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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142)

115화

베로니카는 대신관의 눈빛에서 불쾌감과 음흉함 비슷한 것을 느꼈다. 

‘내가 감히… 대신관님을 상대로 이런 불손한 생각을 갖다니!’

스스로도 놀랐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버거워 제발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베로니카는 얼마 남지 않은 용기를 끌어모아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 것은 없었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에게 이상한 점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라고 단호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입을 떼기 전 아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는 한 발 늦은 저 자신을 책망하며 힘없이 아미트 신녀 쪽을 바라봤다.  

“확실히 좀 이상한 점은 있었습니다.”

“어떤 점이지요?”

대신관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강렬한 호기심을 담은 그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대신전에서 제공하는 신성수 치료에 무척 감사해하셨습니다. 신성수 치료를 받지 않았다면 자신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미트의 담담한 답변에 베로니카가 미간을 단번에 찡그렸다. 

사실 베로니카 역시 그 부분을 좀 의아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시기에 발생할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가 과연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인간은 미숙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존재다. 

그중 가장 최고는 자신의 죽음이 아직 가깝지 않았을 거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 

그래서 유한한 시간을 마치 무한한 것처럼 쓴다는 점.

하지만 윌트슨 공작 부인은 달랐다. 

그녀는 가까운 시기에 있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확신하는 눈치였다.

자신의 시간이 유한함을 무척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실 놀랍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상할 정도는 아니었어!’

베로니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람의 겉모습이 각양각색이듯, 사람의 생각 역시 각양각색이리라. 

대다수의 사람이 유한한 시간에 대해서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매일매일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윌트슨 공작 부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현명한 사람들 말이다. 

“윌트슨 공작 부인은 현명하시군요.”

제 생각이 대신관의 목소리로 나오자 베로니카는 놀랐다. 

동그랗게 커진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대신관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신관은 아무런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은 채 차분히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대신관의 표정이 무척이나 평온해 보여서 무방비 상태였던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그다음 이어진 그의 발언에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고발이 들어왔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마녀일지도 모른다는 고발이었습니다.”

“…….”

“…….”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할 말을 잃었다. 

둘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지경이었다. 

대신관은 신녀들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무감한 눈빛으로 베로니카와 아미트를 봤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은 베로니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 마녀일 리는 없습니다. 대신관님께서도 보셨잖아요. 신성의 빛 구슬이 공작 부인의 몸에 반응하는 것을요.”

“네, 물론 저도 보았지요. 하지만 그 현상이 설명해 주는 사실은 다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윌트슨 공작 부인이 결코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아.”

힘이 탁 풀린 베로니카의 입에서는 탁한 탄식만 터져 나왔다. 

몸속을 흐르던 피가 한순간에 모두 증발해 버린 것 같았다. 

이번엔 아미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존재와 마녀는 천지 차이입니다. 고발자는 대체 무슨 이유로 윌트슨 공작 부인을 마녀라고 단정 지은 것인가요?”

“그녀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께서 기억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열병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쯤에서 신녀님들에게 한 가지를 더 묻겠습니다.”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잠자코 앉아 대신관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베로니카는 잘게 떨리는 손가락을 단단하게 맞잡았다. 

아미트는 후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의 기억을 잃은 사람은 과거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그게 무슨….”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었던 베로니카의 입에서 목맨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미트의 상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녀들이 어이없어 하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신관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기억뿐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20년 동안 지켜 왔던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이 한 순간에 변했다면 그 사람은 과연 과거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대신관님. 인간은 본디 변하고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마녀라고 의심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아미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대신관 역시 아미트의 말을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마시기 좋을 정도로 적당히 식은 차를 호로록 마셨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의심해 볼 만하지는 않을까요? 게다가 상대가 신성의 빛 구슬에 이상한 반응을 보인 자라면 말입니다.”

마침내 참지 못한 베로니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혼자 가슴 속에 품어 왔던 생각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윌트슨 공작 부인이 성녀일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마녀가 아니라요.”

순간 대신관과 아미트의 날카로운 시선이 베로니카에게로 향했다. 

방금 제가 내뱉은 말에 스스로도 놀란 베로니카는 흡, 헛숨을 삼켰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베로니카는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눈동자만을 이리저리 굴리며 대신관과 아미트의 눈치를 살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미트였다. 

“성녀라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베로니카 신녀? …대신관님?”

아미트는 먼저 베로니카를 보며 물었다가 대답이 없자 다시 대신관을 보며 물었다. 

대신관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모든 감정을 배제한 포커페이스에 능한 자였으나, 이번만큼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성녀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베로니카 신녀?”

먹이를 앞에 둔 포식자의 눈동자와 닮은 대신관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베로니카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단단히 맞잡았다. 

한 줌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겨우 입을 열어 목소리 비슷한 것을 내보냈다. 

하지만 목청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평소 목소리 크기의 반의반 정도로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사서에서 봤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신성의 빛 구슬에 반응했던 방식은 과거 성녀들의 보였던 반응과 닮아 있었어요.”

“세, 세상에… 성녀라니…!”

아미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제가 무의식중에 혼잣말을 내뱉는 줄도 몰랐다. 

충격이 컸는지 동공이 심하게 풀려 있었고 숨소리도 거칠었다. 

베로니카의 작은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성녀의 특별한 힘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변화가 아닌, 아래서부터 위로 향하는 변화라고 했어요.”

“…….”

“그리고 성녀의 특별한 힘이란 기이한 이능을 보이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사람들에게 본인의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능력,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능력, 사람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어요.”

“하아!”

대신관이 어이없다는 듯 탄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베로니카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대신관이 잔뜩 성난 얼굴로 베로니카를 노려봤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얼굴에서 표정을 싹 다 지우고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평상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무미건조하고 차가웠다. 

“베로니카 신녀, 성녀라니요? 성녀님은 몇 백 년에 한번씩 나타나는 존재입니다. 워낙 표본이 적은 관계로 성녀의 본성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을 정도입니다. 추측만 있을 뿐이지요.”

“…….”

“그런데 함부로 성녀의 존재를 입에 담다니요. 아무리 아직 어린 견습 신녀라고는 하지만, 이번 발언은 너무 경솔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스승이 제자를 나무라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아직 순순히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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