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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1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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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흡,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티 났나?

    들켰다는 생각에 얼굴에 열이 몰렸는지 볼이 홧홧했다. 

    나는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야한 생각이라뇨? 그럴 리가요! 야한 생각을 하는 얼굴은 또 뭐고요? 당신도, 참!”

    “말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커지는 걸 보니 내가 제대로 맞혔나 보군.”

    헙, 이 사람… 이젠 나를 완전히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손에 적응한 것처럼, 제크론도 내 말투와 표정에 완벽히 적응한 것이리라. 

    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제크론을 흘겨보며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 아니라고요.”

    “알았어. 당신이 아니라면 아닌 거지.”

    “정말요?”

    “응.”

    짧게 대답한 제크론이 씨익 웃었다. 

    별거 없는 그 모습조자 눈부셨다.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남주의 모습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식사하는 내내 이런 상태일 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걱정이 몰려왔다. 

    황홀한 걱정이었다. 

    *   *   *

    운동 후, 간단한 다과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데 디아브 백작 부인이 소리 높여 외쳤다. 

    “와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땀 흘리며 운동하니까 너무 좋아요! 역시 우리 요소킨 식구들, 사랑해요!”

    “어머나, 갑자기 고백 받으니까 부끄럽잖아요, 디아브 백작 부인!”

    “그러게요!”

    호호호, 맑은 웃음소리가 운동실 가득 울려 퍼졌다. 

    한참을 웃던 디아브 백작 부인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윌트슨 공작 부인.”

    “네?”

    “우리 서로 알고 지낸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고, 매주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이이기도 하고, 아이도 비슷한 시기에 낳았잖아요?”

    “그렇죠.”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의아한 마음으로 디아브 백작 부인을 마주 봤다. 

    그녀가 눈썹을 씰룩거리며 물었다. 

    “그럼 우리 친한 거 맞죠? 특별한 사이인 거죠?”

    윽, 디아브 백작 부인의 돌직구에 나는 목구멍이 턱 막혔다. 

    순간 모두의 시선에 내게로 향했다. 

    이렇게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되는 상황은 익숙하지 않았다.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렇죠?”

    겨우 대답했다. 

    하지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고, 무의식중에 끝을 살짝 올려 버려 자신 없는 대답처럼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브 백작 부인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붉은 입매가 양옆으로 주욱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보며 노래하듯 외쳤다. 

    “그럼 우리 앞으로 친근하게 서로 이름을 부르면 어떨까요? 오늘부터 친구 먹기로 해요! 여기 있는 모두가 다요! 어때요?”

    디아브 백작 부인은 빙 둘러 앉은 부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며 물었다. 

    메릴 선생님을 비롯해서 프렛 백작 부인과 데이비스 자작 부인이 무척 정열적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 표시를 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무슨….’

    감히 상상조차 한 적 없는 훈훈하고 감동적인 광경이란 말인가!

    부인들은 내 입술만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무척이나 귀한 존재였다.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직접 쌓은 인연이었다. 

    이미 내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좀 달랐다. 

    친근한 우리 사이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을 친구라고 여긴 것처럼 그들도 나를 친구라고 여겨 줬다는 생각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후우, 눈물을 삼키며 심호흡을 했다. 

    나를 바라보는 부인들의 얼굴을 보며 기억하고 있는 그녀들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어 봤다. 

    앨리슨 디아브 백작 부인, 조안 프렛 백작 부인, 맨디 데이비스 자작 부인, 그리고 메릴 스웨이드 선생님까지. 

    “조… 좋아요! 앨리슨, 조안, 맨디 그리고 메릴!”

    친구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 봤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느라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프윈!”

    모두가 한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 줬다. 

    와아, 손발을 힘껏 내저으면 금방이라도 하늘 위로 떠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제크론 외에도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것도 네 명이나 말이다. 

    ‘아, 아니지. 로저먼드를 깜빡했네.’

    어쨌든 기분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때였다. 

    흐흐흑, 누군가가 울음을 터트렸다. 

    메릴이었다.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내는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흐흑…. 기쁜 날인데 제가 또 주책없이 눈물을 흘려서 미안해요! 그래도 너무 좋은 걸 어떡해요… 흐흑!”

    “울만큼 울어요, 메릴! 기쁜 날인데 뭐 어때요!”

    “맞아요. 괜찮아질 때까지 맘껏 울어요!”

    모두가 메릴을 토닥여 줬다. 

    나는 그 틈을 타 재빨리 눈가에 삐져나온 눈물을 훔쳤다. 

