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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123/142)

123화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더욱 많은 백성들이 더욱 높은 수준의 안녕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위기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 생각의 결과가 바로 마물의 변이 실험이었습니다.”

군사력이 성장하고, 마물에 대한 정보가 쌓임에 따라서 마물 토벌 작전의 효과가 몇 배 상승하면서 마물의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마물이 멸종될 거라 걱정한 대신관은 강력한 마물을 만들 것을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일부는 순종했지만, 클라크를 비롯한 일부는 거세게 반발했다. 

대신관은 반발하는 무리들을 하나둘 쳐내기 시작했다. 

연구에서 점차 배제시키더니 결국엔 신전 밖으로 내쫓았고, 암살했다. 

“저와 함께했던 많은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운이 좋았던 탓에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내내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던 클라크도 동료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마침내 울부짖으며 말했다. 

“대신관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쉽게 죽지 않는 마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는 마물을 만들고 있어요! 그들을 막아 주십시오! 우리… 위벨교를, 제국을, 인류를 구원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흐흐흑, 결국 클라크는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엉엉 통곡했다. 

조사실 가득 울리는 클라크의 울음소리에 자리에 있던 모두는 착잡한 심정이 됐다. 

그때였다. 

똑똑똑,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다급히 안으로 들어온 기사가 제크론에게 서신을 건넸다. 

서신을 읽은 제크론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서신은 매튜로부터 온 것이었다. 

거기엔 어젯밤 투숙 중이던 여관에서 엘프윈이 사라졌다는 끔찍한 소식이 적혀 있었다. 

제크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윽!”

하지만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화살은 꽤 몸속 깊은 곳까지 박혔고, 게다가 독까지 묻어 있어 치료가 까다롭다고 했다. 

마법 기사들의 마법 치유술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좀 더 정밀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제크론은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당장 달려가서 엘프윈을 찾아야 했다. 

그녀를 구해야 했다. 

제크론이 걸음을 떼려는데 조쉬가 앞을 막아섰다. 

“각하, 아직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이거 놔라! 명령이다.”

제크론이 매섭게 외쳤지만, 조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이것은 제크론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까. 

조쉬가 제크론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각하, 이성적으로 판단하셔야 할 때입니다! 각하의 몸에 이상이 생기면 결국 마님도 구하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일단 치료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조쉬 멀론! 지금 내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것이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제크론의 외침과 몸부림이 점점 과격해졌다. 

하지만 지금의 제크론은 부상당한 몸. 

평소였다면 앞을 막아서는 조쉬 따위 금방 제압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조쉬에게 팔을 붙들린 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제크론은 조쉬를 노려보며 버럭버럭 울분을 쏟아내기만 할 뿐이었다. 

조쉬가 다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각하, 지금은 몸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 할 때입니다. 마님을 데려간 이들은 누구겠습니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그들이 나서서 요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머리를 써서 움직여야 합니다, 각하. 그러니 지금은 좀 진정하세요.”

조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결국 제크론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엘프윈을 데려간 일당은 위벨교의 신전에 소속된 자들일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뻔했다. 

‘…클라크 휴딧을 달라 하겠지. 아니면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의 전면 중단을 요구하거나.’

제크론은 으득 이를 갈았다.

그는 조쉬에게 잡혔던 팔을 거칠게 풀면서 말했다. 

“좋아. 일단 대신관에게 서신을 보내 면담을 요청하겠다. 그의 반응을 보고 우리도 대응 방침을 정한다. 하지만 그 전에 조용히 기사를 풀어 엘프윈의 행방을 파악해야 한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가 어디에 잡혀 있는지 확실히 파악하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명 받들겠습니다!”

제크론의 명령에 조쉬를 비롯한 기사들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울음을 멈춘 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클라크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   *

대신관의 집무실. 

짧은 편지에서 눈을 뗀 대신관의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마음 편하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그래요.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지요. 이제야 제대로 하네요.”

후후, 편지를 고이 접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편지는 제크론에게서 온 것이었다.

갈겨 쓴 글씨체로 봐서 다급한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당장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당장 만나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조금 더 시간을 끌어서 애를 태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제대로 알려 주고 싶었다. 

감히 위벨교를 건드리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역시 조금은… 기다리는 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좋겠지.”

후후, 대신관은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편지를 촛불에 가져가 태웠다. 

불이 붙은 편지가 화르르 타올라 완전히 자취를 감췄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신녀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신관님, 윌트슨 공작 부인이 깨났습니다.”

신녀의 보고에 대신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경우,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는 호칭은 너무 과분합니다. 게다가 보안상 비밀을 유지해야 하니 말이죠.”

“네? 그럼….”

“용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겠군요.”

“네, 알겠습니다.”

신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자 대신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말해 보세요.”

“네?”

무엇을 다시 말해 보라는 건지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신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대신관이 두 눈을 반짝이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용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다시 말해 보란 말입니다.”

“아… 네. 그, 저… 대신관님, 용의자가 깨났습니다.”

“훨씬 듣기 좋군요.”

후후, 대신관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녀의 귀에는 그 웃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려 닭살이 일었다. 

“일단 그대로 놔두세요. 용의자에게도 기다리는 시간을 주는 것이 나쁘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한 신녀는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신녀의 입에서 후우, 탁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의 집무실을 벗어나자 좀 살 것 같았다. 

으으, 몸서리를 친 신녀는 어깨를 쓸며 다시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집무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   *   *

케이트와 주디는 일부 기사들과 함께 뎀프샤로 돌아갔고, 매튜는 남은 기사들과 함께 제크론이 있는 페이거에 왔다. 

매튜는 조쉬를 보자마자 다급하게 물었다. 

“각하께선 어떠십니까?”

“치료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화살촉에 묻은 독이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치료 과정이 더딥니다.”

“독이라고요?” 

매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조쉬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독이요. 여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새로운 독이라고 합니다. 마법 치유술로도 완치를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신성수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성수 치료요?”

“네.”

매튜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쉬는 매튜를 제크론의 방으로 안내했다. 

마침 제크론은 치료를 마친 상태였다. 

“제가 상처 부위를 직접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매튜의 부탁에 제크론은 감았던 붕대를 다시 풀어야 했다. 

상처 부위를 확인한 매튜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가 이내 곧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눈썹 사이를 바짝 좁히며 찡그렸다가 또다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다. 

긴장한 채 매튜의 표정 변화를 주시하던 조쉬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이런 증상을 본 적이 있소?”

“본 적은 없지만, 들은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조쉬가 얼굴을 찡그리며 매튜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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