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크흠,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윌리엄이 다시 보고서를 줄줄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라하브 길거리에 출몰하여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위벨교는 타락했다. 대신전은 썩었다. 대신관은 미쳤다. 위벨교가 제국을 집어삼키려 한다. 마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고 말입니다.”
순간 제크론과 조쉬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마물을 만들어 내고 있다, 라니!”
제크론은 윌리엄이 했던 말을 다시 그대로 반복했다.
조쉬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는 자일까요?”
“이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지. 하지만!”
제크론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입을 다문 채 턱을 쓰다듬던 제크론이 마침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조사한 자들 중 가장 구체적인 말을 하고 있어. 뭔가를 봤거나,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 자를 직접 만나 봐야겠다. 신변은 확보했나?”
“그게… 아직입니다.”
어두운 낯빛의 윌리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실망하는 제크론의 눈빛을 본 윌리엄이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두 달 전까지는 라하브 거리에서 종종 봤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통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흐음….”
제크론의 잘생긴 미간에 깊은 계곡이 생겼다.
조쉬와 윌리엄은 마른침을 삼키며 제크론의 눈치만을 살폈다.
마침내 제크론의 명령이 떨어졌다.
“최대한 빨리 이자의 신변을 확보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각하.”
“만약 이자가 사실을 말하는 것이 맞는다면, 위협을 느낀 대신전에서 먼저 손을 썼을 수도 있다.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이어 가라.”
“네, 명 받들겠습니다!”
목청 큰 윌리엄의 대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제크론은 방금 전까지 ‘미치광이’라며 속으로 홀대하던 것도 잊은 채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바늘 하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그 바늘이 이번 조사의 열쇠가 되기를 바랐다.
* * *
나는 세르안을 안고 브렌트의 캔버스 앞에 앉았다.
그사이 모자상 작업은 차근차근 진행되어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흐으음, 으음…. 브렌트는 집중하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오후의 응접실에서 귀여운 아들을 안고 화가의 콧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됐다.
최고의 기분.
때가 오면 떠나보내야 할 기분이었기에,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려고 노력했다.
“꺄아… 음마, 으음, 마아… 아아.”
“어머나! 세르안! 너 방금 엄마라고 한 거야?”
분명 들었다.
세르안은 분명 ‘엄마’라고 했다.
물론 아직 아기니까 발음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확실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멀찍이 앉아 있던 유모가 세르안의 옹알이를 가까이에서 제대로 듣기 위해 호다닥 달려왔다.
나는 세르안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세르안, 다시 불러 보렴. 아까처럼, 엄마라고 불러 봐!”
“아암… 으음, 마아, 마아….”
“맞죠? 지금! 엄마라고 부른 거 맞죠?”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유모를 보며 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모는 이내 생긋, 미소를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유모님, 거짓말을 잘 못하시네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참는 거 다 티 나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브렌트가 히죽거리며 찬물을 끼얹었다.
나는 브렌트를 흘겨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다시 유모에게 물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목소리에 간절함 같은 게 담겨 있었다.
“아닌 것 같아요? 제 귀에는 분명 ‘엄마’라고 들렸는데?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아, 아니, 거짓말이 아니라… 마님께서 제대로 들으신 게 맞는 것 같아요. 정말…로요.”
하, 하하…. 유모가 난감하게 웃었다.
실망감이 몰려왔다.
“유모는 진짜 거짓말 잘 못하네요.”
“죄, 죄송합니다, 마님.”
“…….”
입을 꾹 닫은 채 시무룩하게 있는데 브렌트가 키득거리며 웃는 게 아닌가.
나는 브렌트를 향해 뾰로통하게 말했다.
“웃지 말아요, 브렌트.”
“마님께서는 좀 웃으셔야겠습니다. 아직 그림 작업 중이거든요.”
“아, 맞다. 크흠, 그렇군요.”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중인 것을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후우,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세르안을 품에 고이 안고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애쓰는 것도 잠시뿐, 방실방실 웃는 세르안의 오동통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절로 미소가 흘러 나왔다.
“끄음… 아아, 어엄, 므아… 어음마, 아아….”
“아! 다들 들었죠? 이번엔 확실해요. 분명 엄마라고 했어요!”
“네, 저도 들었어요, 마님! 도련님께서 엄마라고 했어요!”
“거 봐요! 역시 그렇죠!”
이번엔 유모도 확실히 들었다고 했다.
그만큼 세르안의 발음이 정확했다.
나는 홱 고개를 돌려 브렌트를 봤다.
시선이 마주치차 브렌트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브렌트도 들었다는 의미였다.
씨익, 입꼬리가 중력을 거스르며 자꾸만 위로 올라갔다.
“우리 세르안! 벌써부터 ‘엄마’도 말할 줄 알고! 장하다, 장해! 우리 아들 장하다!”
하하하,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림 작업은 세르안이 졸려서 칭얼거릴 때까지 이어졌다.
