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베로니카는 아직 순순히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할 요량으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입을 다시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목소리를 얻지 못했다.
아미트가 먼저 나선 까닭이었다.
아미트는 베로니카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는 제 어깨 위에 놓인 아미트의 손에서 강력한 의지를 느꼈다.
더 이상의 발언은 득이 아니라 해가 될지도 모르니 자중하는 게 좋다는.
베로니카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대신관님. 베로니카 신녀의 경솔한 생각과 발언은 사수인 제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관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베로니카는 음흉해 보이는 대신관의 미소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대신관님도 윌트슨 공작 부인의 몸이 신성의 빛 구슬에 이상 반응을 보이자 가장 먼저 성녀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셨잖아요? 그날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를 참관하신 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성녀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찾아보셨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절대 내보일 수 없는 속마음이었다.
꼭꼭 감춰야 할 속마음이었다.
적당한 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베로니카의 앙다문 어금니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 * *
그날 밤, 베로니카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걱정돼서 미칠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누군가 그녀를 대신전에 고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다.
몸을 피해야 한다고 알리고 싶었다.
베로니카는 대신관이 마지막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고발이 들어왔기에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추후에 윌트슨 공작 부인을 소환해서 본격적인 조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마녀인지 아닌지를 가릴 조사라니!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책에서 읽은 적은 있었다.
대신관을 비롯한 고위 신관과 신녀들이 신성의 빛 구슬을 이용해 당사자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진행되는 조사였다.
하지만 많은 역사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마녀로 판명되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인이나 혹은 성녀였던 사례가 몇 차례 있었다.
반대로 처음에는 성녀로 판명되었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마녀였음이 드러난 적도 있었고.
위메나께서 주신 거룩한 능력인 신성력을 사용한 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확실성에는 의문의 소지가 많았다.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왜냐하면 거룩한 신성의 빛 구슬의 도움으로 보게 된 당사자의 영혼을 해석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편협한 사고와 이기심으로 인한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 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미트 신녀의 조언도 떠올랐다.
“베로니카, 지금은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대신관님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다. 대신관님은 공정한 분이십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사 과정에 최선을 다해 돕는 것입니다.”
아미트의 조언은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한 베로니카의 마음에 조금의 위로도 안겨 주지 못했다.
베로니카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아미트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표정의 아미트가 차가운 베로니카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리고 얕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자신의 직감을 믿으세요. 베로니카는 윌트슨 공작 부인을 보자마자 그녀에게서 특별한 것을 느꼈다고 했어요. 그녀를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하지만 몹시 강렬하게 들었다고 했어요.”
“…….”
“그 직감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러니 베로니카도 스스로를 믿으세요.”
“신녀님….”
아미트가 저를 믿어 주고 있었다.
저보다 더욱 더 저를 믿어 주고 있었다.
결국 베로니카는 꾹꾹 참아 왔던 눈물을 터트리며 아미트의 품에 안겨 울었다.
감사하게도 아미트는 베로니카의 눈물이 마르고 진정될 때까지 오랫동안 품을 내어 주었다.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베로니카는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래, 나를 믿자.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베로니카는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전지전능한 위메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베로니카는 두 눈을 감고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집중했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위메나의 이름을 불렀다.
“위메나시여! 제발 이 가여운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베로니카는 엘프윈에 대한 기도를 이어 갔다.
엘프윈이 마녀일 리 없다, 오히려 그녀는 성녀임이 틀림없다, 제 마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를 도와주고 싶다, 제발 제게 그녀를 도울 수 있는 힘을 달라 등등 베로니카는 위메나께 바라는 바를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다.
어느새 베로니카의 몸 안에서 스며 나온 신성의 빛 구슬들이 침실 안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 * *
오랜 시간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깊숙한 잠에 빠져든 베로니카는 그날따라 희한한 꿈을 꿨다.
자주 꾸는 단편적인 꿈이 아니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의 줄거리로 진득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꿈이었다.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왔는데, 그녀가 아는 인물들도 있었고, 모르는 인물들도 있었다.
다양한 사건들이 발생하며 이야기가 진행됐다.
마치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 같은 꿈이다.
이야기는 베로니카와 제크론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마치 저와 제크론이 소설 속 두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윌트슨 공작님이지?’
신기했다.
어렸을 때 끝난 인연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 꿈속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로 나오는 게 색다르고 놀라웠다.
게다가 그냥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다.
로맨스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꿈속 이야기에서도 베로니카는 치유 신녀가 됐고, 제크론은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와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제크론이 공작위를 받고 몇 년이 지난 후, 그는 마물 토벌 작전에서 큰 부상을 입는다.
마물의 독에 심하게 중독된 그는 신성수 치료를 받아야 했다.
견습 딱지를 떼고 정식 치유 신녀가 된 베로니카가 제크론의 치유를 담당하게 된다.
베로니카의 치료 행위 덕분에 제크론은 마물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됐다.
‘제크론과 로맨스라니…. 말도 안 돼!’
베로니카는 꿈속 이야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꿈속 이야기의 제크론은 아내와 사별했다고 한다.
‘아… 윌트슨 공작 부인이 죽었다고?’
그 부분에서 베로니카는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가슴속 어딘가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불현듯 엘프윈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확신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엘프윈도 이 꿈을 꾼 적이 있는 것일까?
‘에이… 설마?’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것은 분명 제 꿈이었으니까.
원래 꿈이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으니까.
베로니카가 엘프윈을 떠올리며 슬퍼하고 있는 와중에도 꿈속 이야기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제크론을 치료하면서 신성력을 너무 많이 쓴 나머지 베로니카는 결국 모든 신성력을 잃었다.
제크론은 신녀의 지위를 내려놓고 신전을 나온 베로니카를 찾아온다.
그리고 청혼한다.
이 장면에서는 지켜보고 있던 베로니카마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이 너무 예쁘게 보여,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됐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행복이 찾아온 듯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쉐리던 제국은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제크론은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
두 사람은 또다시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 했다.
결국 전쟁의 신은 쉐리던 제국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제크론이 이끄는 전투는 매번 승전보를 울렸다.
위벨교 역시 제국에 큰 힘이 됐다.
안으로는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 힘썼고, 밖으로는 성기사단을 출전시켜 부상당한 병사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쉐리던에서 명성이 자자한 외교 로비스트들의 활약도 한몫했다.
동맹국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받았으며, 갈등 상황에 있는 국가들 간의 의견을 오해 없이 좁히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3년간 이어졌던 긴 전쟁이 마침내 끝났고, 베로니카와 제크론의 사랑도 결실을 맺었다.
화창한 봄날, 저 멀리서 신전의 타종 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베로니카와 제크론의 결혼식 장면에서 꿈이 끝났다.
마침내 베로니카는 꿈에서 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