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화 (119/142)
  • 119화

    대신전의 대예배실. 

    약초 관리를 담당했던 신관과 신녀들이 무릎을 꿇고 줄지어 앉아 있었다. 

    며칠 동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터라 그들의 모습은 몹시 초췌했고 눈빛은 퀭했다. 

    몇몇은 거의 실성하기 일보 직전의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대신전의 지하 감옥이란 곳은 무서운 곳이었다. 

    사방이 새하얗게 칠해진 깔끔한 방이었는데, 한 명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그렇게 작은 방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버텨 낼 수가 없었다. 

    지하 감옥의 벽은 방음 또한 완벽해서 옆방에서 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온전히 나 혼자 남은 기분. 

    아무것도 없는 좁은 곳에서 영원히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끔찍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절대로. 

    벌벌벌 떠는 신관과 신녀들 앞에 양피지 종이와 깃펜이 차례로 놓여졌다. 

    연단에 선 대신관은 모두에게 양피지 종이와 깃펜이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할 준비가 된 자들을 위한 종이와 깃펜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부디 그대들이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랍니다. 이는 나의 바람일 뿐만 아니라, 자애로우신 위메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대신관은 모든 감정을 배제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대신관의 목소리에 어떤 이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또 어떤 이는 몸을 완전히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신관과 신녀들은 대신관의 한마디 한마디를 두려워했다. 

    마침내 그들은 덜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워낙 기운이 달리기도 했고, 정신적으로 많이 위축된 상태이기도 해서 양피지 종이를 채우는 글씨가 꼬불꼬불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쨌든 약초 담당 신관과 신녀들은 종이를 차근차근 채워 나갔다. 

    대신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잠시 스쳤다. 

    눈앞의 저들이 낱낱이 적은 죄목을 모아 정리하고, 차후 대책까지 강구해서 황실로 직접 찾아갈 작정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고, 그 해결책까지 마련했다고 황제의 얼굴에 대고 당당하게 말할 작정이었다. 

    ‘애석하게도 일의 선수를 뺏겼지만, 칼자루마저 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황제여.’

    승리감에 도취된 대신관의 눈동자에서 위험한 빛이 번득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잰걸음으로 대신관 곁으로 다가왔다. 

    마물 연구에 앞장서는 고위 신녀 중 한 명이었다. 

    대신관의 눈썹 사이에 짙은 주름이 파였다. 

    “무슨 일이죠?”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다급한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말하세요.”

    무미건조한 명령이 떨어졌다. 

    고위 신녀는 대신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라크 휴딧을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대신관의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커졌다. 

    포커페이스는 완전히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관의 험악한 표정에 신녀는 긴장하며 흡, 헛숨을 삼켰다. 

    하지만 지체할 수 없는 중요한 보고였기에 신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런데?”

    신녀가 뜸을 들이자 대신관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날카롭게 되물었다. 

    “황실 마법 기사단에서 한 발 앞서 그를 찾았다 합니다.”

    “뭐라고요?”

    대신관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외쳤다. 

    순간 대예배실에 모인 모든 이의 시선이 대신관에게로 달려가 꽂혔다. 

    하지만 지금 대신관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순간 대신관의 몸속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화가 치솟은 탓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고, 꽉 말아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후우, 대신관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대로 분노에 잡아먹힐 수는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클라크 휴딧, 네 이놈을! 황실이 먼저 그 녀석을 채 가게 둘 수 없어! 절대로!’

    소식을 전한 고위 신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대신관의 눈동자 앞에서 어깨를 말고 바들바들 떨었다. 

    대신관은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 집무실로 향했다. 

    고위 신녀도 거의 뛰다시피 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 앞에는 마물의 연구를 맡은 고위 신관과 신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붙은 대신관의 얼굴에서 그의 분노가 그대로 느껴졌다. 

    집무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대신관은 고함을 질렀다. 

