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예에? 짐을 다시 풀란 말씀이십니까?”
하얗게 질린 얼굴의 보좌관이 로저먼드에게 물었다.
“그래.”
로저먼드의 대답은 짧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제 침실로 돌아갔다.
으윽,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음이 보좌관의 얇은 입술을 뚫고 터져 나왔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늘 라하브를 떠나 메드록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이 모든 것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 때문이리라.
보좌관은 신음을 삼키며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있었길래!’
보좌관의 속앓이가 계속 이어졌다.
이번엔 또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메드록에 계신 공작님과 공작 부인께서 노여워하실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리고 모든 화살은 소공작의 마음을 제대로 다잡지 못한 저한테 쏟아지겠지.
보좌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한편 침실로 돌아온 로저먼드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제나 핸더슨 공녀와 메리엔 도론 공녀를 상대하고 나면 언제나 진이 다 빠졌다.
상대하기 버거운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건네는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기도 했다.
마치 독버섯 같달까.
로저먼드는 방금 전 불쑥 찾아왔던 제나와 메리엔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나의 날카로운 음성이 귀에 선연했다.
* * *
“윌트슨 공작 부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하셨죠?”
“네.”
“기억이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행동 방식과 사고방식도 완전히 달라졌고요?”
“네, 뭐. 제가 느끼기에는 그랬습니다.”
로저먼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갑자기 엘프윈에 대해서 왜 묻는 걸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제나와 메리엔의 눈치를 살피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제나가 책 한 권을 갑자기 쓱 내밀었다.
얼떨결에 책을 받아 든 로저먼드는 책의 제목을 보고 흡, 하고 헛숨을 삼켜야 했다.
“‘마녀의 탄생’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로저먼드의 물음에 제나와 메리엔은 잠시 동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만을 흘렸다.
이번엔 메리엔이 붉은 입술을 느른하게 늘리면서 입을 열었다.
간드러진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은은하게 진동시켰다.
“월시 소공작님께선 윌트슨 공작 부인을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알아 오신 분이세요.”
대체 무슨 꿍꿍이로 20년이라는 시간을 들먹이는 걸까.
로저먼드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긴장감을 애써 누르며 메리엔의 붉은 입술에 정신을 집중했다.
“윌트슨 공작과 공작성의 사람들, 그리고 수도에 기반을 둔 여러 귀족들은 기억을 잃어서 달라진 윌트슨 공작 부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
“왜냐하면 그들이 윌트슨 공작 부인을 알고 지낸 시간은 고작 1년 남짓일 뿐이니까요. 달라졌다는 것은 알아도 얼마만큼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죠. 하지만 월시 소공작님의 경우는 다르죠.”
메리엔이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을 어린 시절부터 쭈욱 알고 지낸 월시 소공작님께서 180도 달라진 윌트슨 공작 부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라 생각해요. 그야 당연하죠.”
대체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이유가 뭘까.
로저먼드는 주의를 집중하여 메리엔이 입 밖으로 내뱉는 단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으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제 심정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발언의 의도를 전혀 파악할 수 없어 긴장했다.
‘엘프윈과 이 책이 대체 무슨 상관이길래?’
로저먼드는 제 손에 들린 <마녀의 탄생>이라는 책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번엔 조용히 듣고 있던 제나가 입을 열었다.
“월시 소공작님. 대신전에 가서 사실대로 다 말하고, 조사를 의뢰하세요.”
“대, 대신전에요? 무, 무슨 사실을 말입니까? 어떤 조사를 의뢰하란 말입니까?”
뜬금없는 발언에 당황한 로저먼드는 말까지 더듬었다.
반면 제나와 메리엔은 빙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제나가 계속 말을 이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정체가 의심된다고요. 기억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영혼 자체가 뒤바뀐 것 같다고요.”
“아?”
로저먼드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귓가에서 위잉, 이명이 들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고, 몸속 피가 금방이라도 다 증발해 버릴 것 같았다.
메리엔이 로저먼드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저런, 많이 놀라셨군요. 그럴 만도 해요. 기억을 잃었다고만 생각했지, 다른 영혼일 거라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없죠.”
“하지만 월시 소공작님도 잘 아시잖아요? 윌트슨 공작 부인이 기억만 잃은 게 아니라는 걸요. 영혼까지 전부 다 잃었다는 것을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 로저먼드의 손이 덜덜덜 떨렸다.
그리고 마침내 제나의 입에서 끔찍한 말이 튀어나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의 몸을 차지한 마녀일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 그런!”
로저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엘프윈이 미웠던 것은 사실이다.
기억을 잃은 엘프윈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녀라니! 그건 아니야! 말이 되지 않아!’
로저먼드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제나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윌트슨 공작 부인이 마녀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시는군요. 비록 영혼은 바뀌었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계시군요? 그렇죠?”
“아름다운 우정입니다. 경이로운 사랑이에요! 저는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을 것 같아요.”
메리엔까지 거들었다.
동정심이 가득 담긴 두 쌍의 눈동자가 로저먼드를 향했다.
로저먼드는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테이블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뜨거운 눈물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엘프윈은 마녀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녀가 마녀일 리 없어요! 절대로요!”
로저먼드는 거의 비명을 내지르다시피 외쳤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로저먼드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제나와 메리엔을 노려보며 외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려거든 당장 나가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 당장요!”
온몸이 떨리는 탓에 목소리까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나와 메리엔은 침착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방을 나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직 중요한 얘기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나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로저먼드의 귀에는 표독하게 들릴 뿐이었다.
“달라진 윌트슨 공작 부인이 마녀인지 아닌지는 대신전에서 조사해서 밝혀내겠지요. 소공작님께서는 의문만을 제기하시면 됩니다.”
“…….”
“마녀든, 마녀가 아니든 윌트슨 공작 부인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지겠지요.”
“엘프윈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공녀들의 허황된 이야기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군요! 나가시라니까요!”
로저먼드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안정을 되찾아서 그런지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로저먼드의 외침은 제나와 메리엔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메리엔이 맵시 있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말했다.
하지만 로저먼드의 눈에는 악독한 말을 뿜어내는 구멍으로 보일 뿐이었다.
“갈 곳 잃은 윌트슨 공작 부인의 안식처가 되어 주실 분은 월시 소공작님뿐일 겁니다.”
순간 로저먼드는 제 귀를 의심했다.
갈 곳을 잃은 엘프윈?
엘프윈의 안식처?
로저먼드의 순박한 두뇌는 메리엔이 내뱉은 말을 단번에 이해하는 게 불가능했다.
메리엔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운 얼굴로 한 음절, 한 음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을 추락시키세요. 그리고 그녀를 가지세요.”
새빨간 입술의 한쪽 끝이 비뚜름히 말려 올라갔다.
로저먼드는 저를 직시하는 메리엔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살아 있는 독사와 조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메리엔의 눈동자는 분명 독사의 눈동자와 닮았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옆에 선 제나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저먼드의 의식은 점점 혼미해졌다.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고 있는 로저먼드의 눈에 두 공녀의 모습과 독사의 모습이 겹쳐졌다.
두 마리의 독사가 징그러운 혀를 날름거리며 저를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저를 홀리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