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고개를 든 베로니카는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살폈다.
자신의 침실임을 확인한 베로니카는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꿈이었구나!’
기도하는 중에 그대로 잠들었는지 그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침대에 엎드린 채였다.
으으….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오랜 시간 동안 무릎 꿇은 자세로 잠들었던 탓에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았나 보다.
베로니카는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긴 꿈을 꾸었는데도 창문 밖은 아직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지?’
마치 하나의 소설 같은 꿈이었다.
아니, 꿈 같지도 않았다.
현실 같은 꿈, 혹은 꿈같은 현실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평행 세계’라는 곳이 진짜 존재한다면 꿈속의 장면이 평행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았다.
진짜이면서도 가짜인, 가짜이면서도 진짜인.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람!”
베로니카는 혼자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꿈에서 봤던 장면, 장면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아닌가.
등장인물들이 내뱉었던 대사들마저 뚜렷하게 귓가에 울렸다.
보통 장황한 꿈을 꿨다고 해도 깨난 지 10분 정도가 지나면 꿈에서 봤던 장면이나 내용은 거의 휘발된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꿈속 장면이나 내용이 휘발되기는커녕 베로니카의 머리와 가슴 안에서 크기를 점점 키워 갔다.
쿵쾅쿵쾅, 그녀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정신없이 뛰었다.
한 편의 소설을 닮은 꿈속 이야기는 감동스럽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무척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대체 뭐지, 이 기분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베로니카는 다시 눈을 감고 조용한 목소리로 외쳤다.
“답을 주세요, 위메나시여!”
* * *
제나 핸더슨과 메리엔 도론이 아침 일찍부터 로저먼드를 찾아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그녀들을 맞은 로저먼드는 연신 하품을 뿜어 댔다.
원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로저먼드는 특히 어젯밤엔 잠이 더 오지 않은 탓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한 상태였다.
“이른 아침부터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궁금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어제 대신전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요? 대신관님을 만나셨나요? 대신관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월시 소공작님의 말을 믿어 주던가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질문이 모조리 로저먼드의 뇌에 닿지 못한 채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로저먼드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그리고 어제 대신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마지막에 대신관은 로저먼드에게 물었다.
“이번 고발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누구죠?”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입니다.”
“그렇군요.”
대신관은 잠시 입을 닫은 채 생각에 잠겼다.
대신관의 눈썹 사이가 좁아지면서 짙은 주름이 생기는 것으로 보아 꽤 난감해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대신관의 입이 다시 열렸다.
“소공작님의 고발 건에 대해서 우리 신전에서는 성심성의껏 조사를 할 것입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과 면담을 진행하고, 그 영혼을 살펴볼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이 고발 건에 대해서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한 사람을 마녀로 규정하는 것은 당사자의 인생뿐만 아니라, 고발자의 인생, 그리고 쉐리던 제국과 위벨교의 역사에서도 무척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일말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에게는 오늘 대신전에 왔지만, 대신관을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한 달 뒤로 약속 시간을 잡았으니 그때 고발할 생각이다, 라고 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심하세요. 오늘 고발 건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대신관님.”
고개를 든 로저먼드는 앞에 앉은 제나와 메리엔을 쳐다봤다.
흐리멍덩 졸린 눈을 연출했고,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눌러 담는 듯 시늉했다.
“어제 대신전에 갔습니다, 갔어요. 하지만 대신관님을 만나지는 못했어요.”
“대체 왜요? 왜 만나지 못하셨는데요?”
다급한 제나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로저먼드는 졸린 눈을 비비는 연기를 하면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야… 어제 대신전의 상태가 말도 아니더라고요.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황실에서 위벨교 신전을 상대로 대규모 조사를 진행한다고 하더라고요.”
“아… 맞아요. 그랬죠.”
메리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탈하게 말했다.
로저먼드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라하브 사교계의 중심인물들이니 라하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 위벨교 신전의 부실한 약초 관리에 대한 황실의 조사가 시작됐음은 이미 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된 내용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제나와 메리엔은 다시 기운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녀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씹으며 로저먼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로저먼드는 크흠,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한 달 뒤 대신관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약속을 잡았습니다.”
“한 달 뒤라고요?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닌가요?”
날카로운 제나의 물음에 로저먼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되도록 심드렁한 목소리를 만들어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황실 조사에 대응하느라 무척 바쁘신 모양이니까 말입니다.”
제나와 메리엔의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떠올랐다.
잔뜩 기대하고 이른 아침부터 달려왔는데, 듣고 싶었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하아, 그녀들의 붉은 입술에서 동시에 짙은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로저먼드는 졸린 연기를 하느라 눈꺼풀을 반쯤 닫은 상태로 그녀들의 낙담한 얼굴을 봤다.
속이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 * *
“와아! 예쁘다! 귀여워라!”
나는 눈앞에 놓인 조그마한 유모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생의 삶에서 봤던 다양한 기능의 유모차에 비교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지만, 자그마한 아기 침대에 햇빛 가리개와 바퀴, 그리고 손잡이 정도가 달린 게 다였지만 그래도 훌륭했다.
우리 세르안의 유모차였으니까.
내가 직접 밀 수 있는 유모차였으니까.
“깜찍하죠?”
“마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네요.”
케이트와 주디가 내 반응에 당황했다.
마치 유모차를 처음 본 사람처럼 보였나 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세계의 유모차는 정말 처음 보는 걸.
손잡이로 팔을 뻗는데, 케이트와 주디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마님! 유모차를 미는 건 저희가 해야죠!”
“마님께선 그런 거 하시면 안 돼요!”
“아, 그…래?”
하, 하하…. 민망한 웃음을 흘린 나는 뻗었던 팔을 내려놨다.
완전한 귀족적 마음가짐을 갖추는 건 내겐 아직도 먼일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가 하면 되겠군.”
그때였다.
별안간 제크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회의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빨리 끝냈지.”
제크론이 싱긋 웃으며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았다.
처음 잡아 보는지 어색한 몸짓이었다.
“주인님께서 직접 미시게요?”
“저희가 하면 되는데요.”
케이트와 주디가 다시 휘둥그레 커진 눈으로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아무래도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제크론이 빙그레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여긴 내게 맡기고 너흰 가서 다른 일을 봐도 좋아. 우리 세 식구 오붓하게 산책하고 있을 테니.”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따사로운 햇살 같은 제크론의 미소를 영접한 케이트와 주디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도 같았다.
역시 우리 남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기술이 좋으시다.
눈빛 한 방, 목소리 한 방이면 좋아 죽으니 말이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삼키며 제크론을 올려다봤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는지 제크론이 물었다.
“왜?”
“그냥, 좋아서요.”
“나도 그래.”
평범한 말도 제크론의 입에서 나오면 모두 달콤한 대사처럼 들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가요.”
제크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가 유모차를 천천히 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르안이 꺄아, 꺄르르, 소리 내며 웃었다.
왕! 왕! 평소에 잘 짖지 않던 위든도 오랜만에 목소리를 냈다.
우리의 관심이 세르안에게 쏠리자 살짝 질투를 내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우리 위든까지 해서 네 식구 하자, 응? 그럼 됐지?”
왕, 왕!
위든이 마치 내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대답하듯 짖었다.
“역시 똘똘한 녀석이란 말이야.”
“맞아요.”
가벼운 대화와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이어지는 즐거운 산책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