하기 꺼려지는 것들은 주로 그 공간에 쌓아 두는 편이죠.”
“내밀한 공간이라….”
“네. 어쩌면 대신전도 그런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신성력을 운용할 줄 아는 자에게만 보이는 통로로 연결된 공간 말입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잔뜩 찌푸린 얼굴의 제크론이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부인에게만 보이고, 그들만 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평면도에도 나와 있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수색 영장으로 강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군.”
“그렇습니다. 그것을 노리고 특별히 만든 공간이니까요. 그런 공간 따위는 없다고 발뺌하면 그만이죠.”
“흐음….”
제크론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숨겨진 통로를 찾기 위해서는 신성력을 운용할 줄 아는 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클라크라면 가능하겠지만, 그가 대신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대신관이 그의 목을 노릴 게 자명했다.
잠시 고민하던 제크론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대신관에게 직접 물어봐야겠군.”
전면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어!
제크론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반대편에서 신관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크론 앞에 선 신관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대신관님께서 윌트슨 공작님과의 독대를 원하십니다.”
“안 그래도 대신관님을 만나러 가려던 참일세.”
신관의 뒤를 따르는 제크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꽉 다문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는지 그의 턱 근육이 움찔거렸다.
‘어떤 간교를 피우시려고 독대를 청하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