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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142)
  • 105화

    다가오는 제크론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의 쭉 뻗은 손이 내 볼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제크론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당신이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거니까, 이 정도는 봐줄 거지?”

    짙은 눈썹, 잘생긴 눈매, 단정하게 오뚝 솟은 콧날과 맵시 있는 입술에서 장난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안 된다. 

    나를 약하게 하는 것은 그의 얼굴이니까. 

    시선을 그에게서 거두고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오늘 가운데 베개는 두 겹으로 쌓을 거니까 그런 줄 아세요.”

    “그럼 얼굴도 못 보잖아!”

    제크론의 잘생긴 미간에 주름이 진하게 생겼다. 

    내내 내 반응에 동요하지 않던 제크론에게 그나마 타격을 입힌 것 같아 조금 기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침대를 공유하고는 있지만 잠들기 전에는 꼭 침대 가운데 베개를 놓았다. 

    매튜가 아직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누차 강조한 덕분이었다. 

    베개를 한 겹으로만 쌓으면 서로의 얼굴을 보거나, 손을 슬며시 잡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두 겹으로 쌓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서로의 얼굴을 보는 것도, 손을 슬며시 잡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나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제크론을 그대로 놔둔 채 홱 몸을 돌려 침실을 나섰다. 

    내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가장 먼저 베개를 쌓을 생각을 하면서. 

    *   *   *

    다음 날, 오전 진찰을 위해 내 침실에 들른 매튜를 보자마자 나는 질문을 쏟아냈다. 

    “매튜, 그이 상태는 괜찮은 거 맞나요?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은 흉터 치료용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다른 이상 증세가 있었던 건 아니고요?”

    매튜는 이미 제크론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내 질문을 어느 정도 예상한 눈치였다. 

    그는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마님께서 알고 계신 것들이 다 사실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마물의 독에 중독되는 증상이 있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점점 빼앗는다고요.”

    순간 매튜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호기심이 차올랐다. 

    그가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마님, 혹시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그건….”

    이 세계가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세계이고, 소설을 읽어서 아는 내용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구체적인 기억이 있는 건 아니에요.”

    “역시 그러시군요.”

    매튜가 앞으로 내밀었던 상체를 뒤로 물려 바로 세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동자를 가득 메웠던 호기심의 빛이 단번에 희미해졌다. 

    이대로 매튜의 관심을 증발시킬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증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해요.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요.”

    “…….”

    “마물에게 심하게 공격을 당한 경우, 마물의 독에 중독된다고 했어요. 중독의 증상은 인간의 마물화고요.”

    긴장했는지 말이 빨라졌고, 말아 쥔 주먹 안이 축축하게 젖었다. 

    매튜가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길 간절히 바랐다. 

    “제크론이 입은 상처가 중독 증상을 동반하진 않았는지 걱정이 돼요. 몸이 변한다든가,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든가 하는….”

    “아니요. 제가 현재까지 파악하고 있는 바로는 그런 증상은 없었습니다.”

    “…….”

    “확실합니다. 전혀 없었어요. 믿으셔도 됩니다.”

    “그래요.”

    매튜가 재차 강조하자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매튜의 말을 신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심해.’

    지금 내 모습이 무척 못마땅했다.

    그동안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어제 우연히 약을 나르는 하녀를 발견하는 바람에 그제야 걱정하는 꼴이라니. 

    아내 자격 실격이다. 

    지독한 출산 후유증으로 생사를 오간 날들이 길었다고는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운신이 가능한지 꽤 여러 날이 지났다.

    매일 밤 제크론과 다정하게 한 침대에 누워 잔 지도 한참이나 됐고. 

    ‘그런데도 내 생각만 하고, 내 걱정만 했지. 제크론은 안중에도 없었고 말이야.’

    이기적인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자책의 늪에 빠져 있는데, 크흠, 매튜가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내 주의를 끄는데 성공한 매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님께서 말씀하신 마물의 독에 중독된다든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마물화가 된다든가 하는 증상에 대한 보고는 아직 확인된 바 없습니다.”

    “…….”

    “그래서 지금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강한 호기심이 생겼고요.”

