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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25/142)

125화

대신관의 입술이 느른하게 움직였다. 

“보통은 말입니다. 신녀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성의 빛 구슬들은 환자의 몸으로 흘러들어 상처를 치유하고 그대로 사라지지요. 순식간에 말이죠.”

“…….”

“하지만 당신의 몸 안으로 들어갔던 신성의 빛 구슬들은 달랐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당신의 몸에 남아 계속 빛을 발했지요. 그 모습이 어찌나 기묘하고, 또 아름답던지….”

대신관은 당시의 상황을 눈앞에 그려 보는 것처럼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의 눈을 하고서. 

“그, 그건 왜 그런 거죠? 내 몸에 무슨 무,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통에 목소리까지 떨렸다. 

갑자기 두려움이 물밀 듯 밀려들어 왔다. 

내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로저먼드의 말은 사실이니 말이다. 

엘프윈은 기억만을 잃은 게 아니라, 영혼까지 다 잃은 게 맞으니까 말이다. 

떨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대신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걸 알아보고자 당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조사할 필요가 있어서요.”

“조사라니… 어떤 조사죠?”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조사가 될 것입니다.”

“영혼을 들여다본다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위벨교의 신관과 신녀들이 갖고 있는 신성력은 과연 어떤 것까지 할 수 있을까?

신성력을 사용한 치료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 

죽을 뻔했던 날 살려 줬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엘프윈의 몸에 빙의됐다는 사실도 알 수 있을까?

이 몸속에 있는 내 영혼이 원래 이 세계에 속한 영혼이 아님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내가 엘프윈의 몸에 빙의됐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무서워…!’

숨이 턱 막혔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을 꽉 맞잡았다. 

대신관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여전히 내 표정 변화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의 말에 내가 동요하고 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럼 검사가 시작될 때까지 쉬면서 기다리세요. 고위 신관과 신녀가 모두 모이는 이틀 후에 당신의 영혼 검사가 진행될 예정이니까요.”

마지막 말을 남긴 대신관은 유유히 감방을 빠져나갔다. 

하아, 막혔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동시에 눈물도 펑펑 쏟아져 내렸다. 

흐흐흑….

울면 지는 것 같아 참아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흐흐흑….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마녀가 아니야! 하지만….’

하지만 그들의 눈에 마녀로 보인다면, 나는 마녀가 되고 만다. 

연신 눈물이 흘러나오는 눈을 감았다.

어두워진 시야 속에 빛 한 줄기가 비추더니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 

이 세계의 주인공이자, 나를 사랑해 주는 이! 내 남편, 제크론의 얼굴이었다. 

‘제크론… 구해 줘요! 날, 여기서 꺼내 줘요! 제크론!’

온 힘을 다해 가슴속으로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날 이 어둠에서, 이 두려움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제크론뿐이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제크론 일행을 태운 마차가 어두운 숲길을 달리고 있었다. 

[제크론… 구해 줘요! 날, 여기서 꺼내 줘요! 제크론!]

“헉!”

머릿속을 울리는 엘프윈의 목소리에 놀란 제크론이 번쩍 눈을 떴다.

조쉬와 매튜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제크론에게 향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 아니야, 괜찮아.”

제크론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짧게 대답했다. 

창문을 열자 찬바람이 들어와 열을 식혀 주었다. 

그들은 밤새 마차를 달려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엘프윈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먼저 최정예 기사들에게 임무를 내렸지만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수확이 없었다. 

대신전을 상대로 몰래 잠입하여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제크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조쉬와 매튜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의 몸을 염려했지만 이번에는 제크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엘프윈의 남편이었다. 

제크론은 먼저 대신전을 수색할 계획이었다.

그들이 엘프윈을 잡아갔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었다. 

오로지 심증만 있을 뿐. 

하지만 대신전을 수색할 근거는 많았다. 

약초 관리에 대한 조사로 이미 한 번 대대적인 수색이 이뤄졌다. 

이번엔 마물 실험에 대한 조사로 수색을 진행할 참이었다. 

클라크의 증언에 독화살에서 추출한 독까지 더하니 수색 영장을 발부 받기에 충분했다. 

‘엘프윈…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조금만 더 버텨 줘. 곧 갈 테니까.’

제크론의 머릿속은 온통 엘프윈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꽉 말아 쥔 두 주먹에 굵은 핏줄이 불끈거렸다. 

*   *   *

로저먼드는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엘프윈의 얼굴이 나타나 그의 휴식을 방해했다. 

“으으… 엘프윈…!”

로저먼드는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질렀다. 

술도 마셔 보고, 아르젠토 차의 힘도 빌려 봤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점점 정신이 또렷해질 뿐이었다. 

또렷해진 정신 속에서 엘프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로저먼드를 쳐다볼 뿐이었다. 

원망의 말을 퍼붓거나 짜증을 내는 것도 없이 그저 지그시 그를 볼 뿐이었다. 

싱그러운 녹음을 담은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를 마주 볼 용기가 로저먼드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아 봐도 사라지지 않는 엘프윈의 모습에 로저먼드는 미칠 노릇이었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이쪽을 봐도, 저쪽을 봐도 엘프윈의 얼굴만 보일 뿐이었다. 

