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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얼굴에 때가 껴 분간이 쉽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안색이 그대로 보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제크론이 물었다.
“그놈들은 누구지? 또 그놈들이 만드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 무엇이지?”
“그건….”
클라크는 뜸을 들였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제크론에게 닿았다가 뒤에 있던 조쉬에게로 옮겨졌고, 또 글렌에게 잠시 머물렀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제크론에게 다시 닿았을 때, 클라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꾹 닫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클라크의 대답을 들은 다른 이들의 입에서는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제크론만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처음부터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길거리에서 주저리주저리 외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막상 기회가 주어지면 주저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불안한 상태라면 더더욱 그러하리라.
처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클라크를 닦달할 생각이 없었다.
제크론은 상체를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댔다.
충분히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조쉬였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목청을 가다듬은 조쉬가 입을 열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워낙 좁고 조용한 공간이라 모두가 조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각하, 이곳에 앉아 계속 시간을 끄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 말고 누군가 이자를 쫓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쉬의 말에 먼저 반응한 것은 제크론이 아닌 클라크였다.
아무래도 ‘누군가 이자를 쫓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에 긴장한 것이리라.
클라크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글렌이 나섰다.
“걱정 마십시오. 주위에 저희 기사단의 기사들을 배치시켜 뒀습니다.”
“좋아.”
제크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쉬는 달랐다.
조쉬는 근심 가득한 표정과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접근해 올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변이 마물이라는 기상천외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이들입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습격해 올 수도 있습니다.”
“…….”
제크론과 조쉬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히자 조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상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염려하는 것이 보좌관의 역할이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맞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클라크가 소리쳤다.
미친듯이 흥분한 상태였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악랄한 짓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피해야 합니다! 그들이 날 찾아올 거라고요! 당신들은 그들을 당해 낼 수 없어요!”
클라크는 산발인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마침내 제크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가겠나?”
제크론의 물음에 클라크는 헛숨을 집어삼켰다.
제크론을 담은 클라크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발했다.
클라크는 뒷걸음질 쳤다.
제크론마저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시, 싫습니다! 당신들을 어떻게 믿고! 안 돼요! 싫어요! 저리 가!”
클라크는 방구석으로 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었다.
후우, 제크론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클라크는 정신적으로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클라크의 증언을 받아 내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았다.
이 상태라면 증언의 신빙성도 의심해 봐야 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지금은 일단 철수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제크론의 명령에 조쉬와 글렌, 그리고 다른 두 명의 기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제크론이 이번엔 클라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클라크, 당신은 우리를 따라와도 좋고, 여기 남아도 좋소.”
제게 선택권을 줘서 놀랐던 것일까.
클라크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우리를 따라와 준다면 좋겠지만, 여기에 남는다고 해도 일정 병력이 이곳 주위를 지키고 있을 것이오. 당신을 지켜 주겠소.”
클라크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놀라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곧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내가 속을 줄 알고? 쳇! 어림도 없지! 날 가두려는 속셈인 걸 모를 줄 알고? 다 똑같아!”
클라크는 아예 머리를 벽에 박고 눈을 감고 남은 한 손으로 귀를 막았다.
제크론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 억지로 끌고 간다면 입을 완전히 막아 버리는 꼴이 되리라.
글렌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기사단이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래, 좋아.”
황실 마법 기사단이라면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마법을 다루는 동시에 검술 실력도 출중한 자들이니까.
제크론은 글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클라크가 곁눈질로 사라지는 제크론의 뒷모습을 쫓았지만, 제크론은 눈치채지 못했다.
* * *
마법 기사단 지부로 가기 위해 말에 오르려는데 글렌의 낌새가 이상했다.
걸음을 멈추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눈을 감았다.
텔레파시로 대화 중인 것 같았다.
황실 마법 기사단의 기사들은 서로 텔레파시 사용이 가능했다.
제크론과 조쉬도 걸음을 멈춘 채 글렌을 기다렸다.
잠시 후, 텔레파시 마친 글렌을 눈을 떴다.
“복면을 쓴 자들이 접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하! 어서 몸을 숨기셔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건물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리기로 하지. 내가 직접 그들을 상대하겠다.”
조쉬는 제크론의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사단의 총책임자가 작은 업무에 일일이 나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괜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되도록 막아야 했다.
하지만 조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발로 직접 뛰는 것이 제크론의 방식임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조쉬는 속으로 한숨을 집어삼키며 군소리 없이 제크론의 뒤를 따랐다.
글렌의 마법 덕분에 제크론과 조쉬는 그림자에 몸을 숨기는 것이 가능했다.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식이었기에 일반 사람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복면을 쓴 자들이 건물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발이 거의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기척을 완전히 숨긴 채 무척 가볍고 빠르게 움직이는 폼이 범상치 않았다.
복면 쓴 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고, 그들 중 한 명이 문에 손을 얹는 것을 신호로 제크론 일행이 동시에 그림자에서 나왔다.
바로 칼싸움이 시작됐다.
침입자들을 생포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했기에 급소는 피하면서 공격했다.
채앵, 챙!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퍽, 퍼억, 퍽! 몸이 부딪히는 소리,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는 소리가 공기를 어지럽게 진동시켰다.
침입자들은 일단 수적으로도 열세였고, 예상치 못한 습격에 당황한 눈치였다.
제크론과 마법 기사단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복면 쓴 자들을 하나둘 궁지로 몰아넣었다.
마침내 복면 다섯 명을 모두 제압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침입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허공에 치켜들었다.
“안 돼!”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놀란 제크론이 외쳤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복면들은 들고 있던 단검으로 제 목을 스스로 그었다.
큽, 커헉!
크어억!
마지막 숨을 거칠게 내뱉은 침입자들은 피를 뿜으며 그대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기사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피가 새어 나오는 상처 부위를 손으로 막고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치유 마법이었다.
“반드시 살려내라! 한 명이라도, 꼭!”
제크론이 기사들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제발! 꼭!
제크론은 속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꽉 말아 쥔 주먹에도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렸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진실의 물약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한 발 늦은 것 같았다.
아무리 치유 마법이라고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문을 외던 기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저으며 축 늘어진 시체에서 몸을 뗐다.
“클라크를 데려와라.”
“네, 각하.”
제크론의 명령에 기사 중 한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클라크가 기사의 손에 이끌려 문 밖으로 나왔다.
클라크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상태였는데,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진 복면의 침입자들을 보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했다.
제크론이 클라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자들이 당신을 해하려고 했소. 이자들이 누군지, 어디 소속인지 알아보겠는가?”
“으….”
클라크는 두려움이 들어찬 눈으로 제크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으니 묻지 말라, 라는 뜻이었다.
제크론은 클라크에게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라크, 잘 들어! 계속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도울 수 없어! 저들은 오늘은 비록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곧 목표를 달성하게 될 거야. 이대로라면 저들이 당신의 숨통을 끊어 놓는 건 시간문제라고!”
제크론은 한 단어 한 단어를 씹듯이 내뱉었다.
제크론의 진심이 통했던 것일까.
흐리멍덩했던 클라크의 눈동자가 서서히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클라크는 여전히 떨면서도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위, 위… 위벨교입니다. 저자들은 위, 위벨교의 암흑 군사들입니다.”
“위벨교의 암흑 군사라니?”
제크론의 미간이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