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자정이라니?
대신관의 외침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이로서 그들은 확신했다.
대신관은 저들을 감싸 줄 용의가 없음을.
저들은 버림받았음을.
몇몇 신관과 신녀들의 다리에 힘이 풀려 후덜덜 떨리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대신관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자리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한다면, 자비로우신 위메나께서 그대들의 죄를 용서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벌벌 떨기만 한다면 그땐 아무리 자비로우시다고하나 위메나께서도 절대 용서하시지 않을 겁니다.”
할 말을 마친 대신관은 출입문 곁에서 대기 중이던 성기사단의 단장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대신관의 신호를 받은 단장은 명을 받들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복도를 향해 절도 있는 손짓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철컹거리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울리며 새하얀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이 대예배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들바들 떨고만 있던 신관과 신녀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대신관님! 이렇게 저희를 버리려 하십니까!”
“제발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대신관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오오! 위메나시여! 우리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어떤 이들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고, 또 다른 이들은 바닥에 풀썩 엎드려 두 손을 모았다.
신관과 신녀들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대신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대예배실을 나섰다.
매순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로 유명한 대신관이었지만 이때만큼은 그의 얼굴에 약간의 경멸감 비슷한 것이 비쳤다.
다소 성이 난 이들은 대신관에게 달려들기도 했지만, 곧 성기사들에게 제압당했다.
성기사들은 어렵지 않게 신관과 신녀들을 끌고 갔다.
신관과 신녀들은 성기사들의 단단한 팔에 붙들려 질질 끌려가면서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명 같은 기도로 가득 찼던 대예배실이 다시 조용한 평화를 되찾기까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모두가 빠져나간 대예배실에는 짝을 잃은 신발들만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소란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 * *
개인 집무실로 돌아온 대신관.
혼자만 남게 되자 그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는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깃펜과 잉크, 그리고 양피지 두루마리 서류 몇 개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직접 물을 주면서 키우는 작은 화분도, 찻주전자 세트도 있었다.
매일 보는 광경이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모든 게 다 그의 기대를 저버렸고, 모든 게 다 그의 화를 돋웠다.
대신관은 책상 위로 팔을 뻗어 모든 물건들을 다 쓸어버렸다.
챙그랑, 챙!
자리를 잃은 물건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깃펜이 저 멀리 날아갔고, 검정 잉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양피지 두루마리 서류들이 굴러다녔고, 화분과 찻주전자는 산산조각 났다.
그런데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대신관은 떨어진 물건들을 발로 퍽퍽 뭉개기 시작했다.
깃펜과 양피지 두루마리 서류가 그의 발아래서 짓이겨졌다.
힘없는 물건들이 서서히 본연의 모습을 잃어 갔다.
“하아, 하아…!”
한참을 정신없이 발길질을 하고 있으려니 점점 숨이 가빠졌다.
더 이상 뭉갤 만한 것들이 남지 않게 됐을 때에서야 비로소 대신관은 발길질을 멈췄다.
대신관은 거친 숨을 내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나마 화가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머리가 좀 가벼워지자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일단 약초 관리 책임자들 중 문책받아 마땅한 자들을 추려야 했다.
황실과 조사단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신전 내에서 먼저 강력한 처벌을 시행해야 했다.
“어떤 벌을 내려야 잘했다는 얘기를 들으려나….”
대신관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윌트슨 공작을 생각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자였다.
어쭙잖은 영웅 심리에 의기양양하며 뽐내는 자였다.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자였다.
대신관의 눈에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서 위벨 메시나 증서를 들고 온 제크론의 모습이 위선적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대신관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하급 신관이었다.
신관은 평소와는 다른 집무실 안의 광경에 흡, 헛숨을 삼켰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말을 쉬이 잇지 못한 채 서 있자 대신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무슨 일이죠?”
침착한 표정에 단정한 목소리였다.
집무실 안의 난장판 풍경과 전혀 딴판인.
대신관을 마주 본 하급 신관은 정신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겨우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을 뵙고 싶다는 손님이 왔습니다.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손님이요?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좀 전까지 침착했던 대신관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황실 조사단이 들이닥친 일로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손님을 맞이할 만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님 하나 돌려보내지 못하고 이곳까지 보고하러 오다니.
이자들은 대체 왜 생각이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정도의 지능을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가.
‘대체 왜!’
잠시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화가 끓는점에 도달하면 참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리라.
대신관은 안에서 들끓고 있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크게 했다.
대신관의 눈치를 살피던 하급 신관이 쭈뼛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로저먼드 월시 소공작입니다. 남부 지방 중 하나인 메드록 영주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요?”
“네? 그, 그래서….”
대신관의 날 선 반응에 하급 신관은 당황하며 진땀을 뻘뻘 흘렸다.
대신관은 쩔쩔매고 있는 하급 신관을 벌레 보듯 쳐다봤지만, 정작 하급 신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지금 저에게로 향한 대신관의 눈빛이 어떤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하급 신관은 일단 준비해 온 말을 다 할 요량으로 떨리는 입술에 애써 힘을 주었다.
“위,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해서 고발할 게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라서 꼭 대신관님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 누구라고요?”
순간 대신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하급 신관은 대신관의 눈동자가 마치 맹수의 눈동자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자 대신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치 눈빛만으로도 앞에 선 자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꼴딱, 마른침을 삼킨 하급 신관은 겨우 입을 열어 답했다.
“로, 로저먼드 월시 소공작입니다.”
“아니, 아니. 그거 말고. 누구에 대한 고발이라고 했나요, 방금?”
“아, 그게… 윌트슨 공작 부인에 대한 고발입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요? 확실한가요?”
대신관의 뾰족한 되물음에 하급 신관은 숨이 턱 막혔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 건 아닌지 제 행동을 다시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뚜렷한 실수는 없었다.
하급 신관은 바닥이 보이는 용기를 박박 긁어모아 마지막으로 쥐어 짜냈다.
“…네. 확실합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라고 했습니다.”
“좋아요. 그자를 만나 봐야겠습니다. 당장 데려오세요.”
“여, 여기로 말입니까, 대신관님?”
하급 신관이 난장판인 바닥을 보며 물었다.
그제야 방 안의 상태를 환기한 대신관이 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응접실로 데려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대신관님.”
하급 신관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집무실을 나섰다.
겨우 벗어날 수 있게 되어 홀가분한 기분이 가감 없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다.
하지만 대신관은 하급 신관의 표정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대신관의 머릿속은 엘프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윌트슨 공작 부인을? 고발한다고? 무슨 고발?’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눈앞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 있었다.
신성수 치료를 받는 엘프윈의 모습이었다.
엘프윈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 신성을 담은 빛 구슬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 말이다.
아름답고 몽환적이었던 모습.
가슴을 울리는 모습.
어쩌면 몇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엘프윈에게서 이능이 발현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신기한 장면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로저먼드 월시란 자는 뭔가 알고 있는 걸까? 역시 그녀에게 이능이 발현된 걸까? 그녀는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아직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답을 구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었다.
당장 가서 고발자를 만나야 했다.
제발 이 고발자의 입에서 원하던 답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신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