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42)
  • 101화

    윌트슨 백작 부인은 멍한 눈으로 친한 얼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뎀프샤에 우리 부부만 가면 적적할 수도 있으니 친구를 데려와도 좋다고 하네요? 이게 대체 무슨….”

    윌트슨 백작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모였던 귀부인들이 앞다퉈 입을 열었다. 

    모두 머리와 어깨를 앞으로 바짝 내미는 것은 기본이었고, 누군가는 손을 번쩍 들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했다. 

    “저희 부부가 갈게요!”

    “무슨 소리세요? 윌트슨 백작님과 우리 남편이 좀 더 사이가 좋잖아요. 저희 부부랑 같이 가요!”

    “어머나! 그런 자리는 저희랑 같이 가아죠, 안 그래요, 윌트슨 백작 부인?”

    모두가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윌트슨 백작 부인의 귀에는 그 내용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너무너무 이상해!’

    엘프윈 윌트슨. 

    그녀는 어떤 사람이던가! 

    불과 1년 전 뎀프샤를 찾았을 때 받았던 냉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썼다. 

    식사 시간에 함께한 적은 거의 없었고, 티타임에도 잠깐 함께 앉았다가도 먼저 자리를 뜨기 일쑤였다. 

    수도에서 열리는 연회에 함께 참석하기로 해서 다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다며 못 가겠다고 했을 때는 기가 막힐 정도였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이가 갈렸다. 

    아무리 애지중지 키운 귀한 아들의 부인이라고는 하지만,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여자였다. 

    그래도 남편이 하도 손자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짧은 일정으로 다녀오기로 합의를 본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아. 설마 진짜 다른 사람이 쓴 건가? 편지 대필가를 고용해서?’

    아니, 아니지. 

    윌트슨 공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편지는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은 고용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특히 마법 마차를 보낸다든가, 다른 손님을 더 초대해도 된다든가 하는 내용은 추가 예산이 들어가는 부분이므로 반드시 엘프윈의 허락이 필요했다. 

    “기억을 잃었다던데,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귀부인 중 한 명이 말했다.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도 소문은 들었어요.”

    “수도에서는 가십지에도 실린 내용이래요.”

    가십지는 수도에서나 유통될 뿐, 지방 영지까지 유통되는 가십지는 없었다. 

    엘프윈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윌트슨 백작 부인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냥 뜬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진짜 심각한가?’

    윌트슨 백작 부인의 미간에 주름이 진하게 잡혔다. 

    그 모습에 놀란 귀부인들이 백작 부인을 타일렀다. 

    “걱정할 거 뭐 있나요? 일단은 알았다고 하고, 직접 만나서 확인해 보면 되는 거죠, 뭐.”

    “맞아요. 걱정하면 주름만 늘어요. 그러지 마세요.”

    “그러니까 아무 생각 말고 저희 부부와 같이 갑시다. 어때요, 백작 부인?”

    “어머나, 또 그러신다! 저희 부부가 제격이라니까요!”

    “무슨 소리세요? 낯가리는 윌트슨 백작님이 그래도 저희 남편이라 더 친하시잖아요!”

    귀부인들이 동시에 떠드는 바람에 유리 온실 안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윌트슨 백작 부인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동안 잠잠했던 두통이 다시 도질 것만 같았다. 

    백작 부인은 심호흡을 크게 하며 숨을 모으고는 우렁차게 외쳤다. 

    “자자, 그만하세요들!”

    백작 부인의 외침에 순간 온실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윌트슨 백작 부인에게로 쏠렸다. 

    “다투실 필요 없어요! 다 같이 가면 되니까! 다들 시간 괜찮으시죠?”

    윌트슨 백작 부인의 통 큰 결정에 모였던 귀부인들이 꺄악, 꺅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머리 희끗한 중년의 부인들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마냥 소녀 같았다. 

    *   *   *

    “당신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잖아.”

    아침 식사 시간. 

    윌트슨 백작 부부가 친구들과 함께 공작성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제크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절대 무리하지 않아요. 당신, 나 몰라요? 건강 우선주의라는 거? 케이트와 주디가 곁에 있으니 걱정 없어요.”

