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그때였다.
해리스 남작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직접 해 보고 나서야 잘 맞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거겠죠? 좋아요! 이번에 말이 나온 김에 저도 한번 시도해 봐야겠어요! 그동안 계속 궁금했거든요.”
해리스 남작 부인이 손뼉까지 치면서 명랑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도론 공녀의 신경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도론 공녀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해리스 남작 부인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슈라더 후작 부인, 우리 같이 해 보지 않겠어요? 맥퍼딘 백작 부인도요. 네?”
해리스 남작 부인은 옆에 선 친구들의 팔짱을 한 쪽씩 끼면서 애교 있게 웃어 보였다.
귀여운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귀부인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웃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 크기는 작았지만, 때마침 주위가 조용했고 발음이 정확한 탓에 모였던 귀부인들의 귀에 다 들릴 정도였다.
“굳이 그걸 해 봐야 아나? 시간 낭비를 왜 하려는 건데? 시간은 소중한데.”
“그러게 말이야. 이미 너무 많이 살아서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봐?”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단번에 시선이 모아졌다.
거기엔 열다섯, 혹은 열여섯 살쯤으로 보이는 금발과 은발의 귀족 영애가 서 있었다.
순간 시선이 몰리자 실수를 깨달았는지 어린 영애들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공개적으로 저격당한 해리스 남작 부인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호흡까지 거칠어졌는데, 이대로 가만히 뒀다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았다.
곁에 섰던 슈라더 후작 부인이 한마디 할 요량으로 입을 벌리려고 할 때였다.
“저런… 말조심 하셨어야죠, 영애들. 이렇게 듣는 귀가 많은 자리일수록 더욱.”
핸더슨 공녀의 목소리였다.
어린 동생들을 타이르듯 다정하면서도 단호한.
핸더슨 공녀의 말에 금발과 은발의 어린 영애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옆의 친구에게 속삭이려면 좀 더 작은 목소리로 조심히 했어야지요. 둘만 있는 장소가 아니니까요.”
핸더슨 공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낌새가 영 이상했다.
핸더슨 공녀는 어린 영애들의 경솔한 태도를 나무랐지만, 그녀들의 경솔한 생각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마치 영애들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라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꼴이 된다.
시험 삼아 요소킨 운동 수업을 참관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맞는 것이 된다.
중년의 귀부인은 이미 너무 많이 살았기에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맞는 것이 된다.
‘아니잖아! 그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잖아!’
당장이라도 외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세게 말아 쥐었다.
비단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곁에 섰던 앨리슨과 조안, 그리고 맨디의 얼굴에 미묘한 불쾌감이 떠오르는 게 확실히 보였다.
슈라더 후작 부인의 눈매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핸더슨 공녀의 다그침은 계속 이어졌다.
“이리 와서 해리스 남작 부인께 정중하게 사과드리세요. 귓속말로 하려던 것을 실수로 크게 말했다고요.”
아예 쐐기를 박는구먼!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금발과 은발의 어린 영애들은 핸더슨 공녀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앞으로 나온 그녀들은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해리스 남작 부인.”
“경솔하게 목소리를 크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의 해리스 남작 부인은 아무런 대답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어린 영애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애써 화를 억누른 채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죠.”
“네?”
“사과하는 것은 잘한 일이지만, 사과의 내용이 잘못됐잖아요.”
“…….”
어린 영애들은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눈치였다.
꿀 먹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한 채 내 얼굴만을 멀뚱히 바라봤다.
하긴 아직 어린 영애들에게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을 바라는 것은 무리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만에 오지랖을 발동시켜야 할 순간이었다.
“로빈스 영애와 브라운 영애라고 했죠? 로빈스 영애는 독서를 좋아하나요? 어떤 책을 좋아하죠? 역사책을 좋아하나요?”
“아니요. 역사책보다는 자서전을 좋아해요.”
금발의 영애는 내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래도 대답은 했다.
이번엔 은발의 영애를 보며 물었다.
“브라운 영애는 어때요? 역사책이 좋은가요, 아니면 자서전?”
“저는 로맨스 소설책을 좋아해요.”
“자서전은요? 별로 안 좋아하세요?”
“네. 시라가 추천해 준 것을 읽어 봤는데, 제 취향은 아니더라고요. 로맨스 소설이 더 제 취향에 맞아요.”
