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위벨교 신전에서 행하는 아르젠토 찻잎을 비롯한 주요 약초들의 유통 관리에 대한 총체적 조사가 필요하다는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전하.”
제크론과 매튜의 보고를 들을 황태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의 표적으로도 위벨교 신전이 지목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신전에서 관리하는 약초들의 유통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다니.
황태자로서는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이었다.
쉐리던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부터 왕실과 위벨교 신전은 비등한 세력을 유지하며 서로를 견제하기도, 또 서로를 돕기도 해 왔다.
그런 이유로 상대방을 이런 식의 거대 스캔들에 휘말리게 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다.
잘못했다가는 반격을 받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 반격은 위벨교 신전에서 비롯될 수도 있지만, 국민들의 신앙심에서 비롯될 가능성이 더욱 컸다.
황태자의 미간에 자리한 주름이 점점 진해졌다.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황태자의 눈치를 살피던 제크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가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가장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충직한 신하의 소신 발언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크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위벨교 신전 자체가 아닙니다. 뿌리와 줄기는 건드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썩은 가지들을 정리하는 정도겠지요.”
“썩은 가지라….”
황태자의 미간에 자리했던 주름이 서서히 옅어졌다.
마침내 황태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썩은 가지를 처리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결국 줄기와 뿌리도 서서히 썩어 들어가겠지. 윌트슨 공작과 루이스 경은 변이 마물 조사와 더불어 약초 관리 조사에도 힘을 써 주길 바라오.”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제크론과 매튜는 동시에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 * *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마주앉은 제크론과 매튜 사이에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매튜의 목소리가 커졌다.
“전면전으로 대응하시겠다고요?”
“그래.”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매튜와는 달리 제크론은 침착했다.
부연 설명을 요구하는 매튜의 표정을 모른 채 할 수 없어 제크론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지난 몇 개월 동안 혼자 숨어서 조사를 진행했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수확은?”
“…….”
날카로운 지적에 매튜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것저것 알아내려고 했지만, 그가 알아낸 것이라고는 ‘문제가 있음’이 전부였다.
문제의 근거라든가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절대적 신앙심을 지녔음에도 위벨교 신전의 약초 관리에 ‘문제 있음’을 알아내고 의심의 싹을 틔운 것은 작지만은 않은 성과였다.
“자네를 나무라는 게 아니야. 혼자서는, 숨어서는 그 본질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어. 위벨교 신전에 공식적으로 자료를 요청하고 조사단을 파견해야 해.”
제크론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하지만 매튜의 눈동자는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제크론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약초 관리에 대한 조사는 전면전으로 하고, 변이 마물에 대한 조사는 지금의 기조를 유지하며 비밀리에 진행할 거야.”
“아, 그렇다는 건….”
그제야 매튜의 눈동자에 약간의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제크론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슬며시 올라갔다.
“그래. 약초 관리 조사를 위해 신전에 공식적으로 접근해서 광범위한 자료를 긁어모으는 거지. 약초에 대한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변이 마물에 대한 자료까지.”
일리가 있는 접근 방식이었다.
매튜는 제크론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벨교 신전이라는 거대한 산을 마주한 매튜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크론과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크론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신전은 대대적인 약초 관리 조사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거야. 정신없는 틈을 타 허점을 보이면 바로 파고들어야지.”
후후, 의기양양한 제크론을 보며 매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것도 위벨교 신전을 상대로 말이야.’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만큼 제크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들어서 아는 것과 그의 진면목을 가까이에서 몸소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먼저 신문 기사를 내보내야겠군.”
창밖에 시선을 둔 채 담담하게 말하는 제크론을 보며 매튜는 전율로 떨리는 손을 몰래 말아 쥐었다.
* * *
다음 날, 위벨교 신전의 약초 관리에 대한 황실의 조사가 이루어진다는 기사가 여러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거기에는 제크론의 인터뷰 기사도 실려 있었는데, 그는 엘프윈이 젊은 시절 아르젠토 차에 중독됐던 사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은 표현했다.
황실에서 그에게 맡긴 조사 임무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임할 것이라는 다짐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날 대신전은 아침부터 비상사태였다.
대회의실에 모인 고위 신관과 신녀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대신관을 보며 거의 울부짖다시피 했다.
“황실에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요!”
“대신관님, 어떻게 대응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속히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강경하게 받아쳐야 합니다.”
대신관은 굳은 얼굴로 고위 신관과 신녀들이 하는 말을 경청했다.
대신관의 몸 전체에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짙어졌다.
열을 올리며 떠들던 신관과 신녀들이 어느새 잠잠해졌다.
그대로 얼마간의 침묵이 지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대신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그동안 약초 재배와 유통 관리에 문제점이 없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곳곳에서 헉! 탄식을 내뱉거나, 흡!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관님, 그렇다면 이대로 황실의 조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사단이 신성한 신전을 이리저리 파헤치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만 보실 작정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대신관님!”
여기저기서 울분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대신관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말이 안 되는 것은 이 상황 자체입니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열기에 들뜬 대회의실의 공기를 진동시키자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고위 신관과 신녀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신관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쉐리던이라는 지붕을 지탱하는 두 기둥 중 하나는 황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위벨교입니다. 황실과 위벨교는 동등한 크기와 힘으로 쉐리던을 받쳐야 합니다.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아무리 다른 한쪽이 굳건하다고 해도 쉐리던은 무너집니다.”
대신관의 입 밖으로 천천히 흘러나온 말이 대회의실 전체를 휘돌았다.
대회의실을 채운 고위 신관과 신녀들은 대신관의 한마디 한마디에 압도당했다.
그만큼 대신관의 말은 위력이 대단했다.
“그런데 황실에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조사를 하겠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세상 사람들은 위벨교의 부정부패를 의심하고 말을 전할 것입니다. 그릇된 소문과 억측이 난무하겠지요. 우리 위벨교의 평판을 훼손시키는 사건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꼴깍,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잔뜩 긴장한 누군가는 다리를 덜덜 떨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위벨교는 쉐리던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아픈 부분이 있다면 치료해야 하고, 썩은 부분이 있다면 도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쉐리던이 삽니다.”
대신관의 발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했고, 또 엄격했다.
“우리 위벨교는 조사단의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 줘야 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역시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 후로 구체적인 방안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며 회의는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 * *
대신관의 집무실.
밖은 밝은 한낮이었지만, 두꺼운 커튼이 쳐진 집무실 안은 어두컴컴했다.
대회의실에서는 강인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인 대신관이었지만, 집무실에 혼자 앉은 대신관의 굽은 등에서는 강인함이나 단호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어두운 실내에 대신관의 가느다랗게 뜬 눈동자만이 날카롭게 빛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가 으득 갈렸다.
언젠가는 약초 관리 체계를 손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강제적이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대체 왜…!’
대신관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바로 제크론 윌트슨의 얼굴이었다. ‘전쟁 영웅’이라 불리니 진짜 자기가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안 끼는 자리가 없었다.
임산부에 대한 신성수 치료를 실시해야 한다는 건의, 신관과 신녀의 절대적인 수를 늘려야 한다는 건의, 모두 제크론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다.
이번 약초 관리 조사 건조차!
‘윌트슨 공작 부인이 어린 시절 아르젠토 차에 중독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정략결혼일 게 뻔한데 애틋한 부부 사이인 척 애쓰는 게 가증스러웠다.
대신관의 꽉 말아 쥔 주먹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렸다.
후우, 그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열을 가라앉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일 따위로 위벨교가 흔들리지 않음을 만천하에 보여 줘야 했다.
그때였다.
똑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신녀 아미트와 베로니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