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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42)

104화

늦은 밤, 세르안과 놀아 주다가 세르안이 잠들자 아기방을 나섰다. 

내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은쟁반을 들고 가는 하녀와 마주쳤다. 

은쟁반 위에는 물주전자와 작은 접시가 있었는데, 접시 안에는 동그란 알약 세 개가 놓여 있었다.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하는 하녀를 보며 물었다. 

“약이네?”

“네. 주인님께서 드시는 약입니다.”

“그이가 약을?”

금시초문이었다. 

어디가 아픈가?

약까지 먹을 정도라면 가벼운 증상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하녀가 단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네. 마물 토벌 작전에서 돌아오신 후 계속 복용 중이십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나는 모르고 있었구나.”

그제야 마물 토벌 작전 중 제크론이 어깨를 크게 다쳤던 것이 생각났다. 

통신구로 대화하는 내게 숨기려다가 결국 들켰다. 

언제나 나를 알뜰살뜰 챙겨 주는 제크론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가?

마물 토벌 작전에서 돌아온 지 3개월이 넘는 동안 약을 복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인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무심할 수가!’

하녀가 든 쟁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하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마님.”

“죄송하다니, 뭐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하녀의 얼굴을 봤다. 

어린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런! 내 스스로를 탓하는 말이었는데, 하녀는 저를 책망하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오해가 더 깊어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두 손을 팔랑팔랑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널 탓하는 말이 아니었단다! 자책하는 말이었어.”

“…….”

하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를 어째…. 하, 하하…. 민망한 미소를 내걸며 하소연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다. 

“아휴, 여태껏 남편이 아픈 것도 모르는 아내라니, 한심하지 않니?”

“아, 아뇨! 마님께서 한심하실 리가요! 전혀 그렇지 않으세요!”

하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으며 답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라도 하게 될까 잔뜩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런! 오해를 풀려던 대화가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쟁반을 쥐고 있는 하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쟁반을 맞잡았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도 잊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약 심부름은 내가 직접 할게. 하루쯤은 내 남편 약, 내가 챙겨도 되겠지?”

“아….”

어린 하녀가 더 깊은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나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긴장한 하녀가 쟁반을 꽉 붙든 채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쟁반을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 비슷한 것이 이어졌다.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단호한 눈빛으로 경고 아닌 경고를 날렸다. 

“긴장할 필요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걸. 하지만 지금 쟁반을 넘기지 않으면 이번엔 진짜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아… 네, 넷!”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쟁반을 쥐고 있던 하녀의 손에 힘이 빠졌다. 

쟁반이 흔들리는 바람에 물주전자 안의 물이 찰랑거리면서 조금 넘쳤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름이 뭐니?”

“내, 낸시입니다. 지난달에 들어왔습니다. 고, 공작성에서 일하게 돼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짝 긴장해서 차렷 자세로 선 채 딱딱하게 말하는 모습이 꼭 신입 군사 같았다. 

열다섯은 됐을까.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스스로 밥벌이를 하는 낸시가 대견스러웠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오늘은 고마웠어. 덕분에 그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어서 들어가서 쉬렴. 좋은 꿈꾸고.”

“네, 마님….”

얼떨떨한 표정의 낸시를 뒤로 한 채 제크론의 방으로 향했다. 

천천히 걷는데, 뒤에서 낸시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께서도 오붓한 시간 보내세요! 좋은 꿈꾸시고요!”

“그래.”

고개를 돌려 낸시를 힐끗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리숙한 낸시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   *   *

제크론의 침실 문 앞에 선 나는 똑똑똑, 차분히 노크를 했다. 

“들어와.”

안에서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금 목욕을 마쳤는지 제크론은 샤워 타월을 허리에 두른 채 머리를 말리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가 그대로 보였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역삼각형의 상체는 예술품이 따로 없었다. 

