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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후원을 한 바퀴 다 돈 우리는 다시 현관으로 왔다.
“당신을 뺏길 시간이 되고 말았군.”
“뺏기다니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맞는 말이지. 요소킨 운동 중에는 당신 얼굴을 못 보니까 말이야.”
제크론의 투정이 듣기 좋았지만 나는 억지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요소킨 운동 덕분에 제가 점점 건강해지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만 생길 걸요?”
“아, 물론 그렇긴 하지.”
생글생글 웃는 미소가 보기 좋았다.
제크론은 유모차에 누워 있는 세르안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요소킨 부인들께 인사나 해 볼까?”
“정말요?”
“당신 잘 부탁한다고.”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제크론의 모습이 너무 환상적이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흐물거리는 건 덤이었다.
우리 세 식구는 현관으로 가 요소킨 운동 손님들을 기다렸다.
오늘은 특히 수업에 참관하는 손님이 많을 예정이었다.
지난번 쇼핑에서 만났던 슈라더 후작 부인의 친구들, 해리스 남작 부인과 맥퍼딘 백작 부인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에 만났던 어린 영애들, 로빈슨 영애와 브라운 영애가 각자의 어머니들과 함께 참석할 예정이었다.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의 눈치를 보느라 오지 않을 확률이 높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아무래도 어린 영애들보다 어머니들 쪽을 공략한 방법이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알타라스를 타는 것도 한몫한 것 같고.
즐거운 마음으로 생글거리며 진입로 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당신 많이 신난 것 같군.”
“그럼요. 신나죠.”
나는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제크론의 눈매가 한껏 가늘어졌다.
금세 부루퉁한 얼굴이 됐다.
“질투 나는군. 역시 당신을 뺏기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단 말이야.”
“아휴, 참. 이젠 그만 좀 해요.”
“…….”
제크론은 입을 꾹 다문 채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세르안이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옹알이를 신나게 하는 게 아닌가.
“꺄아, 아아… 어엄, 아아…!”
“그렇지? 우리 세르안도 엄마랑 같은 생각이지? 아빠가 너무 소심하고 예민하게 구시는 것 같지?”
“으음… 아암, 어어, 끄으…!”
“역시 세르안은 엄마 마음을 잘 알아준다니까. 효자야, 효자!”
“꺄아, 아암… 으암!”
“아유, 알았어요, 알았어! 상 줘야지, 그럼요!”
세르안의 오동통한 볼에 쪼옥, 소리 나게 뽀뽀했다.
우리 모자의 대화 모습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제크론이 또다시 불퉁하게 입을 열었다.
“나 지금 좀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불편하고, 또 질투가 나는군.”
“또 그런다.”
“나도….”
“당신도, 뭐요?”
제크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한쪽 뺨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행동의 의미가 파악된 순간 온몸의 열이 얼굴로 몰렸다.
“뭐라는 거예요, 정말! 미쳤나 봐.”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며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쳤다.
하지만 제크론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채근했다.
“어서. 저기 마차 들어오잖아. 가까이 오기 전에.”
“…….”
“이것도 안 해 주면 오늘 당신 운동실로 못 보낼 것 같은데?”
갑자기 눈매를 날카롭게 만든 제크론이 망설이는 내게 협박까지 날리는 게 아닌가.
으으,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진입로로 들어오는 마차를 봤다.
볼 뽀뽀를 하려면 마차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해치워야 했다.
“알았어요.”
나는 얼른 까치발을 하고 제크론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아니, 그의 볼에 입을 맞추려고 했다.
‘아?’
그런데… 실패했다.
결정적인 순간 제크론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내 입술은 원래의 목적지인 볼에 닿지 못하고, 외딴 곳인 입술에 닿아 버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제크론이 남은 한 팔을 내 허리에 단단히 두른 탓이었다.
보드라운 그의 입술이 집요하게 닿아왔다.
내 입 안을 채운 뜨거운 숨결이 한바탕 회오리쳤다.
잠시 뒤 그의 입술이 아쉬운 듯 떨어졌다.
“나머지는 밤에 마저 하기로 하지.”