    흐으… 흐흐흑, 메릴의 울음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마음껏 울어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우리는 다 난감한 상태가 됐다. 

    메릴은 아예 앨리슨의 품에 폭 안긴 채 오열했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잠시 후, 모두의 시선이 벽시계로 향했다. 

    다음 수업이 있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서야 할 때였다. 

    앨리슨이 내게 눈짓했다. 

    나보고 말하라는 의미였다. 

    꼴깍, 마른침을 삼킨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메릴? 곧 다음 수업이 있잖아요. 이제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흐흑… 어, 없어요… 흑!”

    “지금 없다고 한 거 맞아요? 없다니, 뭐가요?”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다시 메릴에게 물었다. 

    내내 앨리슨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메릴이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눈과 코가 빨갰다. 

    나는 얼른 새로운 손수건을 건넸다. 

    젖은 손수건을 내려놓고 새로운 손수건을 손에 쥔 메릴이 여전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흐흑… 너무나 좋은 날인데… 흑, 안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지… 흐흑, 않았는데!”

    “메릴, 무슨 일인데 그래요? 걱정 말고 털어놔 봐요.”

    “그래요. 친구가 좋다는 이유가 뭐겠어요? 기쁜 일은 나눠서 배가 되고, 힘든 일은 나눠서 절반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맞아요. 우리가 들어 줄 테니까.”

    메릴을 향한 모두의 시선에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박혀 있었다. 

    그 온기를 느껴서였을까. 

    메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우리는 기다렸다. 

    더 이상 벽시계도 보지 않았다. 

    메릴의 반응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다음 수업은 정말 없어진 것 같았다. 

    이번 수업에도 원래 우리 네 명 외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오늘 불참 소식을 알려 왔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할 때부터 메릴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역시 그것과도 관련 있는 일인건가?’

    기다리고 있으니, 마침내 안정을 되찾은 메릴이 후우, 심호흡을 크게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며칠 전에 도론 공녀가 편지를 보내 왔어요. 더 이상 운동 수업에 참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어요.”

    “갑자기 왜 그만두겠대요?”

    “이유는 말하던가요?”

    앨리슨과 조안의 언성이 높아졌다. 

    메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이 금방이라도 다시 솟구칠 것 같았지만,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버텨 냈다. 

    “네. 요소킨 운동이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닌지 의심된다고… 흐흑!”

    그 말을 끝으로 메릴은 다시 무너져 내렸다. 

    모두가 얼떨떨한 상태로 서로를 쳐다봤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요소킨 운동이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거지?

    대체 어떤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운동실에 메릴의 울음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   *   *

    모두가 떠난 뒤, 나는 착잡한 마음을 안은 채 정원에 나갔다. 

    총총총 귀엽게 걸어 나가는 위든의 엉덩이를 따라가는 산책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후우….”

    한숨을 길게 뿜어냈지만 그래도 가슴이 영 무거웠다. 

    머릿속에는 아까 메릴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앨리슨과 엘프윈이 이른 출산을 하게 된 이유가 요소킨 운동 때문인 거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메릴이 겨우 털어 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예정일보다 앞선 앨리슨과 내 출산 때문에 도론 공녀가 트집을 잡은 모양이었다. 

    사실 예정일보다 며칠 혹은 몇 주 앞당겨지는 출산은 비일비재하다. 

    딱히 요소킨 운동을 해서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 거리가 못 된다. 

    아니, 다른 어떤 이유도 갖다 댈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물고 늘어지다니! 못된 여자들 같으니라고!’

    이를 까득 물었다. 

    괜히 나 때문에 메릴과 요소킨 운동까지 같이 엮어서 타깃이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뒤를 따르던 주디가 걱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님, 운동하시다가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주디, 그게….”

    전속 하녀인 주디와 케이트에게 별로 숨기는 게 없는 나는 운동 시간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얘기해 줬다. 

    문제를 나눈다고 해서 바로 해결책이 나타날 리 없다. 

    하지만 주디에게 말하고 나자 조금이나마 가슴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디는 심각한 얼굴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응, 도론 공녀가 가십지에도 직접 인터뷰를 했대. 아마 다음 주에 공녀의 인터뷰가 실릴 것 같아.”

    방금 전까지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가슴이 또 무거워졌다. 

    짙은 한숨이 끝도 없이 푹푹 쏟아져 나왔다. 

    그때였다. 

    주디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마님께서도 인터뷰하는 건 어떠세요?”

    “응? 인터뷰?”

    “네! 요소킨 운동 덕분에 건강해졌다, 그래서 출산도 잘 견뎌 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요.”

    햇살을 받은 주디의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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