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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42)
  • 110화

    자기 전, 제크론과 나란히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타닥타닥,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와 더불어 책장 넘기는 소리가 조용하게 침실 안을 채웠다. 

    제크론이 불쑥 말을 꺼냈다. 

    “당신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그래 보여요?”

    “응.”

    제크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살짝 내려간 그의 눈꼬리가 귀여웠다. 

    언제나 내 눈치를 살피며 내 건강 상태나 기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제크론이 고마웠다.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좋은 일이 있었죠.”

    “무슨 일인데?”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쇼핑 갔잖아요.”

    “당신이 쇼핑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간 게 중요한 거죠.”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좀 더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제크론의 푸른 눈동자에 아쉬움과 서운함이 뒤섞인 묘한 빛이 떠올랐다. 

    갑자기 왜요? 목소리 대신 눈빛으로 묻자, 제크론이 입을 열었는데,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오랜만에 당신이랑 쇼핑이 가고 싶어져서.”

    “당신이 쇼핑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요?”

    그가 내게 했던 말을 장난기 가득 담긴 눈빛과 목소리로 그대로 돌려줬다. 

    나이스 타이밍!

    혼자 괜히 뿌듯해 하고 있을 때였다. 

    제크론이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봤다. 

    윽, 나는 헛숨을 삼켰다. 

    로맨스와 멜로를 반반 섞은 듯한 빛깔이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건 알지?”

    “…….”

    쿵쾅쿵쾅, 심장이 정신을 못 차렸다. 

    잘생긴 얼굴에, 사랑을 가득 담은 눈빛에, 이렇게나 완벽한 대사라니! 

    너무 치명적이다, 이 남자!

    입을 열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없어 열기가 몸속에 그대로 가둬진 탓에 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제크론이 싱긋 미소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알고 있는 것 같군. 그거면 됐어.”

    “뭐라는 거예요, 정말.”

    민망해진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의 뜨거운 시선을 계속 받고 있다가는 몸 어딘가가 녹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제크론이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꾹 감았지만, 잠이 오는 건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오히려 잠이 달아나고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리고 내 잠을 방해하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항상 해 주던 이마 키스, 왜 오늘은 안 해 주지?’

    매일 밤, 잘 자라고 속삭이며 이마 키스를 해 주는 제크론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된 게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까먹었나?

    아니면 삐쳐서?

    ‘에이, 설마…? 아니다. 그냥 생각 말고 잠이나 자자.’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매일 아무 조건 없이 받던 것을 못 받으니 조금은 궁금하고, 조금은 억울해서 거의 미칠 지경이 됐다. 

    ‘대체 왜!’

    머릿속으로 같은 말만을 몇 번이고 되뇌고 있었다. 

    그때였다. 

    피식, 작은 웃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어라? 방금 웃음소리 같은데?’

    감았던 눈을 슬쩍 뜨고 제크론 쪽을 올려다봤다.

    그가 날 내려다보면서 씨익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뭐예요, 또?”

    “당신 머릿속은 너무 투명하게 잘 보여서 말이야.”

    “내 머릿속, 뭐요?”

    “지금 내 이마 키스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맞지?”

    제크론이 장난기 가득한 눈을 하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왔다. 

    들키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딱 들켜 버리면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고 몸속 피가 들끓는다. 

    “이, 이마 키스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그, 그런 걸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흘겨봤다. 

    제크론은 오늘밤 날 계속 들들 볶을 셈인 것 같았다. 

    그가 우리 사이를 가르고 있는 베개 위에 턱을 괴고 엎드린 채 날 뚫어지게 보는 게 아닌가. 

    방글방글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제크론의 모습이….

    ‘…귀여워! 잘생겼어!’

    이 순간에조차 남주의 외모에 넋을 놓아 버리는 나란 여자는 참!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던 내가 결국 입을 열었다. 

    “당신,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네?”

    어? 이 패턴은 또 뭐지?

    짙은 눈썹을 씰룩거리면서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를 반짝이는 모습이 꼭….

    ‘나 보고 내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하는 거야? 이마 키스를 해 달라고?’

    말 안 하면 안 해 주겠다, 뭐 이런?

    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괜히 오기가 생겼다. 

    제크론이 바라고 예상하는 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이 세계의 주인공일지라도 당신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소리 없는 눈빛으로 외치고는 뾰로통하게 말했다. 

    “어떻게 하긴요. 어서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주무세요.”