제크론이 생글생글 능청스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를 노려보면서 날카로운 대꾸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얼굴 근육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였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들이 연달아 도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는 메릴 일행을 태운 마차가, 그다음으로는 슈라더 후작 부인 일행을 태운 마차가,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는 로빈스 영애 일행을 태운 마차가 도착했다.
현관 앞은 총 열한 명이나 되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보통 귀부인들은 서로 만나면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재잘대기 바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는데, 귀부인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모두 제크론에게 가 있었다.
특히 제크론을 가까이에서 처음 본 어린 영애들, 로빈슨 영애와 브라운 영애는 입까지 아 벌린 채 감탄한 듯 제크론을 바라봤다.
눈, 코, 입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에 가까운 창조물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으레 보이는 반응이었다.
마침내 앨리슨과 슈라더 후작 부인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어머나! 세 식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명화 속 한 장면 같아요!”
“그러게요! 어쩜 윌트슨 공작께선 아기를 안고 서 있는 모습마저 웅장하신 거죠?”
호호호, 귀부인들의 입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장난기 가득한 시선을 내게 건네며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엘프윈 얼굴이 많이 빨개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다기보다는 마치 나쁜 짓 하다 걸린 소녀 같은 표정인데요?”
“아까 멀리서 보니까 두 분이 찰싹 붙어 있던데. 그래서 그런가? 아닌가? 내가 잘못 봤나?”
앨리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얄궂게 물었다.
귀부인들이 ‘어머, 어머!’ ‘에이, 설마요!’와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호호호 웃어 댔다.
‘윽, 역시 다 보였던 건가?’
예리한 물음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서서 제크론의 팔을 움켜잡았다.
당신이 수습해요, 라는 신호를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제크론이 바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대략 두 시간 동안 이 사람을 여러분들께 뺏길 거라고 생각하니까 질투가 나서 말입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그래서 입술에 살짝 점을 찍었을 뿐입니다.”
“어머나! 질투가 나신다니!”
“입술에 점을 찍었다니! 남사스러워라!”
“두 시간 정도는 양보해 주셔도 좋잖아요!”
“두 분이 금슬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두 시간도 못 기다릴 정도면… 호호호!”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제크론의 발언에 귀부인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꺄르르 웃어대기 바빴다.
여기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 중에 웃지 못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아니, 수습을 하랬더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괜히 억울해졌다.
심술이 난 나는 제크론을 힐끗 흘겨봤다.
하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며 애써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냈다.
보는 눈이 많았다.
게다가 나는 손님을 맞이하는 호스트였으니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자자, 가여운 절 놀리는 건 이제 그만 멈춰 주시고, 어서 운동실로 올라가시죠!”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멈추고 싶은 마음이 없었나 보다.
이번엔 조안과 맨디가 입을 열었다.
“아니, 가엽다뇨? 누가요? 엘프윈이요? 부럽기만 한 걸요!”
“맞아요! 이렇게나 훌륭하신 남편 분이 단 두 시간도 떨어져 있기 힘들어하시는 귀한 몸이신걸요!”
호호호, 귀부인들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몸을 홱 돌렸다.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걸어가며 다시 외쳤다.
“어서 들어오시기나 하세요!”
* * *
윌트슨 공작성의 보좌관실은 오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보좌관, 조쉬와 부보좌관 두 명, 그리고 조수 두 명까지 총 다섯 명의 인재들이 두 눈에 불을 켠 채 이런저런 서류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때였다.
한쪽 벽면에 번쩍, 파지지…직! 번개 같은 것이 치는 것 같더니 이내 텔레포트 이동 터널이 생겼다.
“깜짝이야! 이건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니까!”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조쉬가 몸서리를 쳤다.
터널에서 황실 마법 기사단의 부단장, 글렌 손더스가 튀어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멀론 경. 오늘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글렌이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했다.
조쉬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미리 연락도 없이 이른 시간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윌트슨 공작님께 급하게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미치광이 외팔이에 대한 보고입니다.”
순간 조쉬의 두 눈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반짝였다.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졌고, 자칫하다가는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찾았습니까?”
조쉬가 거의 외치다시피 묻자 글렌은 고개를 단정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