만져 보지 않고 보기만 해도 얼마나 단단한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부부 사이이기는 하지만, 매일 밤 침대를 공유하는 사이이기는 하지만, 그의 벗은 상체를 보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반사적으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어깨에 난 커다란 흉터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물의 발톱에 의해 찢긴 흉터였다. 

‘몇 달이 지나도 저렇게 흉터가 크게 남았는데, 얼마나 아팠을까.’

가슴이 아팠다. 

크고 날카로운 바늘 하나가 가슴 속 깊은 곳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제크론은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거기 놓고 가.”

매일 밤 그렇듯, 오늘도 하녀가 약을 들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나는 가만히 선 채 제크론을 바라봤다.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제크론이 뒤를 돌아봤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푸른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엘프윈, 당신이 여긴 어떻게!”

“약을 가져왔어요.”

쟁반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고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나는 여태껏 당신이 약을 먹고 있는 것도 몰랐지 뭐예요. 신경 못 써서 미안해요.”

“당신이 신경 써야 할 정도로 심하지 않아.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래요? 내 남편이고, 내 아이의 아빠가 몇 개월 동안 약을 먹어야 할 정도로 아픈데.”

제크론이 얕은 한숨을 내뱉으며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의 몸 전체에서 퍼져 나오는 향긋한 비누 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미 상처는 다 나았어. 흉터를 지워 주는 약일뿐이야. 아픈 게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매일 어떤 약을 먹고 있는지 정도는 나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어요. 아내의 의무라고요.”

나를 끌어안은 제크론의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의 숨결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제크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짜 안 아픈 거 맞아요? 이 약, 흉터 치료약인 거 맞아요? 혹시 다른 증상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제크론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 걱정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작에서 마물에게 당한 제크론은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마물의 독에 중독됐다는 것이 원작의 설명이었는데, 그 중독 증상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을 잃고, 몸과 정신이 점점 마물에게 지배당하게 되는 식이었다. 

‘하지만 시기상으로 아직 한참 일러.’

이성을 잃을 정도의 중독 상태에 빠진 시기는 엘프윈이 죽고 1년 뒤였다. 

그러니 아직은 아니리라.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어. 이미 원작은 뒤틀렸으니까.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니까.’

떨지 않으려고 애써 봐도 소용없었다. 

제크론을 담은 눈동자도, 제크론의 몸에 닿은 손도 계속 떨렸다. 

얕은 한숨을 뱉은 제크론이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픈 거 아니야. 다른 증상은 없어. 정말 흉터 치료용 약일뿐이야. 원한다면 내일 매튜에게 물어도 좋아. 내 건강 상태를 모두 공유하라고 지시해 놓을 테니까. 이제 됐지?”

“네, 알았어요.”

“날 이리도 걱정해 주는 아내라니…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아.”

고개를 숙인 제크론이 내 귓가에 대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운 숨결이 귓가에 바로 닿는 바람에 열기가 훅 끼쳤다. 

제크론이 그대로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이 맨살에 스치자 나는 어깨를 움찔 떨어야 했다. 

“당장 당신을 안고 싶지만… 매튜가 당신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 지금 무척 참는 중이야. 힘들다고.”

아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후우, 짙은 한숨을 내쉰 제크론이 바로 몸을 뒤로 물렸다. 

뜨거운 접촉이 사라지자 갑자기 한기가 들어 닭살이 오소소 일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하고 싶어도 참아.”

제크론이 장난기 가득한 눈을 반으로 접으며 생긋 웃었다.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크론을 세게 흘겨보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뭘 하고 싶어 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뭘 참아요?”

아, 이 대사에 더듬으면 안 되는데! 

아랫입술을 지그시 짓씹었다. 

그래도 그를 흘겨보는 눈에는 힘이 풀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제크론에게는 타격감이 전혀 없는 모양인지 여전히 미소 만발한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들이미는 게 아닌가!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뭐, 뭐예요?”

윽, 또 더듬어 버렸다. 

긴장하면 늘 이런 식으로밖에 대응이 안 된다. 

다가오는 제크론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의 쭉 뻗은 손이 내 볼을 살포시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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