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응접실로 안내된 로저먼드는 가만히 앉아 대신관을 기다렸다.
긴장감 때문인지 손과 다리가 절로 덜덜 떨었다.
로저먼드는 머릿속으로 해야 할 말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여기 오기 전에 아르젠토 차를 한 잔 마시고 왔다.
그 약효가 완전히 가시기 전에 필요한 말만을 재빨리 전할 작정이었다.
아르젠토 차의 약효가 다 떨어지면 긴장감이 급격히 상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먼저 옛날에 엘프윈이 어땠는지 설명하고, 그리고 다시 만난 엘프윈의 증상이….’
로저먼드의 생각은 거기서 멈춰야 했다.
응접실 문이 열리고 대신관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로저먼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로저먼드의 눈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대신관의 모습은 무척 고귀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고귀하고 성스러운 자라면 제 마음 속에 꿈틀거리는 악의를 모르지 않으리라.
금방 들키고 말리라.
그렇게 되면 저는 지하 감옥 같은 곳으로 끌려가는 고초를 겪게 될지도 모른다.
근거조차 알 수 없는 두려운 생각들이 점점이 퍼져 나갔다.
로저먼드 앞에 선 대신관은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걸고는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입니다.”
“안녕하세요. 로저먼드 월시입니다. 메드록에서 왔습니다.”
“네, 들었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대신관은 더 없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소파 쪽으로 손짓했고, 로저먼드는 그의 손짓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로저먼드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대신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고발을… 하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던데. 어떤 내용의 고발인지요?”
“그, 그게….”
대신관의 물음에 로저먼드는 입을 열었으나,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관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서두를 필요 없었다.
대신관의 부드러운 시선에 로저먼드는 점점 안정을 찾았다.
자취를 감췄던 용기라는 것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로저먼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문장이 되기를 바라면서 입가 근육에 힘을 줬다.
“윌트슨 공작 부인과 전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입니다. 옛날부터 우린 서로에게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그러시군요.”
로저먼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대신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추임새 덕분일까.
로저먼드의 머릿속이 맑아지고 준비해 뒀던 말이 막힘없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로저먼드는 남부 영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생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리고 엘프윈의 결혼과 동시에 헤어지고 1년이 지난 시점에 황궁 연회에서 재회하게 된 일까지.
마침내 로저먼드의 입에서 결정적인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지금의 엘프윈 윌트슨은 진짜 엘프윈 윌트슨이 아닙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
그동안 내내 다정한 추임새를 넣어 주던 대신관은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힌 탓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신문을 통해 읽은 바가 있었다.
단순한 기억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알아왔다는 이 고발자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위험한 얘기를.
“물론 모습은 그대로지요. 하지만 그 몸 안에 담긴 영혼은 다른 사람의 것이란 말입니다. 엘프윈의 영혼이 아닌.”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물론입니다. 확실한 이유도 없이 이렇게 대신관님 앞에 나설 수는 없었겠지요.”
로저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르젠토 차를 대하는 완전히 달라진 엘프윈의 관점, 전혀 관심 없던 운동과 음악에 관심을 보이는 점, 핸더슨 공녀에게 동물의 감정을 운운하며 쏟아부었던 훈계까지.
로저먼드의 증언은 끝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엘프윈은 어린 시절부터 예민한 성격 탓에 사람 사귀는 것을 영 힘들어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그들에게 똑같은 상처로 되갚아 줬지요. 사람이 싫다고 했어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나 말소리가 무척 거슬린다고 했어요. 뿐만 아니라 숨소리까지 싫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아십니까? 사람들과 어울려 운동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쇼핑을 같이 다니고 있어요. 과거의 엘프윈이라면, 원래의 엘프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들입니다.”
“…….”
“이 세상에서 엘프윈 윌트슨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인 윌트슨 공작조차 저만큼 엘프윈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런 제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내 친애하는 친구 엘프윈은 몸을 뺏겼어요. 그 몸속에는 다른 영혼이 들어와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로저먼드는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두 눈에 힘을 주어 대신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간절한 마음이 대신관에게 고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마침내 로저먼드는 가장 중요한 최후의 문장을 입에 담았다.
“마녀의 영혼이 엘프윈의 몸을 차지하고 있어요. 사악한 영혼을 내쫓고 엘프윈의 몸을 되찾아 주십시오, 대신관님! 오직 대신관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쿵쾅쿵쾅, 대신관의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마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녀가 평범한 일반적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한다.
신성수 치료 중 그녀의 몸속에서 밝게 빛나던 신성의 빛 구슬이 그 증거였다.
대신관은 그녀가 성녀가 아닌지 의심했을 정도였다.
대신관의 머릿속이 팽팽 굴러갔다.
그리고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긴… 사실 성녀와 마녀는 한 끗 차이이긴 하지.’
같은 사람이 보여 주는 같은 능력일지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성녀가 되기도 하고, 마녀가 되기도 한다.
전쟁광 폭군은 왕국의 땅덩이를 가장 넓게 확장시킨 위대한 왕으로 불릴 가능성이 큰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윌트슨 공작 부인 덕택에 우리 위벨교의 숨통이 트일 수 있겠군.’
대신관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 * *
엘프윈의 신성수 치료를 마친 베로니카와 아미트가 대신전으로 돌아왔다.
대신전 안은 몹시 어수선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몇 시간 전에 황실 조사단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베로니카와 아미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을 때였다.
견습 신녀가 그들에게 다가와 대신관의 말을 전했다.
“대신관님께서 두 분 신녀님을 찾으십니다.”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조금은 의아한 마음으로 대신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의 치료는 잘 마치셨습니까?”
집무실에서 만난 대신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불안하고 산란한 대신전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대신관은 손수 차를 우려내 베로니카와 아미트 앞에 놓인 찻잔에 따라 주기까지 했다.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순간 얼떨떨해졌다.
보통 대신관과의 면담에서 차를 마시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집무실 안에 차 향기가 진동하니 놀랄 만도 했다.
베로니카와 아미트의 생각을 읽었는지 대신관이 다른 의도는 없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가끔씩은 이런 식의 면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것 같아요, 대신관님.”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베로니카와 아미트는 다소곳하게 감사 인사를 하며 찻잔을 들었다.
호로록, 차를 넘기는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대신관은 차를 몇 모금 더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놨다.
마주앉은 베로니카와 아미트를 지그시 바라보는 대신관의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순간 베로니카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두 신녀님들께서는 지난 몇 달 동안 윌트슨 공작 부인의 신성수 치료를 담당하셨습니다.”
‘역시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구나.’
베로니카는 숨을 죽인 채 대신관의 말에 주의를 집중했다.
“신성수 치료 시 윌트슨 공작 부인의 몸에서 발현되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 신녀님들 모두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무엇이든 하문하십시오, 대신관님. 아는 것은 무엇이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아미트가 다소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지금 상황이 심상치 않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대신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신관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오며 가며 잠깐이지만 윌트슨 공작 부인과 대화를 나눴을 거라 생각합니다. 대화 중 이상한 점은 못 느꼈습니까?”
대신관의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