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로저먼드는 눈앞의 환영을 지워 보려 눈을 비볐다.
하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 마리의 독사인 줄 알았던 형상은 점점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몸통은 하나에 머리는 둘 달린 독사가 됐다.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려 봤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선명해졌다.
“으…윽!”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이 로저먼드의 파랗게 질린 입술을 뚫고 뿜어져 나왔다.
로저먼드는 뒷걸음질 쳤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하긴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는 충분히 고심해야겠지요.”
“하지만 죄송하게도 저희는 오래 기다릴 수 없어요.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독사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힘든 형상에서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로저먼드의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일었다.
으….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독사의 입에서는 사람의 말이 나오는데, 정작 사람인 저의 입에서는 동물이 말이 흘러나오는 것 같아 정신이 더욱 아찔해졌다.
독사의 혀가 다시 날름거리며 움직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어요.”
“잘 생각해 보시고, 내일 다시 얘기해 봐요.”
제나와 메리엔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로저먼드는 그녀들이 사라지자마자 서랍장으로 달려갔다.
비척거리는 걸음걸이가 무척 위태로웠다.
그는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장을 열어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르젠토 찻잎이 든 상자였다.
이 끔찍한 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아르젠토 차가 필요했다.
* * *
오늘은 신녀 베로니카와 아미트가 공작성에 방문하는 날이었다.
내 신성수 치료를 위해서 말이다.
베로니카에게 편지를 받은 날부터 계속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가슴에 손을 올려 작게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케이트였다.
“마님, 신녀님들께서 도착하셨습니다. 1층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래.”
케이트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운신이 가능한 만큼 신녀님들을 직접 맞이하는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심장의 떨림은 더 거세졌다.
‘베로니카를 만난다!’
오랜만에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설렜다.
이 설렘은 처음 그녀를 만날 때보다 더했다.
중앙 로비에 자리 잡은 실내악단의 연주곡이 은은하게 울렸다.
“어서 오세요, 신녀님들. 멀리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윌트슨 공작 부인.”
“건강한 모습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가 건강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신녀님들의 치료 덕분입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간단한 다과가 차려졌다.
“처음 편지를 받고 많이 놀랐답니다. 신성수 치료를 또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사실 저희도 마찬가지랍니다. 대신관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셨답니다. 아무래도 위벨 메시나 증서 사용에 상응하는 치료가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대신관님께서요?”
역시 이 정도의 일이라면 신녀들끼리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특별한 명령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턱 막혔다.
어쩔 수 없었다.
제크론과 조사단이 위벨교의 신전을 상대로 갖가지 조사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자연스레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내 표정 변화를 읽었던 것일까.
베로니카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부인의 건강한 출산을 위해서 위벨 메시나 증서를 기꺼이 사용한 전쟁 영웅에 대한 대신전의 최선임을 알아주세요.”
베로니카의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의구심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베로니카의 미소 덕분에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호로록, 레몬차를 가볍게 한 모금 머금은 나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신전과 신녀님들께는 죽을 제 목숨을 구해 주셨지요. 제가 이렇게 숨을 쉬고, 세르안과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신성수 치료 덕택입니다.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어요.”
진심에 진심을 더했다.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아미트 신녀가 빙그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죽을 목숨이었다니…. 여성의 출산이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는 하지요. 신성수 치료를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신성수 치료가 죽을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말 그대로 치료를 할 뿐이지요.”
“그리고 은혜를 입으셨다는 말은 가당치 않습니다. 위벨 메시나 증서로 얻은 권리예요. 그러니 그런 말씀은 삼가 주세요.”
베로니카가 온화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역시 겸손함을 중요한 미덕으로 삼는 종교인다운 반응이었다.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했다.
출산 전,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하지만 갖가지 노력 중 가장 마지막 순간에 결정적으로 날 지켜 준 것은 신성수 치료였다.
신성수 치료가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내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확실히 전하고 싶었다.