    “클라크 휴딧을 당장 잡아 오세요! 죽여서라도 내 눈앞에 데려오세요! 황실보다 우리가 먼저 잡아야 합니다!”

    좀처럼 소리를 지르는 일 없었던 대신관의 고함에 집무실에 모인 신관과 신녀들은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대신관의 외침은 계속 이어졌다. 

    “빨리 움직이세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클라크 휴딧의 목을 내게 가져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당장!”

    *   *   *

    미치광이 외팔이를 찾았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제크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바로 글렌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쉬도 제크론의 뒤를 따랐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 더미에 파묻히는 것보다 몸을 쓰는 일이 훨씬 낫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황실 마법 기사단과 함께 작업하면서 좋은 점이 있다면 바로 시도 때도 없이 텔레포트 이동 터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갑자기 벽면에 번개가 치면서 터널이 생기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적응이 영 어려웠지만, 그 터널 안으로 뛰어들어 이동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이 널따란 제국에서 이동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혜택이었다. 

    공작성의 보좌관실 벽면에 난 텔레포트 이동 터널은 라하브에 있는 황실 마법 기사단의 훈련실로 연결됐다. 

    훈련실에 도착한 제크론 일행은 다시 새로운 이동 터널을 이용해 제국 남서부의 도시, 페이거에 위치한 마법 기사단 지부로 갔다.

    “여기서부터 대략 30분 정도 말을 타고 이동하면 됩니다.”

    페이거에 도착 후, 글렌의 안내에 따라 제크론과 조쉬는 말에 올라탔다.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도착한 곳은 외진 골목에 있는 낡은 건물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글렌은 간략한 설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이름은 클라크 휴딧입니다. 마법 기사단 지부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 거부가 심했습니다. 강제할 수 없었습니다.”

    “알았네.”

    고개를 끄덕인 제크론은 글렌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자리가 두꺼운 판자로 막혀 있어 실내가 무척 어두웠다. 

    글렌이 차고 있는 팔찌에 박힌 마법석 중 조명석을 작동시켜 주위를 밝혔다. 

    실제 등불보다 훨씬 밝은 불빛 덕에 어두웠던 실내는 단숨에 밝아졌다. 

    삐걱거리는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똑똑, 글렌이 가볍게 노크를 하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제크론과 조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방 안 구석 모퉁이에 허름한 차림새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저자가 클라크 휴딧!’

    제크론은 많이 지친 표정의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비쩍 마른 클라크는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머리가 산발인 데다 얼굴과 팔다리에 검은 때가 가득했다. 

    ‘미치광이 외팔이’란 별명처럼 왼쪽 팔이 있어야 할 소매는 비어 있었다. 

    제크론은 클라크 앞으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나는 제크론 윌트슨 공작이라 하오.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의 총책임자요.”

    마침내 클라크가 고개를 들어 제크론을 바라봤다. 

    제크론에게 향한 클라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다시 느릿하게 흘러 나왔다. 

    “클라크 휴딧, 당신이 변이 마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는 제보를 받았소. 그 얘기 내게도 해 줄 수 있겠소?”

    “…….”

    클라크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으나 클라크를 주저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제크론은 의자를 끌어다가 클라크 앞에 마주 앉았다. 

    “기다리겠소. 하고 싶은 말이 정리될 때까지.”

    불안한 상태의 클라크를 닦달할 생각은 없었다. 

    긴장감이 가라앉고 편안한 상태가 되면 자연스레 입을 열리라. 

    시간이 조용히 흘렀다.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그, 저….”

    마침내 클라크가 입을 열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클라크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당황했는지 어깨를 움찔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클라크의 쉰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왼팔을 어쩌다 잃었다 생각하십니까? 이게 다 그놈들 때문입니다!”

    클라크는 오른 손으로 왼쪽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속이 빈 왼팔 소매가 힘없이 펄럭거렸다. 

    “그놈들은 이상한 것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지요! 그 희생자가 바로 나고요!”

    침착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던 클라크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지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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