세르안이 유모의 품에 안겨 방으로 돌아갔고, 응접실에는 나와 브렌트만 남았다.
우리 앞에 바로 티 테이블이 세팅됐다.
“곧 공작님의 부모님께서 방문하신다면서요?”
“네.”
짧게 대답한 나는 호로록 홍차를 입 안에 머금었다.
향긋한 차향이 입 안 가득 번져 나갔다.
무슨 즐거운 생각을 하는지 나를 보는 브렌트의 시선이 초롱초롱 빛났다.
“3대가 모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을 테니, 가족 초상화를 그리는 건 어떨까요?”
“글쎄요.”
나는 다시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기는 했지만, 사실 캔버스 앞에서 시부모님과 오랜 시간 함께 앉아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은 생각이기는 한데… 사실 요즘 그이도 이런저런 업무로 바쁘고, 저도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보다는 산책하는 시간을 더 늘리고 싶은 심정이라서요.”
“아, 그러시군요. 하긴 오랜 시간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지요.”
“네. 그래서 3대 초상화를 그리고 싶은 생각은 잠시 서랍 속에 고이 간직해 두는 게 어떨까요?”
“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브렌트가 호탕하게 웃으며 호두 파이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브렌트는 인기 많은 신예 화가답게 사교성이 좋았다.
타고난 성향이 원래 그런지, 아니면 화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 후천적으로 연마한 기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렌트는 낯선 사람과 쉽게 대화를 시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와 대화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시부모님께서 오시면 잘 부탁드려요. 다정한 브렌트가 싹싹하게 말벗해 주면 좋아하실 거예요.”
“물론 얹혀 사는 입장이니 노력할 것입니다만, 그래도 마님만큼이야 하겠습니까?”
“저만큼? 뭐가요?”
의미가 확 와닿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마님께서 훨씬 다정하고, 훨씬 싹싹한 말벗이 되리라 생각해서요.”
“제가요? 에이, 설마요. 전 말주변도 없고, 게다가 시부모님과는 아직 서먹하거든요.”
손을 팔랑팔랑 내저으며 말했다.
역시 브렌트는 고용주의 비위를 맞추는 기술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브렌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땐 그의 눈동자는 꽤 진지한 빛을 품고 있었다.
“과연 어떨까요? 물론 처음엔 서먹하겠지만 며칠만 지나면 분명 마님께서는 다정하고 싹싹한 말벗이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번엔 제가 맞을걸요?”
후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은 브렌트는 다시 호두파이를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정말 그의 말처럼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 * *
쿠건 백작가의 티 파티가 끝난 후. 핸더슨 공작저로 돌아가는 마차 안.
제나의 편치 못한 심기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상해. 어쩜 다들 윌트슨 공작 부인의 아르젠토 차 중독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거지?”
“이야기하던걸? 멜라니와 에이미가 소곤거리는 걸 들었어.”
메리엔의 심드렁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제나는 두 눈을 이글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멜라니와 에이미? 소곤거렸다고? 그걸로는 부족해!”
“키튼 백작과 블록 남작도 아르젠토 차에 대해서 이야기하던걸?”
“아니, 아니야! 역시 부족해!”
제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빼액 외쳤다.
메리엔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엔은 직감했다.
현재 제나가 원하는 것은 정확한 정보 따위가 아닌 공감이었다.
“맞아. 한참 부족하긴 하지. 아무래도 이야기의 초점 자체가 윌트슨 공작 부인의 아르젠토 차 중독에서 순식간에 대신전의 약초 관리 부정부패로 넘어간 느낌이야.”
“그 여자, 남편 덕을 톡톡히 보는군. 재수 없어!”
메리엔이 공감해 주자 기분이 좀 풀렸는지 제나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다행이었다.
한숨 돌린 메리엔이 부채를 팔랑이며 물었다.
“그나저나 내일 요소킨 운동 수업이 있는 날인데, 갈 거야? 얼굴 보기 좀 그렇지 않아?”
“요소킨?”
제나의 두 눈이 음흉한 빛을 발하며 반짝거렸다.
* * *
출산 후, 처음으로 요소킨 수업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3개월 만인가?’
게다가 오늘은 디아브 백작 부인도 수업에 참여한다고 했다.
오랜만에 첫 요소킨 회원 네 명이서 다함께 모이는 날이었다.
“으으음, 으음….”
1층 다이닝룸으로 향하는데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당신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제크론!”
복도에서 만난 제크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사뿐 얹었다.
맞닿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엔 에스코트를 위해 내미는 그의 손이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를 하고, 식사 후에는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무척 자연스러운 행동이 됐다.
‘하긴 그동안 수십 번도 넘게 잡은 손이니까 자연스러울 만도 하지. 손만 잡았나? 그보다 더한 것도… 어머! 나, 아침부터 왜 이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까지 이어졌다.
고개를 붕붕 저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쫓아내고 있을 때였다.
“야한 생각을 한 얼굴이군. 어떤 야한 생각을 한 거야, 당신?”
제크론이 은근한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