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42)
  • 94화

    “더바인 광석이라면… 신성력과 관련이 있다는 거요?”

    “그렇죠.”

    스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실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스탠리에게 꽂혔다. 

    “앞으로 좀 더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소. 하지만 현재까지 드러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마물들이 변이를 일으킨 가장 큰 원인이 신성력이라고 할 수 있겠소.”

    스탠리의 어마어마한 발언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제크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상천외한 변이 마물의 등장에 신성력이 개입됐다니! 

    사실이 맞는다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대한 사건이었다. 

    또 그만큼 충분한 근거 없이 경솔하게 발설했다가는 신성 모독죄로 감옥에 갇힐 수도 있었다. 

    감옥에 갇히는 형벌은 오히려 다행인 수준이다.

    자칫 잘못해서 대신전의 심기를 건드리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신성 모독죄였다. 

    연구실에 흐르는 정적을 깬 것은 매튜였다. 

    “사실 확인을 위해서 신전에 문의를 해 봐야 하는 걸까요?” 

    “아니, 그럴 수 없어.”

    제크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탠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높은 확률로 이번 일의 배후에 신전이 개입돼 있을 수도 있소.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선 안 되겠지. 조용히 숨어서 그들의 뒤를 캐야 해요.”

    “신전의 뒤를 캔다고요?”

    매튜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대신관의 권위는 황제의 권위에 버금간다. 

    그러므로 신전의 뒤를 캐는 일은 황실의 뒤를 캐는 일과 같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매튜를 비롯한 연구실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에 똑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제크론의 표정에만 변화가 없었다. 

    그는 단호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내용을 황태자 전하께 보고 올리며 조사단의 증원을 요청할 생각이야. 해야 할 일이 많겠어.”

    “어떤 일들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까?”

    황실 마법 기사단 단장 소피아 루커의 물음에 제크론은 미간을 좁히며 생각나는 대로 빠르게 대답했다. 

    “흐음…. 과거 신관이나 신녀였지만 지금은 아닌 자들을 수소문해서 조사할 필요가 있겠어.”

    소피아가 부단장 글렌 손더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글렌이 바로 수첩을 꺼내 제크론이 하는 얘기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제크론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신관과 신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신전에서 일했던 이력이 있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하면 좋겠어. 아주 작은 단서라도 필요하거든.”

    “아, 그리고!”

    갑자기 중요한 게 떠오른 듯 소피아가 소리치듯 말을 보탰다. 

    “차드엘 산맥 주변에 위치한 신전부터 공략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마물 변이 실험을 하려면 마을과는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한 신전에서 했을 테니 말이야.”

    “으으… 소름 끼치는군!”

    듣고만 있던 스탠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서 가장 신성해야 할 장소에서 마물 변이 실험을 했다니! 

    자신의 발견으로 인해 세운 가설이었지만,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상적인 국민들이라면 황제를 믿고 따르는 것처럼 대신관을 믿고 따랐다. 

    황제가 외부 세계의 무력으로부터 국민들을 지켜 주는 존재라면, 대신관은 내면세계를 어지럽히는 악한 것들로부터 국민들을 지켜 주는 존재라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심은 태어날 때부터 심어져서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내렸다. 

    그런데 변이 마물을 만들어 낸 배후 세력이 진짜 신전이 맞는다면 전체 국민들이 받을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하리라. 

    연구실에 모인 모두의 얼굴에 착잡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의문점이 생겼고, 그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조사를 이어 나갈 뿐이다!”

    제크론이 낮은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립을 지키고 오로지 진실만을 쫓기를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명 받들겠습니다, 각하.”

    제크론의 명령에 조사단원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멀뚱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던 스탠리도 어색하게 까딱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서 오세요! 슈라더 후작 부인, 브랜차드 자작 부인!”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공작 부인!”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공작 부인!”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오후. 

    감사하게도 슈라더 후작 부인과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공작성을 방문했다. 

    나는 아직 침실 밖을 나갈 수 없는 몸이었기에 침실과 연결된 개인 응접실에서 그들을 맞았다.

    재빨리 세팅된 티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은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눴다. 

    실내악단을 고용하고 싶어 하는 귀족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마법 마차, 알타라스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유모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이동식 아기 침대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도련님께서 방금 막 깨셨어요. 기분이 좋아 보이세요.”