은발의 영애가 옆에 선 친구를 힐끗 보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불편한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답하는 모습에 화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더 부드러워졌다.
“그것 봐요. 영애도 친구의 추천을 받고 직접 읽어 보고 나서야 자신의 취향이 아니란 걸 알았잖아요.”
“…….”
“해리스 남작 부인께서 요소킨 운동 수업의 참관을 결심하신 것도 그것과 같은 논리예요. 아시겠어요?”
그제야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한 어린 영애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요.”
아직 할 말이 더 남은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 영애들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또?’, ‘더 있어?’ 이런 비슷한 말을 내뱉고 싶은 걸 꾹 참는 것 같았다.
“거저 얻어지는 젊음을 지금 좀 누리고 있다고 너무 우쭐해하지 말아요. 그거 금방 사라질 테니까. 잠깐일 거예요.”
내 말이 확실히 와닿지 않았는지 어린 영애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짙게 떠올랐다.
나는 마지막으로 어린 영애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해리스 남작 부인에게 다시 제대로 사과하라는 신호였다.
영애들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닌지 내 눈짓 신호의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다시 한번 해리스 남작 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생각과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웠습니다.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해리스 남작 부인.”
이번엔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해리스 남작 부인의 얼굴에 드디어 산뜻한 미소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남작 부인은 어린 영애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들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갑자기 손을 붙잡힌 영애들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좋아요. 그렇다면 영애들도 요소킨 운동 수업을 같이 참관하는 건 어때요?”
“네에?”
“그, 그건….”
어린 영애들의 입이 속절없이 벌어졌다.
그녀들뿐만이 아니었다.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해리스 남작 부인은 방긋방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딱 한 번만이라도 좋아요. 네?”
어린 영애들은 느닷없는 상황에 여전히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모르겠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썩은 표정의 도론 공녀가 한마디 하려는지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벌릴 준비를 하는 게 보였다.
그녀에게 선수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재빨리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딱 한 번이면 돼요. 알타라스를 영애들 저택으로 보낼 테니까 타고 와요.”
“아, 알타라스라고요?”
“네, 알타라스. 타 본 적 있어요?”
내 물음에 로빈스 영애와 브라운 영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대감을 가득 담은 어린 영애들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마법 마차, 알타라스는 최근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 급상승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탈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다.
특히 라하브에서만 줄곧 지내는 어린 귀족들의 경우 더욱 그랬다.
그런데 알타라스를 공짜로 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분명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터였다.
어린 영애들이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의 눈치를 살피며 머뭇거렸다.
호기심이 동하지만 그래도 공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뜻 긍정의 대답을 내놓기는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방금 전까지 같은 편에 섰던 사이니까 말이다.
틈새를 비집고 도론 공녀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가 어린 영애들에게로 향했다.
“정말 너그러운 제안이군요. 그러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굳이 지금 여기서 결정할 필요는 없겠죠. 안 그래요? 집에 돌아가서 천천해 생각해 봐요.”
“…네.”
“그게 좋겠어요.”
로빈스 영애와 브라운 영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도론 공녀의 입술 끝에 흡족한 미소가 걸리려는 찰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흡족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나는 손가방에서 꺼낸 명함을 어린 영애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도론 공녀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집에 가서 어머니들과 상의해 보세요. 괜찮다면 어머니들과 함께 참관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어머니들도요?”
“어머니들까지요?”
놀란 영애들의 입이 동시에 열렸다.
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오히려 어머니들과 같이 오는 게 훨씬 더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아직 어린 영애들이 보호자 없이 알타라스를 타고 먼 길을 가는 걸 어머니들께서 걱정할 것 같아서요.”
“아… 네. 깊이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윌트슨 공작 부인.”
어린 영애들은 진심으로 감동받은 눈치였다.
뺨이 복숭아 빛깔로 상기되어 있었고, 촉촉하게 젖어 든 눈동자가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휴게실 전체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해리스 남작 부인과 슈라더 후작 부인의 얼굴에도 꽤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보는 눈이 많아 귀족적인 예의상 미소는 만들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영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소는 만들어지지 못하고 눈썹과 입가가 어색하게 씰룩거리는 게 다였다.
처음 휴게실로 들어서는 핸더슨 공녀와 도론 공녀를 봤을 때 예감이 좋지 못했는데, 다 기우였다.
다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