“아니에요. 분명해요. 신성수 치료가 아니었다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저를 살리신 건 신녀님들이세요. 그러니 앞으로의 치료도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다과 시간 후, 침실에서 신성수 치료가 진행됐다.
모든 과정은 침착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따듯한 신성수가 채워진 욕조 안으로 들어간 나는 신녀들이 주문을 외는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같은 시각, 대신전은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닥뜨려야 했다.
“약초 관리와 관련된 모든 기록들을 수거하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스무 명 남짓의 황실 조사단원은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서들을 닥치는 대로 수레 안에 실었다.
조사단원을 상대하는 신관과 신녀들은 아연실색하며 외쳐 댔다.
“그 문서는 약초 관리와 상관없는 것입니다!”
“여기 약초 이름이 적혀 있는데도 말입니까?”
“그, 그건…!”
조사단원은 더 듣지도 않고 다음 문서로 손을 뻗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은 양의 문서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몇몇 신관과 신녀들이 대신관의 집무실로 달려가 읍소했다.
“대신관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조사단원들이 예고도 없이 이렇게 쳐들어온단 말입니까?”
“이건 너무도 무례합니다. 황실이 우리 위벨교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붉으락푸르락 성난 얼굴의 신관과 신녀들을 보는 대신관의 표정은 무감, 그 자체였다.
어떤 절망이나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표정.
일자로 다물었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조사단원들이 맡은 바 일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하세요.”
“예에? 그, 그게….”
“대신관님…!”
우르르 몰려왔던 신관과 신녀들의 얼굴에 처절한 실망감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대신관, 크레이그 셰넌은 어떤 사람이던가.
셰리던 제국 내에서 황제와 맞먹는 권력을 지닌 존재다.
하지만 제국을 떠나서 대륙 전체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황제의 영향력은 제국 내에서만 유효했지만, 위벨교의 대신관의 영향력은 대륙 전체를 아우른다.
그런데 지금 황실 조사단의 횡포에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것이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신관과 신녀들은 대신관의 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좀 더 분노하고, 좀 더 강력하게 대응해도 될 것 같은데 대신관은 그저 방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신관과 신녀들은 대신관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급한 상황일수록 대신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일단 순종하고 봐야 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위급한 상황이 일단락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았다.
대신관의 집무실로 몰려왔던 신관과 신녀들은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언짢은 얼굴을 하고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서야 했다.
* * *
황실 조사단이 약초 관리에 대한 모든 문서를 빠짐없이 챙기고 돌아간 것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대신관은 약초 관리를 담당했던 신관과 신녀들을 호출했다.
대예배실에 벌벌 떨면서 모인 신관과 신녀들은 족히 50명이 넘었다.
고위 신관과 신녀가 제일 앞자리에 섰고, 그 뒤로 중간 관리자급과 허드렛일을 하는 신관과 신녀들이 섰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의 면면을 천천히 살피는 대신관의 눈초리가 매섭게 빛났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마침내 대신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약초를 재배하는 것부터 해서 유통하고 관리하는 것까지 모두의 노고가 크다는 것을 잘 압니다.”
무미건조한 대신관의 목소리가 대예배실 안의 공기를 진동시키며 울렸다.
자리에 모인 신관과 신녀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투명하게 어렸다.
대신관의 말이 이어졌다.
“몇몇 약초의 경우 우리 위벨교 신전이 독점하고 있기에 좀 더 까다롭고 체계적인 규칙 속에서 관리가 이루어졌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대신관의 미간이 한껏 좁아지며 짙은 주름이 생겼다.
맨 앞줄에 선 고위 신관과 신녀들은 대신관의 표정 변화를 보고 갑자기 몰려드는 초조감에 어깨를 바짝 말아야 했다.
대신관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우리의 자정 노력이 있기 전에 황실 조사단에서 먼저 나섰다는 것은 우리 위벨교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지요. 늦었지만, 우리 스스로의 자정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자정이라니?
대신관의 외침에 모였던 신관과 신녀들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