    “우리 세르안! 착하게도 손님들이 오신 걸 알고 기분 관리도 잘했네!”

    나는 유모에게서 세르안을 받아 안았다. 

    유모의 말대로 낮잠을 기분 좋게 잘 잤는지 세르안은 연신 방긋방긋 웃었다. 

    “어머나! 윌트슨 공작을 꼭 빼닮았네요!”

    “그러게요! 이렇게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기는 처음 봐요!”

    슈라더 후작 부인과 브랜차드 자작 부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아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나는 세르안을 조심히 후작 부인에게 건넸다. 

    역시 딸, 아들 여럿을 키운 경험이 있는 후작 부인이라 그런지 아기를 안는 것도 초보 엄마인 나보다 더 자연스러웠다. 

    세르안을 받아 든 후작 부인의 눈매가 반달로 휘었다. 

    “우쭈쭈! 울지도 않고, 착하기도 하지! 우쭈, 쭈쭈쭈!”

    후작 부인이 오리처럼 입술을 앞으로 내밀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자 세르안이 꺄르륵 웃었다. 

    아기의 맑은 웃음소리에 우리도 따라 웃었다.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났는데도 무척 건강하네요!”

    “맞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난산이었다고 들었어요.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공작 부인!”

    자작 부인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맞닿은 살갗에서 따스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던 자작 부인의 얼굴에 바로 익살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젠 제 차례예요, 슈라더 후작 부인. 욕심 부리시면 안 됩니다.”

    빙긋빙긋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단호해서 우스웠다. 

    “알았어요. 뺏기기 싫지만 어쩔 수 없죠. 공평해야죠.”

    슈라더 후작 부인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세르안을 넘겨줬다.

    명랑한 분위기와는 달리 한 손으로 아기의 뒷목을 단단히 받치면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모습이 역시 육아를 해 보신 분다웠다. 

    물론 대한민국 육아맘들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 전에 들렀던 메릴 선생님이나 프렛 백작 부인, 데이비스 자작 부인보다야 백배 나았다. 

    “아휴! 예뻐라! 아가, 다른 건 다 됐고, 건강하게만 자라렴!”

    세르안을 품에 안은 브랜차드 자작 부인의 입에서 탄성이 뿜어졌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빌었다. 

    세르안의 인생에서 오늘 같은 날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나길. 

    진심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때였다.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부인! 제가 세르안의 대모가 되어도 괜찮을까요?”

    “대모…요?”

    익숙하게 들었던 단어가 아니라, 순간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먼저 반응한 것은 슈라더 후작 부인이었다. 

    “어머나, 안 돼요! 제가 하려고 했어요! 제가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생각만 해선 안 됐죠, 후작 부인.”

    브랜차드 자작 부인이 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르안에게로 향한 두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후작 부인에게로 향한 목소리는 건조하기만 했다. 

    “생각만 해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행동을 해야죠.”

    “이런… 제가 선수를 놓쳤군요!”

    힝, 아쉬워라, 후작 부인이 미련이 남아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상황 파악이 완료된 나는 거의 외치다시피 말했다. 

    “어머! 대모님이라니, 생각도 못했어요! 영광이에요! 정말 감사해요, 브랜차드 자작 부인.”

    “제가 영광이죠.”

    시선을 마주친 자작 부인이 생긋 웃었다.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갑자기 슈라더 후작 부인이 외쳤다. 

    영문을 모르겠는 나와 브랜차드 자작 부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후작 부인을 봤다. 

    슈라더 후작 부인이 눈썹을 씰룩거리며 승리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남편이 우리 세르안의 대부가 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럼 저도 겸사겸사 대모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대부는 대부고, 대모는 대모죠. 대부의 부인이라고 해서 대모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 너무 안일한 생각이세요, 후작 부인!”

    두 중년 부인의 기 싸움이 팽팽했다. 

    갑자기 눈가에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두 분이 우리 세르안의 대모가 되겠다고 싸우고 계셔…!’

    단지 목숨을 연명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삶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도 넘치도록 받고 있음에 감개무량했다. 

    “진짜… 고맙습니다!”

    꾹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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