    유능한 의사인 매튜의 관심을 끌었다는 말에 일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의 독에 의한 중독 증상이 있을 수 있음에 대해서 들었으니 앞으로 마물에 의한 부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리라. 

    그 정도면 됐다.

    “마님께서도 신문에서 읽으셔서 아시리라 믿습니다. 변이 마물이 출현했다는 것을요.”

    “네. 기존 마물에 비해서 더 강력해졌고 그래서 토벌 작전이 예상보다 길어졌다고 들었어요.”

    “맞습니다.”

    매튜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동시에 하고 있는지 단어와 단어 사이의 시간차가 평소보다 길었다.

    “변이 마물에 대해서 조사단을 꾸려 조사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가설이요?”

    “그게… 이번에 발견된 변이 마물은 과거와 달리 강력해진 모습이지만, 다음번에 발견될 변이 마물은 독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요.”

    “아.”

    힘을 잃은 턱이 그대로 벌어졌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가설처럼 들렸다. 

    ‘역시 유능한 의사다워! 매튜에게 말하길 잘했어.’

    그의 가설대로라면 원작의 타임라인과도 얼추 맞다 떨어졌다. 

    몇 개월 전부터 시작된 마물의 변이가 계속 이어지다가 마침내 1년 뒤에는 더 강력해져서 독까지 뿜어내게 된다! 

    “마물의 변이를 막아야 해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놀랐는지 매튜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 물론입니다. 지금 변이 마물을 인위적으로 만든 세력을 추적 중에 있습니다. 그 실체가 확실해지면 그땐 그에 합당한 조치가 이뤄질 것입니다.”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

    “변이 마물을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요?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아… 네.”

    매튜가 난색을 표하며 대답했다. 아직 한창 조사 중인 내용을 일반인에게 얼떨결에 말해 버린 것에 대해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변이 마물이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요?”

    “…….”

    “그 배후 세력이 있다고요?”

    당연히 매튜는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는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더 이상 캐물어서 매튜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입을 다물어야 했다. 

    나도 매튜도 입을 꾹 다문 채 침묵 속에서 오전 진료가 시작됐다. 

    주위는 조용했지만, 내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의 폭풍으로 난장판이 됐다. 

    모르긴 몰라도 매튜의 머릿속 역시 마찬가지리라. 

    의식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는 매튜를 보며 나만의 가설을 차곡차곡 쌓아 갔다. 

    *   *   *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매튜는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문가로 가, 창문을 열고 찬바람을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요즘 들어 갑자기 맡은 업무가 늘어나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변이 마물 조사와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조사. 

    둘 다 몹시 중요한 안건이었고, 매튜의 왕성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사였다. 

    하지만 공작성의 주치의로서의 업무도 처리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버거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마 마님께서 건강을 많이 회복하신 상태라서 다행이지.’

    만약 엘프윈이 여전히 침대 신세를 져야 하는 상태였다면 두 개의 조사 업무를 다 맡기는 무리였을 터였다. 

    ‘그런데 두 개의 조사가 모두 위벨교 신전과 연관되어 있다니.’

    매튜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처음 조사를 시작했을 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드는 위벨교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무척 난감했다. 

    쉐리던 왕국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일신 위메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왔다. 

    위메나를 거역하고 위벨교를 부정하는 삶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와 아르젠토 차에 대한 조사를 이어 갈수록 위벨교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더 이상 난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누군가의 추악한 민낯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다는 열망만이 생길 뿐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마른세수를 한 매튜는 창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았다. 

    높이 쌓인 각종 문서들이 매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안건에 대한 조사였다면 높이 쌓인 문서들에 매튜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벨교 신전의 비리일지도 모르는 안건에 대한 조사였기에 매튜의 가슴은 착 가라앉았다. 

    매튜는 ‘어떤 희망이나, 어떤 절망도 없이 오로지 진실만을 밝혀내리라.’고 다짐하며 벗어 뒀던 안경을 다시 꼈다. 

    하지만 집중이 쉽지 않았다. 

    엘프윈이 했던 말이 자꾸 머릿속을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마물의 독에 의한 중독 증상이라니…! 인간의 마물화라니!’

    머릿속에 각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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