    흥, 할 말을 마친 나는 다시 눈을 꾹 감았다. 

    시야가 닫히자 모든 감각이 귀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크론은 미동 없이 그대로 엎드린 채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윽, 이 남자가 진짜!’

    이마가 뜨거워졌다.

    앙다문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눈을 떠 계속 장난질을 걸어오는 그를 째려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뭐하는 짓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눈과 귀를 닫은 채 꾹꾹 참고 있는데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 잠들었다고?’

    결국 참지 못한 나는 한쪽 눈을 찔끔 뜨고 제크론을 확인했다. 

    그리고 딱 눈이 마주쳤다. 

    신났는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자는 척했던 거예요?”

    “내 숨소리 연기 어땠어? 괜찮았지?”

    후우, 짙은 한숨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는 게 이기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회피성 자기 합리화인가? 

    날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크론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빨리 해 줘요. 이마 키스.”

    흡, 제크론이 거칠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의 귓불이 조금 붉어진 것 같았다. 

    ‘뭐야, 왜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거죠? 이제까지 살랑살랑 꼬리 쳤던 것은 본인이면서!’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머릿속에 잔꾀가 가득한 여우였던 제크론이 지금은 얼굴 여기저기에 부끄러움이 둥둥 떠다니는 토끼 같았다. 

    제크론은 결국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고는 웅얼거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군. 그래서 미치겠어.”

    ‘이 사람이 진짜!’

    또다시 심장이 앞뒤 분간도 못하고 나대기 시작했다. 

    오늘밤 잠은 다 잔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각, 제나 핸더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몇 시간 전 저녁 식사 시간에 아버지 입에서 흘러나왔던 핀잔의 말이 그대로 반복 재생됐다. 

    “정반대되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같은 날에 내보내다니!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냐?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쏟아지는 아버지의 면박에 제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 하나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제나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제국 가십지’는 가십지 중에서도 신뢰도가 가장 높지. 그저 그런 가십지 여러 곳에 실린 네 인터뷰보다 ‘제국 가십지’ 하나에 실린 윌트슨 공작 부인의 인터뷰를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란 말이다.” 

    끄응, 아버지의 입에서 탄식이 섞인 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얻는 평판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아버지였다. 

    그만큼 완전무결한 아버지는 그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고용인들의 실수는 물론이고, 가족들의 실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나를 향한 아버지의 눈빛에는 실망감이 가감 없이 투영되어 있었다. 

    그 눈빛을 온전히 받아 내야 했던 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다. 

    제나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핀잔은 계속 이어졌다. 

    “작은 실수가 모여서 결국 그 사람과 그 가문의 평판이 되는 거다. 제나 핸더슨, 오늘 네 평판은 작지만 뚜렷한 타격을 입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네 평판뿐만 아니라, 우리 핸더슨가의 평판 역시 말이다.” 

    저녁 식사 후, 제나는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야 했다. 

    위 속에 남은 음식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속이 더부룩했다. 

    ‘이게 다 그년 때문이야!’

    제나는 엘프윈을 떠올리며 이를 까드득 사리물었다. 

    별안간 나타난 같잖은 여자 하나가 사교계의 분위기를 흐리고 있었다. 

    처음엔 남편의 이름에 비해 존재감이 워낙 약했던 여자였다.

    그래서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엘프윈 윌트슨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내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 시작했다. 

    ‘처음엔 뒤에서 비웃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그런데 냉소하던 사람들은 다 어디 가고, 이젠 찬양하는 사람만 남은 걸까?

    그리고 이 모든 변화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 놀라웠다. 

    “으으… 짜증 나! 재수 없어!”

    결국 제나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았다. 

    ‘침착해, 제나 핸더슨!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집중해야해!’

    잠들기를 포기한 제나는 스르르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로 비척비척 걸어간 그녀는 냉수를 컵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시원해지면서 머리도 조금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제나는 벽난로를 마주한 채 소파에 앉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녀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오늘 제 평판이 깎인 것의 두 배, 아니 세 배로 엘프윈 윌트슨의 평판도 깎여야 했다.

    제나는 한쪽 관자놀이를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집중했다. 

    “제나 핸더슨, 생각해 내! 그 여자를 한 번에 끌어내릴 방법을 생각해 내라고!”

    혼잣말이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로저먼드 월시를 떠올렸다. 

    여리여리하고 희멀건 지방 귀족이 술에 취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분명 거기에 단서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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