    부드러운 빵에 블루베리 잼을 바르면서 여유롭게 후후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제크론의 찡그린 얼굴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얕은 한숨을 내뱉은 나는 또 덧붙였다. 

    “지난번에도 말했잖아요. 약간의 긴장감은 정신 건강에 오히려 좋다고요. 그래서 일부러 친구 분들까지 초대한 거예요. 좀 더 긴장하려고요.”

    “조금이 아닐 것 같아서 하는 소리지.”

    제크론은 쉽게 물러서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수밖에. 

    맹랑한 속내를 드러내는 수밖에.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케이트한테 들었어요. 1년 전 어머님, 아버님이 뎀프샤에 방문하셨을 때, 내가 무척 불편해했다고요. 티가 날 정도로.”

    “그건 서로 어색한 사이였으니까 그렇지.”

    내 편을 들어주는 제크론이 감사했지만 나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서로 어색한 사이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됐어요. 어머님과 아버님은 당신을 낳고 길러 준 분들이세요. 그리고 공작성에 찾아와 주신 손님이시고요.”

    “…….”

    “이번엔 노력하고 싶어요. 적어도 어머님과 아버님이 제대로 된 대접은 받고 있다고 느끼실 정도는 해야죠. 하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어요. 그러니까 친구 분들과 함께 오시는 게 좋다고 생각한 거예요.”

    제크론의 푸른 눈동자에 의문의 빛이 들어찼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친구 분들과 함께라면 내가 매번 식사 자리나 티타임, 그리고 라하브에서 열리는 연회나 라하브 시내 쇼핑에 함께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아, 그런 얘기였군.”

    그제야 이해했는지 제크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생글생글 웃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제크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당신이 사용하는 내탕금에 한계를 두지 말라고 집사장과 하녀장 그리고 조쉬에게 다 일러뒀어.”

    “네?”

    입이 떡 벌어졌다. 

    입 안에 음식물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있었다면 바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을 터였다. 

    순간 이곳에서 눈 뜨자마자 그에게 달려가 9년 치 내탕금을 가불해 달라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한 기억인데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 돼 버렸다. 

    ‘한계 없는 내탕금이라니…!’

    이건 마치 한도 없는 신용카드나 백지 수표, 혹은 뭐든지 꺼내 쓸 수 있는 마법 주머니 같았다. 

    제크론이 짙은 눈썹을 장난스럽게 씰룩거리며 말했다. 

    “당신, 내가 본 얼굴 중에 가장 감동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 역시 돈이 최고군.”

    “맞아요. 돈이 최고죠.”

    치잇,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내 대답에 제크론이 눈매를 뾰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만은 지울 수 없었나 보다. 

    “당신, 그 말 진심이야? 돈이 최고라고?”

    “당신이 준 돈이 최고라고요. 당신이 준 게 아니라면 나에겐 의미 없어요.”

    “그거 좋은 의미인가, 아니면 나쁜 의미인가?”

    제크론은 가늘어진 눈매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 아니면 기분 좋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의 고민을 덜어 줘야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가볍게 말했다. 

    “좋은 말이죠.”

    “그렇다고 치지.”

    제크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생긋 웃어 보였다. 

    아침부터 산뜻하게 팔불출미를 발산하는 사랑스러운 남편을 보며 나는 식사를 이어 갔다. 

    *   *   *

    변이 마물 조사단은 신전에서 일했던 전적이 있는 인물들을 수소문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중이었다. 

    뎀프샤 기사단 소속인 윌리엄이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를 이어 갔다. 

    조쉬가 목소리 크기를 낮추라고 한 차례 주의를 줬지만, 긴장했는지 금방 잊고는 또 목소리 크기를 키워 버리는 윌리엄이었다. 

    “마지막으로 ‘미치광이 외팔이’라고 불리는 인물에 대한 제보가 있었습니다.”

    “미치광이라니….”

    얼마나 쓸 만한 정보가 없었으면 ‘미치광이’ 소리까지 듣는 자의 말을 보고서에 포함시켰을까.

    제크론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도로 삼키며 윌리엄에게 보고를 이어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