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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조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매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뭐 이런 흐리멍덩한 대답이 있단 말인가.
제국 최고로 유능하다는 의원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쉬의 험악한 표정이 매튜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매튜는 머릿속에 이는 회오리바람을 애써 잠재우며 다시 제크론의 상처를 꼼꼼히 살폈다.
화살촉이 박혔던 상처 주위에는 검고 딱딱한 피부가 돋아나 있었다.
마치 마물의 피부 같았다.
언젠가 엘프윈이 언급했던 적이 있는 증상이었다.
“…마물의 독에 의한 중독 증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매튜의 발언에 제크론과 조쉬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독을 지닌 마물에 대해서라면 방금 클라크의 증언에서 들었다.
위벨교의 신전에서 행해지고 있는 마물의 조사 연구의 한 축이 독을 지닌 마물이라고 했다.
그 자리에 매튜는 없었다.
매튜는 지금 막 이곳 페이거에 도착한 참이었으니까.
황실 마법 기사단의 기사들 역시 이런 증상은 처음 본다고 했다.
마법 치유술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자들이었기에 갖가지 특이 증상의 환자를 치료했던 경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방금 전까지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조쉬의 얼굴이 편평하게 펴졌다.
눈앞의 의원은 분명 제국에서 최고로 유능한 실력자가 맞는 것 같았다.
“위벨교 신전의 마물 조사 연구단에서 활동했던 클라크 휴딧이란 자가 말하더군. 그들이 현재 만들고 있는 변이 마물은 쉽게 죽지 않는 마물과 독을 내뿜는 마물이라고.”
“아, 역시!”
제크론의 설명에 매튜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마님이 했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놀라웠다.
엘프윈의 얘기를 들었을 땐 사실 긴가민가했다.
마물의 독에 중독된 증상에 대해서 보고된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프윈이 워낙 확신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그리고 인위적 힘에 의해 변이 마물이 생겨났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쩌면 엘프윈의 말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사실이었다니!
‘마님은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아신 거지?’
몇 개월 전 기억을 잃은 엘프윈은 아주 기본적인 것을 몰라서 물어올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여기가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아무도 모르는 것을 엘프윈 혼자 아는 듯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배 속에 있는 아이의 교육에 효과적이라든지, 동물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어서 그 감정을 잘 어루만져 줘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독을 지닌 마물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지금 그런 것들이나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야.’
매튜는 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제크론을 보며 물었다.
“혹시 다른 특이 증상은 없으셨습니까? 의식을 잃는다든지 날뛰거나 뭔가를 부수고 싶은 난폭한 성향이 발현된다든지 말입니다. 아, 그리고 눈동자가 붉어진다든지요.”
“그러고 보니… 기운이 없으시고 잠이 늘었습니다.”
조쉬가 대신 대답했다.
제크론도 조쉬의 답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께서 말씀하셨던 증상들과는 좀 차이가 있군. 하지만 이 검고 딱딱한 피부는 마물의 피부 조직과 비슷한 건 확실해.’
매튜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 가지 추론에 도달했다.
‘실험 중이라고 했으니…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형태의 독은 아직 개발 전이란 얘긴가?’
이 추론이 맞는다면 엘프윈이 한 얘기는 더욱 이상해진다.
아직 개발도 되지 않은 독에 대해서 문외한인 엘프윈이 빠삭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매튜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생겼다.
* * *
“으으….”
눈을 뜨자마자 깨질 듯한 두통이 머리를 강타했다.
이곳에 끌려온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하실처럼 보이는 이곳은 사방 전체가 하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창문이 하나도 없었고, 등불 대신 조명석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두통이 가시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감싸 쥔 채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였다.
끼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눈을 뜨고 낯선 인물을 바라봤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중년 남자였다.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베로니카가 입고 있던 옷과 비슷했다.
‘신관인가?’
남자는 들고 온 물컵을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나를 쳐다보는 남자의 눈은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썩 편안한 미소는 아니었다.
어딘가 뒤틀린 미소였다.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엘프윈. 나는 위벨교의 대신관, 크레이그 셰년입니다.”
‘아, 이자가 대신관이라니!’
눈앞에 선 남자의 뜻밖의 정체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대신관을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신성수 치료 중 잠이 든 나를 본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날 납치하고, 이런 곳에 가둔 사람이 위벨교의 대신관이었다니! 대체 이유가 뭐죠?”
“…….”
내 물음에 대신관은 대답 없이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전히 기분 나쁜 미소였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짜증이 솟구치자 목소리가 커졌다.
“날 어서 풀어 줘요! 설마 나를 붙잡고 제크론을 협박하는 얕은수를 쓰려는 건 아니겠죠? 위벨교의 대신관이라는 자가?”
나를 바라보던 대신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리더니 그의 얼굴 전체에 퍼져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핏기 없는 얇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엘프윈, 당신이 이곳에 갇히게 된 이유는 윌트슨 공작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
“당신이 이곳, 위벨교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있는 이유는 누군가 당신을 마녀라고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마녀라니…!”
황당한 단어의 등장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알고 있는 마녀란 마법 주술을 읊고 다니며 선량한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악한 존재였다.
하지만 난 마법 주술 따위는 할 줄 모른다.
사람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나보고 마녀라는 거야?’
순 억지였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손발이 차게 식으며 부들부들 떨렸다.
“난 마녀가 아니에요. 대체 누가 그런 고발을 한 거죠? 왜요?”
“로저먼드 월시란 자입니다.”
“로저먼드…!”
대신관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로저먼드라니!
그 로저먼드라니!
엘프윈의 친구, 그 로저먼드라니!
순간 열기가 눈가로 몰리기 시작했다.
대신관이 내 표정 변화를 면밀히 살피는 눈치였다.
그에게 내 감정을 일일이 다 내비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을 막을 방도도 없었다.
“두 분… 어린 시절부터 무척 친했다고 하더군요.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였다고. 하지만 다시 만난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고 합니다.”
“…….”
화가 들끓는 통에 집중이 어려웠다.
머릿속이 핑 돌았고, 귓가가 웅웅 울렸다.
하지만 대신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집중했다.
“열병으로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나, 사고방식이나 행동 방식까지 완전히 달라졌다고요. 그것은 기억을 잃은 것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를 잃은 것 같았다고, 로저먼드가 말하더군요.”
마침내 나는 대신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다른 증거도 없는데… 고작 한 사람의 고발이 있었다고 이렇게 바로 감옥에 가둬 두다니요! 이건 말이 되지 않아요!”
참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와 버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기억을 잃었다고 마녀 취급이라니요! 이치에 맞지 않아요! 로저먼드와는 사소한 다툼이 있었어요. 그래서 홧김에 그런 걸 거예요. 로저먼드와 만나게 해 주세요!”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그대로 대신관을 노려보며 외쳤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기이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범위의 이야기였다.
“사실 저도 증인이긴 합니다. 아니지. 저뿐만 아니라 아미트 신녀와 베로니카 신녀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게 무슨…?”
“신성수 치료를 받을 때 말입니다. 엘프윈, 당신의 몸은 신성의 빛에 기묘한 반응을 보였어요.”
“…….”
이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내 몸이 이상했다고?
대신관과 신성수 치료를 담당했던 신녀들이 그 증인이라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