“엘프윈… 으으… 미안해…!”

이런 식으로 벌을 주려는 것일까. 

그녀를 배신한 것에 대한 벌을. 

로저먼드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쳤다. 

“컥!”

그때였다. 

순간 로저먼드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흐이익!”

거대한 독사 두 마리가 쉭쉭, 무서운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서늘한 비늘이 촘촘히 박힌 굵은 몸뚱이가 서서히 로저먼드를 옥죄어 왔다. 

독사 두 마리는 메리엔과 제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으으… 으아아악!”

겁에 질린 로저먼드의 입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옆방에 있던 그의 보좌관이 비명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왔다.

“소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소공작님!”

하지만 안타깝게도 보좌관의 외침은 로저먼드의 귀에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을 헉헉 내쉬는 그는 차렷 자세로 버둥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두 눈을 부릅뜬 모습이 아무래도 위태로워 보였다. 

‘발작이다!’

보좌관은 재빨리 침대 옆에 있는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바로 호텔 직원이 달려왔고, 의원을 불러 달라 요청했다. 

다행히도 호텔에 상주하는 의원이 있었다. 

로저먼드는 강력한 신경 안정제를 맞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찾고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로저먼드는 호텔을 나섰다. 

힘겨운 밤을 보냈던 터라 피부는 퍼석하고 눈 밑은 거뭇했지만 눈동자만은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확신에 찬 눈동자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였다. 

‘엘프윈, 내가 잘못했어.’

로저먼드는 사과의 말을 가슴에 담은 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곧바로 대신전으로 향했다. 

*   *   *

잠시 뒤.

“엘프윈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고발을 철회하겠습니다. 제가 잠시 착각했어요. 그녀처럼 정상인 사람이 마녀일 리가 없지요.”

로저먼드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대신관은 로저먼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관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이미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지금 고발을 철회한다고 해도 진행 중인 조사를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네? 고발자가 고발을 철회했는데도 말입니까? 이게 무슨…? 고발 자체가 사라지는데 조사는 계속한다니… 이해가 힘듭니다.”

로저먼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대신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오히려 이해가 힘든 것은 우리 쪽입니다. 다른 고발도 아니고, 마녀 고발입니다. 그 어느 사안보다 더욱 중요한 사안입니다.”

“…….”

“그런데 하루아침에 고발을 철회하다니요! 고발을 얼마나 쉽게 생각했으면 이따위입니까! 우리 위벨교를 얼마나 쉽게 생각했으면!”

대신관이 호통치듯 외쳤다.

대신관의 높은 언성에 로저먼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로저먼드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대로 물러서면 엘프윈이 위험해진다. 

제 아둔한 실수로 엘프윈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로저먼드는 용기를 끌어모아 다시 입을 열었다. 

“위벨교도, 고발도 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좀 더 신중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엘프윈에 대한 고발을 없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대신관님께 진심으로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로저먼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로저먼드를 내려다보는 대신관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울 뿐이었다.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그, 그게….”

대신관의 매정한 반응에 로저먼드의 머릿속도, 얼굴색도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대신관을 올려다봤다. 

대신관의 무감한 얼굴 위에 잔인한 미소 한 줄기가 잠시 스쳤다 사라졌다. 

그 순간 로저먼드의 목덜미에 소름이 쭈뼛쭈뼛 올라왔다. 

“엘프윈 윌트슨의 마녀 고발에 대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고발자가 고발을 철회했다고 해도 증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죠. 그러니 이 고발 건에 대한 조사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 그런…! 증인이라니! 그게 누구인가요? 설마 메리엔 도론 공녀와 제나 핸더슨 공녀인가요?”

로저먼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대신관은 피식, 싸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엘프윈 윌트슨의 마녀 고발에 대한 증인은 바로 그녀의 신성수 치료를 담당했던 두 신녀와 그리고 바로 나, 대신관 크레이그 셰년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안 됩니다! 이건 억지입니다! 엘프윈은 마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곧 있을 영혼 검사를 통해 밝혀질 테지요.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여자가 마녀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엘프윈이 감옥에 갇혀 있습니까? 그, 그런…! 이 사기꾼! 위선자!”

로저먼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럭버럭 외쳤다. 

마치 금방이라도 대신관을 향해 달려들 것 같았다. 

곁에 섰던 성기사들이 로저먼드의 팔을 양옆에서 붙잡았다. 

“뭐, 뭐야! 이거 놔! 대신전은 무고한 시민을 이런 식으로 대해도 되는 것입니까!”

로저먼드가 두 눈을 부릅뜨고 외치자 대신관이 목소리를 높여 명령했다. 

“신성모독죄를 범한 로저먼드 월시를 엄히 다스리고자 한다! 죄에 합당한 처벌이 내려질 때까지 감옥으로 끌고 가라!”

“명 받들겠습니다, 대신관님.”

로저먼드의 팔을 붙잡은 성기사들은 바로 대신관의 명령을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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